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55. 화순 쌍봉사의 영화와 오욕

깨우침과 역사의 질곡이 함께 자리한 화순 쌍봉사

도윤이 세우고 혜심이 法力 키운 1천300년 고찰

무신정권 지원 아래 고려 선종 대가람으로 우뚝

최우 손자 최만전(최항), 주지로 있으며 못된 짓

고려조각예술 극치 ‘철감선사탑과 비’ 자리한 곳
 

일제가 작성한 조선고적도보에 나와있는 쌍봉사

■유서 깊은 선종의 가람 화순 쌍봉사

전남 화순에 있는 쌍봉사(雙峰寺)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그런 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선종을 널리 알린 철감선사(徹鑒禪師) 도윤(道允)과 고려무신정권 최항(崔萬宗) 등이 쌍봉사와 인연을 갖고 있다. 최항의 아버지는 최이(崔怡)고, 할아버지는 최우(崔瑀)다. 최항은 최이의 서자다. 만전(萬全)이라는 법명으로 쌍봉사에서 주지를 지냈다. 고려무인정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각종 사극에서 ‘망나니 스님 만전’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최항이다.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자리하고 있는 쌍봉사는 삼국시대에 세워진 절이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동리산문(銅裏山門)을 곡성 태안사에서 개창한 선사 혜철(785~861)이 839년(신라 신무왕 1)에 귀국해 쌍봉사에서 하안거(夏安居)를 지냈다는 기록을 보면 그 이전부터 있었음이 분명하다. 쌍봉사를 포함한 주변세력은 견훤을 지지하는 후백제 세력권에 있었다가 후에 왕건의 세력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진각국사 혜심

쌍봉사는 선종의 대가람이다. 쌍봉사에 있는 철감선사탑비는 당나라로 유학 갔던 도윤이 쌍봉사에 머물면서 선종을 널리 알렸음을 시사한다. 철감선사는 9산 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닦은 분이다. 그만큼 선종에 있어서 쌍봉사는 중요한 절이다. 도윤은 영월 법흥사의 사자산문 개산조로 알려졌다. 그의 제자 징효 절중이 사자산문의 교단을 형성했다.

선종의 기틀을 다진 쌍봉사는 고려시대에 정치·종교의 중심에 서게 된다. 정권을 잡은 무인정권이 선종불교를 키웠기 때문이다. 정중부, 최충헌 등 무인집권세력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문벌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교종불교를 억압했다. 대신 교종불교 세력에 눌려 산간지방에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던 선종불교 세력을 의도적으로 양성했다. 산속의 조그만 선방들을 키워 큰 절로 만들었다. 무인정권 시대에 선종중심의 결사(結社)가 이뤄진 이유다.

1970년대 쌍봉사 대웅전 모습

최씨 무인 집권을 이어받은 최이는 두 아들인 만종(萬宗)과 만전을 수선결사(修禪結社) 제2세 진각 국사(眞覺國師) 혜심(惠諶)에게 보내 출가시켰다. 만종은 진주(晉州)의 단속사(斷俗寺)로, 만전은 화순의 쌍봉사 주지로 각각 보냈다. 만전이 주지로 있는 쌍봉사는 대단한 사세를 누렸다. 고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최이의 아들이 주지로 있는 만큼 관은 물론이고 주변사찰, 백성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쌍봉사의 사세는 여전했다. 비록 조선왕조를 열었던 개국공신들은 불교에 적대적이었으나 조선 왕실은 여전히 불교를 믿었다. 조선왕조 개국공신들은 사찰이 소유하고 있는 논밭을 대폭 줄이고 사찰에 소속돼 있던 노비도 몰수 조치했다. 고려 왕실과 무신정권의 지원 아래 부와 권세를 누리던 사찰은 급속도로 퇴락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쌍봉사는 조선왕실의 지원을 받아 그런대로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쌍봉사 대웅전 옆모습

쌍봉사는 정유재란 때 왜군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이후 인종 때부터 정조 때까지 중창과 중수가 이뤄졌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왕들의 후원을 받아 큰 절로 남아있었으나 사찰에 대한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 너무도 심해 어려움이 컸다. 쌍봉사는 마침내 능주 유림에 속하는 절이 되고 말았다. 쌍봉사의 굴욕이었다. 부처님을 모시면서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대가람이 유림의 지시를 받으며 현물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장소가 돼버린 것이다.

쌍봉사는 일제 강점기인 1911년에 조선총독부가 사찰령을 내려 조선불교를 정리함에 따라 해남 대흥사의 말사로 편입됐다. 광복 이후 대한 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가 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 불태워졌던 쌍봉사는 1984년 다시 화마를 입는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3층 목탑 양식의 대웅전이 또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쌍봉사 대웅전은 1986년에 복원된 것이다.

2018년 쌍봉사 대웅전의 옆모습

■고려 무신정권과 쌍봉사

1170년 고려에 무신정권이 들어섰다. 집권한 무인들은 문신인 문벌귀족 및 그들과 밀착된 교종불교 쪽을 억압했다. 권력을 장악한 정중부는 왕실이나 문인귀족과 밀착해 있던 화엄종이나 법상종에 적대적이었다. 정중부에 이어 60년 최씨 무신정권의 길을 연 최충헌(崔忠獻, 1149~1219)또한 기존 불교계 인사들을 척결의 대상으로 삼았다. 최충헌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승려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죽이거나 먼 곳으로 유배를 보냈다.

최충헌은 선종의 고승 지겸(志謙, 1145~1229)을 발탁해 각종 선회(禪會)를 열도록 했다. 교종세력에 눌려 지방의 산중에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던 선종세력을 키웠다. 산속에 있던 오래되고 조그만 절(古寺)를 구입해 새로 넓히고 크게 선방을 만들었다. 또 불교의 모든 종파를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최충헌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마지막 세력인 교종불교의 세를 완전히 꺾었다. 최충헌은 집요한 노력 끝에 마지막까지 무인정권에 저항했던 불교계를 평정했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선종에 관심을 쏟았다. 최우는 무인정권을 옹호해줄 수 있는 새로운 불교세력이 필요했다. 백성들의 새로운 정신적 지주가 돼줄 새로운 종단이 필요했다.

최우는 무인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새로운 불교세력을 모색했다. 그 때 최우의 눈길을 끈 사찰이 승주에 있는 수선사(修禪社)였다. 1207년, 조계산 수선사에 새로운 결사도량이 들어섰다. 수선사는 지눌(知訥, 1158~1210)이라는 고승을 중심으로 해 참선을 통해 득도를 구하는 결사 수행자들의 도량이었다. 지눌은 신종 3년(1200)에 자신이 창건한 정혜사를 송광산 길상사로 옮기고 희종 원년(1205)에 수선사로 개칭했다. 수선사는 조선 초기에 송광사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최우는 수선사에서 혜심(惠諶:1178~1234)을 만나 깊은 감명을 느낀다. 혜심의 학문은 깊었고 그의 치열한 수행은 모든 불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210년 지눌이 적멸로 돌아가자(세상을 떴을 때) 혜심이 수선사 2세 사주를 맡았다. 혜심이 수선사 사주가 됐다는 소식에 고려 각지에서 혜심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혜심을 스승으로 모셨다.

문하시중(門下侍中:고려때 종일품 으뜸벼슬)이었던 최우도 그 중의 하나였다. 최우는 극진한 예를 갖춰 혜심을 대했다. 그리고 혜심을 개경으로 불러들이려 애를 썼다. 그러나 혜심은 끝내 이를 거부했다. 산중에서 참선을 하며 도를 깨친다는 선종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우는 혜심에게 선종의 최고 승계(僧階)인 대선사(大禪師)까지 수여했다. 그러나 혜심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고 그저 스스로를 ‘무의자(無衣子)’라 칭했다.

최우의 아들 최이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고려불교를 재편하고 새로운 불교세력을 끌어안아 무인정권의 기반으로 삼았다. 수선사 역시 무인정권의 후원을 바탕으로 해 교세를 넓히려는 의도를 지녔기에 최우, 최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인연으로 최이는 두 아들 만종과 만전을 수선사의 혜심에게 보내 출가시켰다. 이후 만전은 진주 단속사로, 만전은 화순 쌍봉사로 다시 보내져 각각 주지가 됐다.

■쌍봉사 주지 만전의 횡포

만종과 만전, 이 두 아들은 최이가 기생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다. 최이에게는 적자 아들이 없었다. 최이는 처음에는 사위에게 권력을 물려주려 했다. 서자였던 만종과 만전은 둘 다 성정(性情)이 포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권력욕 또한 대단했다. 그래서 최이는 두 아들을 경계해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냈다. 그렇지만 결국 만전은 최이의 뒤를 이어 무인정권을 이어받는다. 만전이 바로 최항이다.

만종과 만전은 고려 실권자 최이의 아들이라는 점을 이용해 백성들을 수탈하는데 전력했다. 애초부터 그들 형제는 불교수행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든 돈을 긁어모으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다. 만종과 만전,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흉년에 쌀을 빌려주고 추수 때 몇 배를 받아내는 고리대를 자행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누구도 그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관리들은 자칫하면 자신들의 목이 잘릴까봐 이들의 횡포를 눈감아주고 있었다.

만전이 주지로 있던 쌍봉사는 백성들의 원성이 쌓이는 절이 되고 말았다. 쌍봉사는 주지 만전이 백성들의 피를 빨아내는 소굴로 변해버렸다. 만전의 부하들은 아녀자들을 겁탈하고 관리들이 사용해야 하는 역마(驛馬)를 사사로이 이용하는 등 갖은 횡포를 부렸다. 만전의 부하 중 가장 악명이 높았던 사람은 통지(通知)였는데 지방 관리들은 만전의 위세에 눌려 그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만종, 만전 두 아들의 잘못을 정식으로 거론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신하도 있었다. 당시 형부상서(법무부 장관 격)였던 박훤과 경상도 순문사 송국첨은 최이에게 만종·만전 두 아들을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그 부하들을 처벌할 것을 청했다. 두 사람의 진언에 최이는 두 아들을 벌주고 백성들에게 착취한 재산을 몰수할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두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사실이 아니라고 우기자 오히려 박훤과 송국첨을 귀양보내버렸다.

영헌공 김지대 묘소. 경북 청도에 있다.

<고려사>에는 만전의 위세를 믿고 갖은 악행을 저지른 통지를 사형에 처해버린 강직한 관리 김지대(金之岱)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전라도 안찰사였던 김지대는 만전의 부하 통지를 붙잡아 죽여 버렸다. 나중에 정권을 잡은 만전(최항)은 자신을 벌줘야 한다고 주장했던 박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송국첨은 개경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지방 관리로만 지내게 했다. 그렇지만 김지대는 너무도 청렴하고 신망이 높았기에 어쩌지를 못했다.

■쌍봉사의 어제와 오늘

일제가 작성한 조선고적도보에 실려 있는 화순 쌍봉사 대웅전

쌍봉사는 화순군 이양면 계당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앞서 적은 대로 신라 경문왕(861~876년 재위) 때 철감선사 도윤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퇴락됐으나 1081년(문종 35)에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했다. 공민왕 때 전라도관찰사 김방(金倣)의 시주로 중창됐다. 1628년(인조 6년) 대웅전 중건을 비롯해 1667년(현종 8)·1724년(경종 4)에 중수됐다.

대웅전은 1984년 4월 촛불로 인한 일어난 화재로 불에 타버렸다. 1986년에 원형대로 복원됐으나 문화재에서 해제됐다. 경내에는 국보 제57호인 쌍봉사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과 보물 제170호인 쌍봉사 철감선사탑비(澈鑒禪師塔碑)가 있다. 1982년에 강동원이 편찬한 <화순의 전설>에는 ‘쌍봉사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쌍봉사 창건설화와 불사(佛事)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신라 때 18세에 출가한 철감 선사가 당나라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세상에 법을 펼치고자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의 중조산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은 산세와 지형을 보니 불사를 이룩하기 좋은 곳이었으나 이미 만금 부자가 터를 잡아 살고 있었다. 사람이 살기에 먹는 물이 좋지 않는 곳이기에, 철감 선사가 만금 부자에게 쌍봉 마을의 명당을 알려주어 이사를 가게하고, 중조산에 불사를 이룩하게 되었다.

조선 말엽의 큰 스님인 천봉 스님이 이 절에 잠시 머무르면서 말하기를, “대웅전이 세 번 칡덩굴로 덮여야 법당에 목탁 소리가 그치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다. 이는 큰 난을 세 번 겪어 절이 비어야 다음 세상이 화평하여 쌍봉사가 융성하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어느 해봄 윤보선 전 대통령의 조부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 칡덩굴에 싸인 법당을 발견하였고, 이후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한편, 6·25 전쟁까지 대웅전은 세 번이나 칡덩굴로 덮였다고 한다’

2018년의 쌍봉사 대웅전

여기서 ‘윤보선 전 대통령의 조부’는 전라남도 초대 관찰사를 지낸 윤웅렬(尹雄烈)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윤웅렬은 윤보선 前 대통령의 큰 할아버지다. 윤웅렬의 동생은 윤영렬인데 그는 6남3녀를 두었다. 윤영렬의 차남이 치소다. 치소의 아들이 바로 윤보선 전 대통령이다. 윤웅렬은 1884년 10월 김옥균 등 급진개혁세력이 주도한 갑신정변에 참여해 형조판서를 맡았으나 갑신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전남 능주(綾州)로 유배됐다.

능주로 유배됐던 윤웅렬이 쌍봉사 대웅전을 발견했다는 구전은 여러 정황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윤웅렬은 1896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른 13도제 시행으로 전라도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눠지자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로 부임했다. 그는 1910년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된 후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친일파로 분류되고 있다.

사찰이름이 쌍봉사인 것은 철감선사의 도호(道號)가 쌍봉이었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철감선사 혜심은 무등산의 ‘증심사’와 ‘약사암’도 창건했다.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있는 월남사(月南寺)도 혜심이 창건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월남사터삼층석탑에서 서북쪽으로 100m정도를 올라가면 월남사 진각국사 원조탑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 탑비는 거북받침돌에 몸을 올린 형태로 혜심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탑비다.

강진월남사지 진각국사비

학자들은 혜심이 무인정권의 지원을 받아 월남사를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혜심이 창건했다’고 기록돼 있는 것은 ‘퇴락한 월남사를 혜심이 크게 중창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주장하고 있다. 진각국사비는 매우 크고 웅장하다. 받침돌인 거북은 입에 구슬을 문 형상이다. 목을 길게 뺀 상태로 네발을 단단히 짚고 서 있다. 그 모습이 매우 사실적이고 강렬하다.

■쌍봉사 대웅전

쌍봉사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차가 다니는 도로 가까운 곳에 도량이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불과 50여m 떨어진 곳에 사천왕상이 있고 대웅전 역시 100여 걸음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호젓한 산길을 지나야 대웅전을 대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쌍봉사를 찾은 사람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맞닥뜨리는 쌍봉사 건축물들에 순간적으로 당황하기 쉽다.

대웅전 옆에서 새로 당우를 짓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다소 산만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대웅전의 날렵하면서도 세련된 모습을 대하는 순간 절로 탄성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넓고 웅장한 대웅전만 보다가, 한 칸에 불과한 대웅전을 대하니 생경하면서도 뭔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쌍봉사 대웅전 앞에 있는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쌍봉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의 일문인 사자선문의 개조인 철감선사가 통일신라 48대 경문왕 8년(868년)에 창건하였다. 대웅전은 평면이 방형인 3층 전각으로 사모지붕의 목조탑파형식을 지닌 희귀한 양식이다. 1936년 5월 3일 보물 제163호로 지정되어 보존해 오던 중 1984년 4월 2일 신도의 부주의로 소실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으며, 복원공사는 문화재관리국이 그간 자료를 수집하여 1985년 8월 5일 착공하여 1986년 12월 30일 준공,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쌍봉사자문

쌍봉사 대웅전은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 형식의 건축물이다. 쌍봉사자문(雙峰獅子門)과 천왕문(天王門)을 지나면 정면으로 바로 보이는 3층 건물이 대웅전이다. 1984년 화재로 불타버린 대웅전은 1628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도 목탑 형식의 건축물이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유재란 당시 불타버린 삼층전을 중창했다는 기록은 조선전기에도 같은 자리에 대웅전이 있었음을 적시하고 있다.

<디지털화순문화대전>에는 대웅전의 구조에 대한 설명이 아래와 같이 나와 있다.

‘대웅전은 평면이 정사각형인 3층 전각으로 1층에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는데, 2층과 3층은 통층으로 중심에 심주가 하나 있다. 같은 목조탑인 법주사 팔상전의 전체 모습이 윗 층으로 올라갈수록 체감이 심한 것에 비해 쌍봉사 대웅전은 각 층마다 완만한 비례를 가져 더 통일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또한 팔상전이 통간 형식으로 되어 있음에 비하여 쌍봉사의 목탑은 적층식으로 되어 있어 중국이나 일본의 목탑 형식과 유사한 구조를 하고 있다’

천왕문

■쌍봉사 철감선사탑과 철감선사탑비

대웅전 뒤 켠으로 나있는 좁은 길을 따라 100여m를 올라가면 국보 제57호인 쌍봉사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과 보물 제170호인 쌍봉사 철감선사탑비(澈鑒禪師塔碑)가 자리하고 있다. 철감선사탑은 8각 원당형(圓堂形)에 속하는 신라시대 부도(浮屠)다. 신라시대 부도 중 조각 장식이 화려한 최대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쌍봉사 철감선사탑과 철감선사탑비

사학자 노성태는 그의 저서 <남도의 기억을 걷다>에서 철감선사탑이 왜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지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철감선사탑에 대한 노성태 선생의 묘사가 너무도 적절하다. 표현이 쉬우면서도 이해하기가 좋아 다소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승탑의 맨 아랫부분에는 구름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꿈틀거리는 구름 속에 용이 새겨져 있고 구름 위에는 8마리의 사자가 다양한 포즈를 취한 채 앉아 있다. 부처의 설법을 사자후(獅子吼)라 부르듯 불교와 사자는 인연이 깊다. 화엄사의 4사자삼층석탑이나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는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의 몸돌을 사자가 받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국보 제57호 쌍봉사 철감선사탑

승탑에서 가장 잘록한 허리부분과 연꽃을 하늘로 향해 새긴 앙련(仰蓮)위의 안상(眼象, 코끼리 눈)에는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가릉빈가는 극락조다. 극락조는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극락정토의 설산에 산다는 상상의 새다. 가릉빈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며, 춤을 잘 춘다고 하여 호성조(好聲鳥), 묘음조(妙音鳥), 미음조(美音鳥)라고도 불린다.

비파, 피리, 퉁소, 바라, 장고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마치 주인공 철감선사가 극락정토에 들어온 것을 축하하는 공연을 하는 것 같다. 불교관련 유물에는 코끼리 눈을 형상화한 것이 많다. 석가모니가 세상에 태어날 때 코끼리를 타고 계셨던 것과 관련이 있다.

승탑 아랫부분의 8마리 사자

승탑의 핵심은 주인공의 사리를 모신 몸돌(塔身)이다. 몸돌의 남쪽과 북쪽 면에 문고리가 달린 문비(門扉:문짝)가 새겨져 있고, 앞뒤 문의 좌우에는 험상궂게 생긴 사천왕이, 나머지 두면에는 하늘을 나는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갑옷 입은 험상궂은 사나이들, 그들이 1,300년을 지키고 있는 것은 문비 안에 들어있는 승탑의 주인공 철감선사의 유골인 사리다. 몸돌의 사천왕상은 옷 매듭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보는 이를 감탄하게 만든다.

비천상

지붕돌(屋蓋石)은 최고수준의 조각 솜씨가 발휘되어 있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낙수 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 끝의 막새기와와 처마의 서까래는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있다. 특히 지름 2센티미터에 불과한 손톱만한 크기의 막새기와에는 철감선사 승탑에 새겨진 문양 중 압권인 여덟 장의 연꽃 문양이 정밀하게 새겨져 있다.

사천왕상

일제 강점시기 도굴꾼이 무너뜨려 지붕돌 일부가 파손되고 상륜부(相輪部: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이 있는 불탑의 꼭대기 부분)가 없어진 것은 정말 안타깝다. 그러나 철감선사 승탑은 조각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듬은 석공의 정성이 고스란히 남아 전해져 오는 정말 멋진 승탑이다. 화강암을 다루는 뛰어난 기술과 더불어 석공의 깊은 신앙심까지 느껴지는 당대 승탑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철감선사 승탑이 모든 승탑을 제치고 교과서에 실린 이유다’

막새기와에 새겨져 있는 연꽃문양

철감선사탑비는 현재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비신은 유실됐다. 탑비는 신라 경문왕 8년(868)에 입적한 철감선사의 행장을 기록하기 위해 건립됐다. 탑비가 사라져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썼을 글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철감선사탑비. 비신은 없어졌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도움말/노성태, 천득염

사진제공/위직량, 화순군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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