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56. 무안 몽탄강(夢灘江)과 왕건(王建)

견훤에 쫓기던 왕건, 꿈속 도인 재촉에 강 건너 위기탈출

견훤군사 쫓아오고 있으나 깊은 여울에 막혀 위기

꿈에 백발노인 나타나 여울물 얕아졌다며 탈출 재촉

그 이후 꿈夢 여울灘 써서 몽탄강(夢灘江)이라 불러

나주시청 앞에는 왕건·장화왕후 인연 깃든 완사천

영산강 몽탄수역의 느러지. 몽탄지역을 흐르는 영산강. 몽탄은 왕건이 꿈속에 나타난 도인의 충고를 들어 목숨을 건졌다는 설화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사진 속의 육지는 영산강을 따라 한반도 모습으로 자리한 느러지다.
■후삼국시대 개막

때는 바야흐로 후삼국시대였다.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 궁예는 송악(개성)을, 견훤은 광주를 기반으로 해 나라를 세웠다. 궁예는 901년 국호를 고려(후고구려:후고구려라는 국호는 없으나 나중에 왕건이 세운 고려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후고구려라는 이름을 사용)로 하고 왕위에 올랐다. 궁예가 세운 고려의 세력은 지금의 강원도와 충청도 북부, 경기도에 해당되는 지역에 이르렀다.

견훤은 900년 완산주를 도읍으로 삼고 후백제를 세웠다. 견훤은 지금의 전라도와 충청도 남부, 경상도 서부 일대를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견훤은 신라군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며 백제유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에 신라가 통일한 한반도 남쪽은 다시 견훤이 세운 후백제와 궁예의 고려(후고구려), 신라로 다시 나눠졌다. 이를 후삼국 시대라 한다.

통일신라가 후삼국시대로 바뀐 것은 신라귀족들이 무능과 탐욕 때문이었다. 신라왕족들은 왕위싸움을 하느라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진골 귀족들은 ‘족당(族黨)’을 만들어 서로 왕이 되려고 아귀다툼을 벌였다. 지방호족들은 신라왕실의 통제와 군사력이 약해지자 세금을 내지 않고 자신의 군사를 키우는 자금으로 사용했다. 갈수록 신라왕실의 힘은 약해졌고 지방호족들의 세력은 강성해졌다.

신라왕실의 힘이 급격히 쇠락한 것은 장보고(張保皐, ?~846)의 죽음이었다. 완도를 기반으로 해 강력한 해상왕국을 건설했던 장보고는 가장 세력이 컸던 신라의 호족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신라 왕실에 속해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이었다. 장보고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 지방호족들을 장악했고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신라왕실에 대한 영향력도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장보고의 세력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던 신라 왕실은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했다. 자신들을 통제했던 가장 강력한 세력이 없어지자 지방호족들은 힘을 키워갔다. 이미 신라 왕실은 ‘종이호랑이’신세였다. 이때 궁예는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궁예는 신라 왕족출신으로 알려졌다. 절에서 자라나다 강원도의 큰 도적이었던 양길수하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이 세력을 기반으로 해 힘을 키워갔다.

왕건 역시 통일신라시대 지방호족의 하나였다. 왕건은 877년에 한주 송악군에서 사찬 융(隆)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예성강에서 강화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호족이었다. 수십 척의 배로 상단(商團)을 꾸려 무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궁예의 세력이 더 컸다. 그래서 왕륭은 궁예의 수하로 들어갔다. 왕륭은 송악에 궁궐을 지어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는 왕륭을 금성태수(김화·창도·철원)에, 아들 왕건은 송악태수(발어참성 성주)로 앉혔다.

궁예는 아래쪽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는 견훤이 항상 거슬렸다. 그래서 궁예의 부하가 된 왕건에게 견훤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그 전략적 요충지는 서남해안 일대와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 영산강 일대였다. 903년 왕건은 전선을 이끌고 서해안으로 내려왔다.

■왕건의 나주 진출

왕건이 견훤의 세력권에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지금의 신안군 압해면 고이도다. 고이도에 성(고이도성, 왕산성)을 쌓고 군사기지로 삼은 뒤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망운의 다경진과 임치진을 공략했다. 그런 다음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 동강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나주의 호족인 오다련을 찾아갔다. 오다련은 수십 척의 배를 부리는 무역상단의 우두머리였다. 당시 나주는 오다련의 세력권에 있었다.

왕건과 인연을 맺기 이전에 오다련은 견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오다련은 견훤의 세력이 커지자 집안의 안전을 위해 군량미와 해산물, 군마, 군포 등을 상납했다. 장인인 사간 연위와 금성태수 나총례 등도 견훤에게 복종할 뜻을 내비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왕건이 오다련을 찾아간 것은 강력한 호족인 오다련을 끌어들여야 견훤의 배후지인 나주를 점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다련은 왕건에게 우호적이었다. 오다련은 견훤에게 한 것처럼 왕건에게도 군량미와 각종 물자를 제공했다. 더 나아가 영광 항화도항과 함평 손불의 군유산에 군사 전진기지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영암 신북의 여석산은 질 좋은 숫돌이 나는 곳이었다. 숫돌은 병사들의 전투필수품이었다. 오다련은 이 숫돌까지 상납했다. 오다련은 견훤과 등지고 왕건을 도왔다.

오다련 등 나주 호족의 도움을 받아 왕건은 금성군을 비롯 10여 군현을 점령한 뒤 군사를 나눠 잘 지키게 하고 돌아갔다. 서해안 일대 섬과 나주 등지를 놓고 왕건과 견훤의 싸움은 계속됐다. 909년 벌어진 염해현(지금의 해제면 임수리)전투에서 왕건의 군사가 승리하면서 서해안 바닷길의 요충지인 진도가 왕건의 수중에 떨어졌다. 왕건은 견훤이 중국 오월국에 보낸 선박을 나포하는 등 견훤을 괴롭혔다.

■몽탄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왕건

태조 왕건 표준 영정
903년부터 왕건과 견훤은 영암 덕진포와 몽탄강, 극락천 일대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910년 견훤은 왕건이 지키고 있는 나주 성을 되찾기 위해 기병 3천명을 이끌고 나주를 쳐들어왔다. 왕건이 힘을 다해 싸웠으나 견훤 군사들의 맹공을 버텨낼 수가 없었다. 왕건은 나주 동강의 몽송이라는 곳까지 밀려와 결국은 견훤 군사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도주를 하려해도 앞에는 깊은 강물이었고 사방은 모두 견훤의 군사들이었다.

이때 전투를 치르느라 지친 왕건이 밤중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지금 영산강 물이 빠졌으니 빨리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라. 무안 청용리 두대산으로 향하다 파군천 하류에 군사를 매복하고 있으면 견훤 군사이 쫓아올 것이니 이를 공격하면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한 꿈인지라 왕건이 밖에 나가보니, 꿈속의 도인이 말한 대로 넘실대던 영산강의 물이 줄어있었다. 왕건은 급히 군사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 무안 청용리 두 대산을 향해 철수했다.

그리고 청용리에 도착한 왕건은 병사들을 민가로 보내 밀가루와 겨를 모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두대산에 볏짚을 쌓아 군량미를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 다음 군사를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왕건은 밀가루를 영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천(川)에 풀기 시작했다. 왕건의 군사가 밥을 해먹기 위해 씻은 쌀의 뜨물이 흘러간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밀가루를 강에 풀자 금방 영산강물이 하얗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개성고려박물관에 있는 왕건의 영정
한편 견훤은 날이 밝자말자 왕건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왕건은 말 그대로 독안에 든 쥐였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아침에 왕건의 진영을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강을 건너간 것이다. 견훤은 급히 군사를 이끌고 왕건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가다보니 영산강 상류 쪽에서 쌀뜨물 같은 것이 흘러오고 있었다. 견훤과 견훤군사들은 깜짝 놀랐다. “얼마나 왕건의 군사들이 많으면 저렇게 강을 하얗게 물들일 정도로 쌀을 씻었을까?” 생각하니 위축이 됐다. 왕건의 심리전에 걸리고 만 것이다.

견훤의 군사들이 겁을 먹은 그때, 두대산 양쪽에 숨어있던 왕건의 군사들이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왕건의 매복에 걸리고 만 것이다. 두대산 좌우 양쪽에서 왕건의 군사들이 활을 쏘고 바위를 굴려대는 바람에 전투의 기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이 전투에서 견훤은 참패당하고 말았다. 왕건은 꿈속에 나타난 도인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전투에서 승리하게 됐다. 그래서 그 이후로 현재의 몽탄교가 있는 영산강 유역을 꿈 夢 여울 灘을 써서 몽탄강(夢灘江)이라 했다 전해진다. 쌀뜨물처럼 보인 밀가루를 흘려보낸 하천은 ‘견훤의 군사들을 속여 깨뜨렸다’는 의미로 파군천(破軍川)이라 했다. 또 군량을 쌓은 것처럼 보이게 한 산은 두타산(혹은 두대산)이라 부르게 됐다. 왕건군이 배수진을 쳤던 현재의 나주시 동강면 옥정리 몽송부락 일대는 하몽탄, 영산강을 건너 무안지역으로 건너간 곳은 상몽탄이라 칭한다.

왕건이 건넜던 여울길에 세워진 몽탄대교와 영산강.


■ 광주에서 벌어진 왕건과 견훤의 전투

나주공략에 성공한 왕건은 차츰차츰 군사를 내륙으로 진격시켰다. 그래서 영산강과 서창들녁, 광주천 하류의 너른 들에서는 왕건과 견훤 군사들이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왕건은 지금의 서창 들녘 쪽 산(사월산 혹은 백마산)에 진을 치고, 견훤은 운암동 일대 산(대마산)에 군사를 배치했다. 왕건이 진을 친 곳을 왕조대(王祖臺), 견훤의 군사들이 진을 쳤던 곳을 견훤대(甄萱臺)라 부른다. 왕건과 견훤 부대 간의 전투는 사월산(獅月山)과 대마산의 중간 지점인 지금의 치평동(상무대)일대에서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왕조대(王祖臺)

왕조대로 추정되는 장소중의 한 곳인 사월산. 사월산은 앞발을 세우고 머리를 치켜든 사자의 모습을 닮았다. 광주~송정을 연결하는 도로변에 있다. 견훤대를 마주 보고 있다.
왕건은 나주를 지키기 위해서는 광주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견훤과 한바탕 전투를 치러야 했다. 왕건은 영산강 상류 쪽 산에 군진(軍陣)을 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왕건이 군사들과 함께 머문 그곳을 ‘왕조대’(王祖臺)라 불렀다. 왕조대는 ‘왕이 머물었던 장소’ 혹은 ‘왕이 진을 친 곳’이라는 뜻이다. 왕은 물론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다.

왕조대의 본디 이름은 왕건대(王建臺)였으나 나중에 왕조대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왕조대의 지명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왕조대는 견훤대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할 때 주둔했던 곳이다. 그런데 사려 깊지 못한 백성들이 고려 태조의 성과 이름을 장소이름으로 사용해버렸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다른 이름, 즉 왕조대로 바꿔 부르고 있다’

그런데 왕조대의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다. 왕조대라 추정되는 곳은 여러 곳이다. <여지도서>에는 ‘왕조대가 광주관아에서 서쪽으로 30리 지점에 있고 견훤대와 마주보고 있다’(王祖臺 與甄萱臺 相對)기록돼 있다. 김정호가 조선후기에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왕조대가 서창마을 북쪽에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대동여지도>에 왕조대라는 지명이 쓰인 곳은 광주 서창의 북쪽 언저리다. 그 지점은 조선 초 고내상(전라병영)이 있던 곳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광주와 송정리 간을 연결하는 광송도로 극락교 주변이다. 극락교 주변의 높은 산은 사월산이다. 사월산은 101.5m 높이의 산으로 견훤대와 마주하고 있다. 견훤이 군진을 치고 군마를 길렀다는 방목평(放牧坪)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해 군 지휘소로 사용될 수 있는 여건을 지녔다.

대동여지도(18첩 5면)에 나타나있는 왕조대.
그러나 사월산은 광주관아에서 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이고 거리도 21리에 불과해 지도·문헌상의 기록과 부합되지 않는다. 때문에 ‘광주관아 서쪽 30리에 있는 산’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에서 서창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백마산(白馬山)을 왕조대 자리로 지목하기도 한다.

백마산은 해발고도가 162.1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다. 그렇지만 백마산 일대는 영산강을 중심으로 해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군사를 지휘하기에 그런대로 적합한 곳이다. 백마산은 금당산~화방산~송학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절골(寺洞)에서 멈춰 북쪽으로 솟아오르면서 생긴 산이다. 서쪽으로 극락강이 흐르고 있어 주변은 평지다. 그래서 송정리는 물론이고 즐비하게 늘어선 건물사이로 첨단지구 쪽까지 보인다.

왕조대의 위치와 관련해 일부 연구자들은 남구 대촌동 일대에 있는 여러 산봉우리 중 하나를 지목하고 있다. 또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의 봉호마을 뒷산도 왕조대로 추정되는 장소다. 이 마을 사람들은 마을 뒷산이 왕건이 머물렀던 산이라 믿고 지난 80년대까지 왕건을 위한 제사를 지내왔다.

○견훤대(甄萱臺)

견훤대로 추정되는 북구 운암동의 대마산. 대마산 앞은 견훤이 군마를 키웠던 방목평이 있었다. 지금은 주택단지로 변해가고 있다.
왕건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견훤 역시 군사를 동원해 방어진을 쳤다. 전해오는 말로는 견훤이 진을 친 곳은 지금의 광주 북구 동림동 대마산이다. 광주시 북구 생룡동 뒷산에 있는 토성 터를 견훤대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삼국유사’에 견훤의 출생지가 광주 북촌으로 적혀 있는 점, 담양군 대전면에 무진주의 치소(治所)가 있었다는 설(說), 광주 북구와 담양 일대 동네 이름에 들어있는 龍(용)은 견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생룡(生龍)동 뒷산이 견훤대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렇지만 여러 문헌들이 ‘견훤대는 북쪽 15리’에 있다고 기록한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북쪽 40리에 위치한 생룡동을 견훤대라 여기기에는 무리가 크다.

대동여지도에 한글주석을 단 지도. 우측 중앙에 광주가 적혀있고 그 위에 견훤대 지명이 보인다.
동림동에 있는 대마산은 해발 93.9m 높이의 산이다. 대마산은 왕건의 군사들이 대형을 이룬 서창의 산과 마주보고 있어 적들의 동향을 살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대마산 아래 견훤이 말을 키웠다는 방목평은 매우 넓은 곳이어서 군사를 모아두었다가 움직이기에도 좋았다.

‘대동여지도’에는 견훤대가 황계면(현재의 북구 운암동) 남쪽에 있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횡계면은 광주 북문으로부터 20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기록에 가장 근접해 있는 산을 대마산으로 여겨도 무방한 듯싶다.

담양에서 북구 생룡동으로 이어지는 능선.
■ 왕건과 견훤의 역사를 품고 있는 전남과 광주

왕조대 자리가 서구 사월산이든, 아니면 백마산이든 사실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견훤대 자리가 지금의 대마산인지, 생룡동 뒷산 또는 대전면 일대의 야산인지도 큰 의미가 없다.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자면 왕건과 견훤이 왕조대와 견훤대에 군사를 모아놓고 싸웠다는 것 자체가 구전에 불과하다. 지금의 광주·전남지역에서 왕건과 견훤사이에 많은 싸움이 있었겠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별로 없는 상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작성된 각종 지도와 문헌에는 왕건과 견훤을 뜻하는 왕조대와 견훤대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또 두 사람이 자웅을 겨뤘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해보면 당신의 무진주(광주)에서는 큰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 분명한 듯싶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발자취와 왕건에 맞서 천하를 호령했던 견훤의 자취는 무안 몽탄강과 광주 왕조대, 대마산 신안 일대의 섬, 무안에 남아 있다. 광주?전남의 중요한 역사 자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왕조대와 견훤대의 정확한 위치를 따지는 것보다는 왕건과 견훤의 대립과정에서 어떤 이유로 왕건이 승자가 되고 견훤이 패자가 됐는지를 따져보는 역사적 고찰이 더 중요한 듯싶다. 무안 몽탄강과 파군천, 두 대산, 왕조대, 견훤대는 왕건과 견훤이라는 두 영웅의 흥미로운 대립과정을 되새겨보고 거기서 승자의 교훈을 음미해보는 역사적 장소로서 큰 의미가 있다.

■태조 왕건과 나주 오씨 처녀의 사연이 깃든 완사천

완사천공원. 완사천은 왕건과 장화왕후의 러브스토리가 담겨있는 곳이다. 공원으로 조성된 완사천에는 왕건과 장화왕후의 만남을 형상화한 현대적 조각작품이 설치돼 있다.
910년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은 왕건의 부인(장화왕후)이 됐다. 왕건과 오다련의 딸, 나주 오씨 처녀와의 첫 만남 이야기가 담겨 있는 곳이 완사천이다. 어느 날 목이 마른 왕건이 샘을 찾아갔다. 샘에는 어떤 처녀가 물을 긷고 있었다. 왕건은 급한 목소리로 물을 달라 청했다. 왕건을 한번 바라본 처녀는 물바가지를 바로 건네지 않고 곁에 있는 버들나무로 가서 버들잎을 따 물바가지에 띄어놓는 것이었다.

왕건은 목이 마르지만 버들잎이 목에 넘어가지 않도록 버들잎을 불어가면 물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갈증이 가시자 왕건이 물었다.

“어이하여, 버들잎을 물에 띄운 게요?”

처녀가 대답했다.

“물을 급히 마시면 체한답니다. 물에 체하면 약도 없지요. 장군이 급하게 물을 드시다 혹여 몸이 상할까봐 그랬답니다”

왕건은 이 처녀의 지혜로움에 감탄했다. 그리고 아내로 삼았다. 그 샘이 바로 나주시청 입구에 있는 완사천(浣紗川)이다. 나주시는 완사천에 오씨 처녀와 왕건의 동상을 세우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샘물이 말라버렸으나 수맥을 개발해 완사천에는 다시 물이 가득 고이고 있다.

완사천의 인연으로 오다련의 딸은 왕건의 아내가 됐다. 이런 사연이 없었더라도 왕건은 오다련의 딸을 아내로 삼을 법했다. 지지기반이 약했던 왕건은 정략결혼을 통해 지방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완사천 러브스토리는 어쩌면 이런 정략결혼을 정당화하고 미화시키기 위해서 후세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나주 오씨 처녀, 장화왕후는 2년 뒤인 912년 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무’라 했다. 무는 고려 2대 왕인 혜종이 됐다. 913년 왕건은 태봉국 최고 벼슬인 시중에 올랐다. 당시 궁예는 포악하고 교만한 성격으로 변해있었다. 백성들을 괴롭히고 충신들을 함부로 죽였다. 민심이 동요하자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냈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철원 포정전에서 왕으로 즉위했다.

왕건은 왕이 됐지만 고려의 군사력은 견훤의 후백제에 비해 열세였다. 그러나 왕건이 신라호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왕건이 동해안을 침략하는 북방민족을 쫓아주는 등 신라백성들을 돕자 신라의 민심이 자연스럽게 왕건에게 넘어간 것이다. 결국 왕건이 세운 신라 경순왕은 935년 고려에 투항하고 만다. 견훤에 이어 신검도 936년 왕건에게 항복했다.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한 것이다.

■견훤(甄萱)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왕건은 고려를 세웠다. 후삼국 시대에 왕건을 가장 괴롭혔던 인물은 견훤이었다. 그러니 견훤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 없었다. 고려 시대에 정리된 사서 대부분에 견훤의 성정이 포악하게 그려진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견훤은 백제를 멸망시켰던 신라를 멸하고, 왕건의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했던 용장이었다.

견훤의 아버지는 아자개(阿慈介)로 상주 가은현(加恩縣:지금의 문경)사람이다. 농사꾼이었으나 후에 상주를 다스리는 장군이 됐다. 견훤의 본래 성(姓)은 이(李)씨인데 15세 때 스스로 견(甄)씨로 고쳤다. 그런데 이 견씨의 음독(音讀)과 관련해 일부 역사가들은 견훤을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역사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甄의 음은 진(眞)‘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따라 일부 학자들은 견훤이라 하지 않고 진훤이라고도 한다.

견훤의 묘로 알려진 전견훤묘(傳甄萱墓). 견훤왕릉이라고도 한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鍊武邑) 금곡리에 있다. 큰 봉분 앞에 1970년 문중에서 세운 비석 ‘後百濟王甄萱陵’이 있다. 견훤의 묘라 하지만 확실한 고증이 없어 전할 전(傳)을 붙여 전견훤묘라 한다.
<삼국유사>에는 견훤의 출생지가 광주로 나온다. <삼국유사>에는 견훤의 출생과 관련된 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 북촌에 살았는데 딸이 한 명 있어 외모가 단정했다. 그런데 밤이면 자주색 의복을 입은 남자가 방으로 찾아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아버지가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찔러두라고 했다. 딸은 그리했다. 날이 밝아 실을 찾아보니 바늘이 북쪽 담 아래의 큰 지렁이 허리에 찔려 있었다. 그 후 임신이 되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나이 15세에 자칭 견훤(甄萱)이라 했다’

견훤은 서남해(西南海) 지방 방위에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됐다.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무리를 모아 892년(진성여왕 6)여러 성을 공략했다. 곧 무진주(武珍州:광주)를 점령해 기반으로 삼았다. 이후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完山州:全州)에 입성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이때 그의 상대는 궁예였다.

<삼국사기>에는 견훤이 상주 출신으로 기록돼 있다. 이에 반해 <삼국유사>는 견훤이 광주출신임을 드러내고 있다. 학계에서는 견훤의 출신지를 상주로 보고 있으나 노성태 선생은 진훤(견훤)이 광주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성태 선생은 견훤이 광주출신일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광주에서 군사를 일으킨 견훤은 거병한지 한 달 만에 5천명을 모은다. 궁예가 3천500명을 모으는데 10년이 걸린 것에 비교하면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다. 광주출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견훤정권에 참여한 상주출신은 거의 없는 반면 지훤을 비롯한 박영규, 김총, 능창 등 견훤 주변인물들이 모두 광주와 광주 주변 출신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이외에도 ‘아자개가 견훤의 친부이라면 918년 어떻게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투항)할 수 있겠는가?’, ‘견훤의 생부인 아자개가 왕권에게 투항한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관련 기록이 전혀 없다’,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하기 10여 년 전인 906년 견훤이 후백제의 왕이 돼 금의환향하지만 사서에는 견훤에 대한 상주민들의 반응이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등을 제시하고 있다.

견훤은 중국 오월국, 일본과 국교를 맺고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와 경쟁적으로 세력 확장을 벌였다. 927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金城:경주)을 함락하고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하기도 했다. 견훤의 군사는 무척 강해 몇 차례나 왕건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나주공략에 나선 왕건은 견훤의 군사에게 둘러 싸여 몽탄강에서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

927년 경애왕을 자결시키고 돌아가던 견훤을 왕건이 대구 공산에서 기습공격을 했으나 이때도 견훤은 대승을 거뒀다. 왕건이 거느리던 정예기병 5천여 명은 모두 몰살당했고 왕건 역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곡성출신 신숭겸(申崇謙)이 왕건의 갑옷을 대신 입고 후백제군을 유인해 목숨을 잃었고 왕건은 목숨을 건졌다.

견훤의 세력은 929년 고창(古昌: 안동)전투에서 왕건에게 패한 뒤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견훤이 세운 후백제가 결정적으로 약화된 것은 왕위계승 문제로 견훤과 아들들 간에 갈등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견훤은 4남인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세 형 신검(神劒), 용검(龍劒), 양검(良劒)이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후백제왕견훤능비. 견훤의 묘로 알려진 전견훤묘(傳甄萱墓)는 충남 논산시 연무읍(鍊武邑) 금곡리에 있다. 큰 봉분 앞에 1970년 문중에서 세운 비석 ‘後百濟王甄萱陵’이 있다. 견훤의 묘라 하지만 확실한 고증이 없어 전할 전(傳)을 붙여 전견훤묘라 한다.

도움말/김정호, 박선홍, 노성태, 조광철, 백창석


사진제공/위직량, 나주시, 무안문화원, 한국관광공사, 조재현, 행복을 찾는 사람들, 카프리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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