(6·完)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떻게 지켰나

8.15 해방은 연합군의 승리로 얻은 선물이 아니다

(6·完)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떻게 지켰나

김갑제<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국가보훈위원회 위원>

선열들 피눈물 세월 견디며 ‘대한민국’ 명맥 유지

1932년 윤봉길 의거후 일제 급습 피해 상하이 떠난 뒤

8년여 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 ‘대장정’

‘독립위해 살아남고자’ 아무리 멀고 험해도 좌절 안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경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일본 경찰과 헌병, 밀정의 감시를 피해 뱃사공 주애보와 함께 낮에 이동했던 나룻배. /김갑제 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유학했다 해서 널리 알려진 항저우 고려사 1920년대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이 소실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복원에 힘썼으나 이루지 못 하고 그의 외손녀 사위인 전 고려대 총장 김준엽이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갑제 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
중국 충칭(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항일독립운동사적지탐방단의 기념사진. 탐방단이 포즈를 취한 자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환국기념사진을 찍었다. 2018항일독립운동탐방은 광주지방보훈청 주최, 광복회광주전남지부 기획으로 제73주년 광복절을 기념해 지난 7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됐다. 김갑제 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 등 광복회원 등이 참가한 탐방단은 중국내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주요 항일 사적지를 둘러보고, 새로운 항일 현장을 발굴하기도 했다. /광복회 제공
중국 충칭(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내 국무원 회의실. 일제의 압박을 피해 1932년 5월 상하이를 떠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8년여 피눈물 세월을 견뎌내며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했다. /김갑제 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피눈물의 세월을 견디어야 했다. 1932년 5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전장(鎭江)·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치장 등지로 피난을 다니다가 8년만인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했다. 대장정이었다. 대장정(大長征)하면, 마오쩌둥(毛澤東)과 중국공산당을 떠올린다. 중국공산당의 홍군은 장제스의 중국국민당 군대 공격을 받고, 1934년 10월 근거지였던 루이진(瑞金)을 떠난다. 이후 1만2천여km를 걸어 다음 해 10월 옌안(延安)에 도착한다. 같은 길은 아니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마찬가지다. 살아남기 위해 8년 동안이나 멀고도 험한 길을 가야 했다.

임시정부의 근거지는 상하이였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은 후 일제 경찰의 급습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임시정부는 프랑스조계 당국으로부터 일정한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프랑스조계가 더 이상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일제 경찰이 프랑스조계로 들이닥쳤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체포를 피해 몸을 숨겨야 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국무위원 일부만 알고 있었다. 의거가 성공하자, 김구는 요인들에게 연락하여 피신하도록 했다. 의거가 결행된 것이 오전 11시 40분경인데, 오후 1시경에 일제 경찰이 들이닥쳤다. 급박한 순간이었다. 프랑스조계 당국도 이들을 제지할 수 없었다. 일제 경찰은 헌병·밀정들과 함께 임시정부와 가족들의 거주지역인 바아캉리(寶康里)와 마땅루(馬當路) 일대를 돌아다니며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안창호와 김덕목을 비롯한 12명이 체포되었다.

안창호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김구는 안창호에게도 피신하라는 편지를 써서 김영린이 보냈지만,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 안창호는 집에 없었다. 이만영에게 소년동맹회에서 주최하는 어린이날 체육대회에 경비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만영은 이유필의 아들이었다. 김영린과 길이 엇갈렸다. 이유필 집에 들어서다가 일제 경찰과 맞닥뜨렸다. 피체된 안창호는 일본헌병대사령부에서 신문을 받고, 국내로 압송되었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함께 움직이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제 각각 피신했다.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은 현재 이웬(豫園)이 있는 상하이현성의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 몸을 숨겼다. 길이 복잡하고 인구가 조밀하여 숨기 적당한 곳이었다. 조소앙은 중국인 친구 집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그곳에 은신했다. 김구는 김철· 엄항섭과 함께 난스(南市)에 있는 미국인 목사 피치(George Ashmore Fitch) 집으로 갔다. 피치는 김철과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대부분 몸은 피했지만, 잃은 것이 많았다. 수립 초기부터 대표적 지도자로 역할 하던 안창호가 피체되었고, 임시정부 문서도 모두 일제 경찰에게 탈취 당했다. 상하이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다. 물색한 곳이 항저우(杭州)였다. 항저우는 상하이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다. 일단 몸을 숨겼던 조소앙· 김철 등 국무위원들은 1932년 5월 10일 항저우로 빠져 나갔다. 임시정부의 여당이던 한국독립당도 항저우로 이전하였고, 가족들도 옮겨왔다. 처음에는 시내 칭타이 제2여사(淸泰旅社)라는 여관에 머물며 사무를 보다가 후볜춘(湖邊村) 23호에 청사를 마련했다. 이 청사는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항주구지기념관’으로 꾸며 놓았고, 중국정부는 이를 국가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일부 국무위원들과 김구는 자싱(嘉興)으로 피신했다. 박찬익이 중국측에 교섭하여 피신토록 한 곳이 자싱이었다.

당시 박찬익은 중국국민당 국제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위험에 처한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였고, 중국국민당 첩보기구 ‘CC단’을 운영하던 천리푸(陳立夫)의 도움을 받았다. 천리푸는 저장성장(浙江省長)을 지낸 자싱의 유력인사 추부청에게 피신처를 마련해 줄 것과 특별히 김구를 부탁했다. 이동녕·이시영·조완구 등이 먼저 자싱으로 옮겼다. 피치의 집에 은거해 있던 김구도 엄항섭과 안공근이 자싱으로 모셔왔다. 김구는 추부청이 별도로 마련해 준 그의 수양아들 집에 머물렀다.항저우와 자싱에 피난처를 마련하였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일제 경찰의 추격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난 사실을 안 일제는 경찰· 밀정 등을 풀어 사방으로 추격하고 다녔다. 특히 김구에게는 현상금 60만원을 내거는 등 체포를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다. 당시 60만원은 현재 180억원 정도. 엄청난 액수가 아닐 수 없기에 일제 경찰보다도 동포들이 더 무섭기도 했다고 한다. 현상금에 눈이 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항저우에서도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려워졌다. 항저우에서의 활동을 탐지한 일제가 추격의 범위를 좁혀온 것이다.

임시정부는 난징(南京)으로 이전하고자 했다. 난징은 중국정부의 수도로 일제의 추격을 피할 수 있고, 피신하기도 용이하다는 점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측에서 난색을 표했다. 난징위수사령관인 구정룬(谷正倫)은 난징에 임시정부 사무소를 두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당시 중국정부는 중국공산당을 토벌하는데 주력하고 있었고, 일제와의 마찰을 최대한 피하려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또 다른 사정도 있었다. 일제로부터 김홍일을 체포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김홍일이 윤봉길 의사의 폭탄을 제조해 준 것을 파악하고 그를 체포하려고 했다.

중국 측은 상하이 병공창에 근무하던 김홍일을 난징으로 불러들여 공병창 주임에 임명했다. 이 사실을 파악한 일제가 김홍일을 체포 인도하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난징으로 오면서 김홍일은 왕이수(王逸曙)라는 중국 이름을 사용했다. 공병창 주임은 중국인이라며, 일제의 압력에 버티고 있던 상황이었다.천리푸가 대안을 마련해 주었다. 전장(鎭江)이란 곳이었다. 당시 천리푸는 중국국민당 조직부장으로 장쑤성(江蘇省) 주석을 맡고 있었다. 전장은 장쑤성의 성도였다. 난징과는 60km 정도로 가까웠다.

1935년 11월 임시정부는 전장으로 이전했다. 사무소를 전장에 두었지만, 대부분의 인사들은 난징에서 거주하였다. 사무소 이전에 난색을 표했던 구정룬은 김구에게 난징에 머물도록 권유했다. 그는 난징의 일본영사인 스마(須麻)가 김구 체포를 요청해왔을 때 “일본에서 큰 상금을 내걸었으니 김구를 내가 체포하면 상금을 내게 달라”고 했다면서, 김구에게 난징에 머물 것을 당부했다.

임시정부 사무소를 두는 것은 허락할 수 없지만, 개별적으로 머무는 것은 막지 않겠다는 것이었다.전장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동녕·이시영·조완구·조성환 등이 전장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 정도이다. 이후 임시정부는 2년 동안 전장에 머물렀지만, 그 소재지조차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전장의 향토사학자들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머문 곳이 무웬(穆源)소학교라 하였고, 전장시 당국은 이곳에 임시정부진열관을 만들어 놓았다.

1937년 11월 전장에서 다시 창사(長沙)로 옮겨갔다. 일본군이 난징을 향해 진격해오자 피난을 떠난 것이다. 1937년 7월 7일 일제는 루거우챠오(盧構橋)사건을 일으켜 중국대륙을 침략했다. 북경·천진 등을 점령한 일본군은 8월 13일 상하이를 점령하였고, 이어 중국의 수도인 난징으로 공격해 왔다. 중국은 수도를 지키기 위해 많은 군대를 투입하였지만, 막아내지 못했다. 중국정부는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으로 옮겨갔다.임시정부도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적지로 정한 곳이 창사였다.

창사는 후난성(湖南省)의 성도이다. 창사를 목적지로 정한 것은 물산이 풍부하고 물가가 싸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직계 가족들만도 100여명이었다.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관련 단체에 소속된 인원들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수백 명의 인원들이 생활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한 곳이 창사였다.전장에 있던 요인들이 먼저 창사로 향했다. 이들은 관련 문서들을 챙겨 11월 20일 윤선(輪船)을 타고 전장을 떠났다.

난징에서는 100여명이 목선 두 척에 나누어 타고 11월 23일 출발했다. 배를 타는 과정부터 아비규환이었다. 중국정부가 떠난 후 많은 시민들도 피난길에 올랐다. 이들이 한꺼번에 강가로 몰려들었고, 서로 먼저 배를 타려고 아귀다툼을 벌인 것이다. 당시 함께 배를 탔던 안중근의 조카이자 한국 육군중장으로 예편한 후 광복회장을 역임한 안춘생의 증언에 의하면, 인파에 밀려 강으로 빠져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1937년 12월 창사에 도착했다. 그 무렵 난징에서는 대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난징은 12월 13일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남녀노소도 구별하지 않았다. 방법도 차마 글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는 한 달여 동안 계속되었다. 희생된 인원이 30만 명을 넘었다. 이를 ‘난징대학살’이라고 한다.

창사에서의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점차 대륙 안으로 공격해 왔고, 창사도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임시정부 요인과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간부들이 모여 피난할 곳을 협의했다. 결론은 중국대륙 서남쪽인 난닝(南寧)이나 윈난(雲南)으로 가자는 것으로 모아졌다. 그곳에 가면 미주교포들과 연락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 때문이었다.그러나 이동수단이 문제였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피난을 떠나는 상황에서 100여명이 넘는 대가족이 많은 짐들을 가지고 이동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김구는 후난성 주석 장즈중(張治中)을 찾아갔다. 우선 광저우(廣州)까지 가는 교통편을 부탁했다. 그는 기차 한 칸을 무료로 내주었다. 광둥성 성장 우티에청(吳鐵城)에게 친필 소개장도 써 주었다. 김구는 이를 받아들고, 중국어에 능통한 조성환· 나태섭과 함께 먼저 출발했다.

임시정부와 그 가족들은 1938년 7월 17일 창사를 떠났다. 기차를 탔지만, 가는 길은 험했다. 일본 비행기의 공습을 받은 것이다. 갑자기 일본 비행기가 나타나 폭격을 퍼부어댔다. 공습이 시작되면 기차는 멈추고, 수풀속이나 나무 밑에 가서 숨어야 했다. 이러길 여러 차례 반복했고, 사흘만인 7월 20일 광저우에 도착했다. 다행히 희생자는 없었지만, 고통스럽고 위험한 피난길이었다. 먼저 도착한 김구는 거처를 마련해 놓았다. 광저우에서 중국군으로 복무하고 있던 채원개·이준식의 도움을 받아 시내의 동산바이웬(東山柏園)과 아세아여관을 마련해 두었다. 동산바이웬은 임시정부 청사였고, 가족들은 아세아여관에 머물렀다.

두 달만인 9월 17일 퍼산(佛山)이란 곳으로 옮겼다. 일본 비행기가 연일 광저우시내를 폭격하였기 때문이다. 불산은 광주에서 25km 떨어진 곳에 있는 조그만 도시였다. 전쯔단이 주연한 항일영화 ‘예원(葉問)’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광저우에 도착하였지만, 난닝이나 윈난으로 가는 것은 어려웠다. 김구는 장제스에게 전보를 보내 중국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옮길 것을 요청했다. 오라는 답신을 받았다. 김구는 이전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조성환·나태섭과 함께 다시 창사를 거쳐 충칭으로 갔다. 광저우에서는 세 달 정도 머물렀다. 최근 청사로 사용하였던 동산바이웬의 유적지가 확인되었다. 2017년 광저우총영사관에서 현재 쉬꾸웬루(恤孤院路) 12호가 동산바이웬이었음을 찾아낸 것이다.

광저우에서 다시 류저우(柳州)로 이전했다. 일본군이 불산 근처까지 진격해오자 다시 피난을 떠나야 했다. 목적지는 꽝시성(廣西省) 류저우였다. 김구가 충칭에 가서 중국정부와 교섭할 때, 일본군의 공격으로 급하게 류저우를 택한 것이다. 1938년 10월 18일 광저우시내와 불산에 머물고 있던 임시정부와 가족들은 배를 타고 류저우로 향했다. 뱃길은 험했다. 한 달 보름여만인 11월 30일에 도착할 수 있었다.류저우에서 네 달 동안 머물렀다. 도착 당시만해도 류저우는 일제의 침략을 받지 않았고, 시민들의 항일의식도 약했다. 임시정부 인사들을 망국노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일본 비행기들이 류저우를 공격해 왔다. 공습이 시작되면 방공호로 들어가 숨어야 하는 것이 일상이다시피 했다.1939년 4월 류저우를 떠나 치장(?江)으로 향했다. 충칭에 간 김구가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치장에 근거를 마련하고, 이동하는 비용까지 보내왔다. 버스 6대를 배정받아 꾸이양(貴陽)까지 이동했다. 꾸이양은 높은 산이 많은 곳으로, 4000m 이상 되는 산도 있었다.

치장으로 가려면 이를 넘어야 했다. 두 팀으로 나누었다. 일부는 버스로, 일부는 배를 탔다. 버스길도 뱃길도 모두 험했다. 버스는 깍아지른 천길 낭떠러지기인 절벽위를 지났다. 뱃길은 암초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배밑이 평평한 배를 타야 했고,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청년들이 양쪽 계곡에서 밧줄로 끌어야 했다.한 달만인 1939년 5월 치장에 도착했다. 치장은 충칭에서 남쪽으로 50km 지점에 있는 조그만 도시였고, 전란으로부터 비교적 안정된 곳이었다. 도착하기 전에 조성환이 치장시 당국과 협의하여 거처를 마련해 놓았다. 이동녕·이시영 등 가족이 없는 원로들은 정정화 등 젊은층의 가족들이 모시도록 하고, 각 단체나 가족 단위로 숙소를 배정받았다.

치장에 도착해서야 피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1940년 9월 임시정부는 치장에서 충칭으로 이전하였다. 임시정부의 주요한 업무는 중국정부가 있는 충칭에서 이루어졌고, 김구 등은 충칭에 있었다. 현재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이지만, 당시 충칭과 치장은 하룻길 거리였다. 충칭과 치장에 분산되어 있어 활동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임시정부를 충칭으로 이전한 것이다. 그리고 충칭 교외의 투챠오(土橋)라는 곳에 있는 땅을 빌려 거주지를 마련하고, 치장에 있는 가족들도 이주시켰다. 상하이에서 충칭까지의 시기를 ‘유랑기’라 한 경우도 있고, ‘이동시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상하이를 떠난 것부터 각처로 옮겨 다니게 된 계기나 과정을 생각하면, 이런 용어가 적절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공산당의 홍군이 중국국민당 군대의 토벌을 피해 각처로 옮겨 다녔듯이, 임시정부도 일본 경찰과 군대를 피해 다닌 것이다. 임시정부는 1932년 5월 일제 경찰의 급습을 피해 상하이를 떠났다. 이후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피해 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 등지를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하였다. 8년여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맥은 선열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지켜낸 결과였다. 광복 일흔세 돌에 돌아보는 우리의 독립운동사. 누군들 폄훼하고 왜곡할 수 있을 것인가. 연재를 마치며 나는 시린 가슴으로 여러분께 묻는다. 당신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누구였을까? 끝으로 진정한 광복은 통일임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슬프고 아프지만 그래도 찬란한 우리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사를 연재하게 해준 남도일보에 광복회와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의 이름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참고문헌>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이강훈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한시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들, 김구 ,조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국가보훈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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