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69>제10장 의주로 가는 야망

이항복은 정충신이 행랑채에 처소를 정하자 곧바로 사랑으로 그를 불러들였다. 예정된 일정보다 열흘이나 늦게 와서 이항복은 화가 나있었다. 파발마를 통해 벌써 그가 출발한 것을 알고 있는데 이제야 오다니, 어디 질퍽한 데 나자빠져 있다가 온 것이 아닐까. 역시 한창 놀기 좋아하는 나이인 떠꺼머리 총각이긴 하다.

“여러날이 지체되었어. 왜 이리 늦었는가.”

“오다 봉개 여러 사건을 만났구마요.”

“여러 사건을 만났다는 것은 두루 구경하고 왔다는 뜻인데, 네가 지금 이것저것 구경하고 다닐만큼 한가한 사람인가.”

“구경한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살피고 왔당개요.”

“그러면 민심을 살피고 왔다는 것이냐? 네가 그런 신분이 되는가.”

“원통하고 억울한 일들이 많았사옵니다. 어떤 세도가가 다정하게 사는 멀쩡한 부부를 탐심 먹고 갈라놓는가 하면, 기생을 생선 토막내듯 해버린 경우도 보았나이다. 지방 수령들이 토색에 탐악질이 많다는 원성도 높았나이다.”

그러나 왕자가 직접 거기에 연루됐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어디서 그렇더라는 말이냐.”

“이천오백리 길 올라오는 내내 그랬사옵니다. 백성들이 관아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사옵니다.”

이항복은 구중궁궐 안에 있고, 드나드는 자들이 한결같이 아첨배들인데다 제한된 자들이니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있었다.

“이천오백 리를 오는 내내 그랬다 이 말이렸다?”

“그렇사옵니다. 왜란이 났어도 대항은커녕 잘 왔다는 듯이 왜군 편에 서는 자가 있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옵니다. 일부 지방에서는 난민들이 소동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대저 지방 수령들이 침학(侵虐)한 까닭이옵니다. 병영의 환포(還逋)와 도결(都結: 조선시대 三政의 문란 가운데 田政 폐해의 하나)의 횡포로 민심이 들끓고, 노여움이 폭발해서 또다른 변란이 획책되는 징후를 보이고 있었나이다.”

정충신은 가능한 한 어려운 말을 동원해 어른스럽게 말했다.

“병영의 군량을 사사로이 써버렸다 이 말이지?“

이항복이 침통한 얼굴로 정충신의 말을 되새겼다. 정충신이 보탰다.

“난민들의 패려한 습성은 통분스럽습니다만, 이유를 따져보면 다 사연이 있었사옵니다. 변란을 격발시킨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하오나, 민심을 요동케한 직분을 더럽힌 자들 먼저 죄상을 심리하여 형벌을 정하는 감단 조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 순서인 줄로 아뢰옵니다.”

“네가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렸다?”

“거짓이라면 목을 내놓겠사옵니다. 날쌔고 용맹스러운 자들이 도당을 만들어 민가를 덮쳐 도둑질을 일삼고 있습니다. 세력이 커지자 양주골, 구월산 이런 데를 소굴로 삼아 노략질하고 있사옵니다. 선전관들이 잡으러 가면 백성들이 먼저 정보를 주어서 그들을 도망가게 합니다. 후환이 두려워서도 그렇겠지만, 그자들이 관보다 민심을 더 얻었기 때문이옵니다.”

이항복이 그제서야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정충신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오호, 너는 여지껏 내가 보고 듣지 못한 말을 해주는구나. 너는 어떤 안핵사·관찰사·어사·선전관보다 낫다. 그런 것을 탐문하고 왔으니 늦을 만했구나. 그 문제들은 내 적절히 조치를 취할 것이다. 광주 사또 어르신은 어떠하시더냐.”

“비상시국이니만큼 정무보다는 적의 섬멸작전 계획에 골몰해 계십니다.”

“장인 어른의 서찰에 의하매, 너는 문무 겸장의 길을 가야 한다고 쓰셨다. 감당하겠느냐?”

“그중 나라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옵니다.”

“무인의 길을 가겠다? 통군정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과 합동훈련에 참가하거라. 사서오경은 물론 병서도 빠짐없이 읽거라. 너는 관상에 군인의 팔자가 네 개나 들어있다. 허나 팔자만 믿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니 철두철미 배움을 쌓기 바란다. 병법은 이론이 아니라 실전이니, 실전병법을 개발해야 하느니라. 며칠 휴식을 취한 뒤 군사훈련에 합류하거라.”

정충신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누우니 몸이 천근 무게였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누가 내 글방에 와있나?”

머리맡에서 누군가 버럭 소리치고 있었다. 이항복의 사위 윤인옥이었다. 정충신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이항복 대감이 쓰라고 내주신 방인디요?”

“씨발놈아, 장인 말이면 다냐?”

윤인옥은 명문가의 아들로서 일찍이 소년 등과해 한림 교리가 된 자였다. 그 때문인지 버릇없고 건방졌다. 지난번 장계를 가지고 올라와 유숙할 때도 낭패를 주더니 또 골탕을 먹일 요량이다. 정충신은 이 자를 코를 납작하게 해줄 것이 무엇인가를 궁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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