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判), 변(辯), 변(辨)은 고쳐야 할 글자?
형광석<목포과학대 교수>

형광석 목포과학대 교수

가끔 체험을 쫓아가는 추체험(追體驗)명상과 글자를 깨보는 파자명상(破字瞑想)을 한다. 결가부좌를 틀고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하다가 집중하지 못하고 잠드는 경우가 많아서 필자가 찾아낸 명상법이다. 주로 우리말이나 한자를 기본글자로 분해하고 그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찾고 결합하는 사유실험(thought experiments)을 한다. 최근 파자명상의 소재는 판(判), 변(辯), 변(辨)이다.

판가름할 판(判)은 반(半)과 도(刀)로 분해된다. 반은 뚫은 곤 획이 좌우의 중간을 지나는 형상이다. 그래선지 半의 뜻과 음은 ‘반 반’이다. 어떤 사물을 좌우로 이등분하는 작업에는 칼이 동원된다. 그 칼은 무딘 칼이 아니라 ‘선 칼’이다. 똑바로 선 칼로도, 날이 날카롭게 선 칼로도 풀이된다. 한편 가운데 중(中)도 뚫은 곤이 몸통을 형상한 사각형을 이등분한다. 중은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처지이다. 요컨대, ‘판가름한다’는 똑바로 날이 선 칼로 사물의 중(中)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누구나 일상생활은 판가름 행위의 집합이다. 판가름을 전문으로 하는 국가공무원은 누구인가?

우리나라 대법원에 똬리를 튼 ‘정의의 여신상’은 왼손에는 법전, 오른손에는 공정한 심판을 상징하는 저울을 들고 두 눈은 세상을 응시하는 형태라고 한다. 오른손에 든 천칭의 모습은 반 반(半)을 연상시킨다. 왜, 그 여신상에 선 칼을 두지 않았을까? 오늘의 현실을 미리 통찰한 작가의 선견지명이었을까?

우리사회에서 판관이나 심판의 역할을 하는 직업군에 대한 사회적 평판은 어떠한가? 아마도 먼 훗날 2000년대 초반의 한국 역사를 평가하는 글자로 반 반(半)과 썩을 부(腐)를 결합한 형성(形聲)자 ‘半腐’를 만들고, 그 글자를 ‘썩을 판’으로 읽을지 모르겠다. 풀이하자면, 반이 썩었다는 뜻이다.

말 잘할 변(辯)이 들어가는 직업의 명칭은 무엇인가? 변은 말씀 언(言)을 가운데에 두고 매울 신(辛)이 양쪽에 자리한 글자이다. ‘말 잘한다’는 장광설, 횡설수설((橫說竪說)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말을 맵고 또 맵게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청양고추를 먹으면, 기가 팍팍 돌 정도로 혀가 얼얼하고 바짝 정신이 든다. 청양고추 맛의 말, 말 잘하는 사람의 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올바른 기품과 정신을 되살려야 그게 제격이다. 좌우를 아우르는 횡설(橫說)과 천지상하(天地上下)를 연결하는 수설(垂說)을 잘 배합하여 논리를 맵게 세우는 사람이라야 말 잘한다는 평을 듣겠지 싶다. 글자 변이 들어간 일부 직업군의 일탈에 관한 빈번한 보도를 접하면서, 그 변의 글자를 구성하는 매울 신 대신에 썩을 부를 붙인 글자 ‘腐言腐’를 만들고 ‘썩은 말 잘할 변’으로 읽어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입시 제도의 신뢰 여부를 평가하는 여러 말 중 자주 접하는 말은 분별할 변(辨)이 들어가는 변별력(辨別力)이다. 원론에 입각하면, 대학입학 전형에서 학교생활기록부를 중시함은 마땅하다. 그 마땅함의 전제는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가리는 제대로 된 변별이다. 지난달 28일 자 보도를 보니, 교육부가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년간 학생 1명에게 20개 이상의 상장을 준 고등학교는 모두 627곳에 달했고, 충남의 어떤 고등학교에서는 학생 1명이 무려 88개의 상장을 받았고,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 학생도 79개를 수상했다.

이른바 ‘상 몰아주기’이다. 이쯤 되면, ‘학교생활기록부’는 ‘학부모 위세 기록부’로 그 이름을 바꿔야 한다. 적지 않은 학교의 분별없는 행위는 분별할 변의 글자 양쪽에 똬리를 튼 매울 신을 썩을 부로 치환하여 ‘腐刀腐‘라 쓰고 ’썩을 변‘으로 읽어야 한다는 아우성이 들리겠지 싶다. 그런 식으로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 어려서부터 무분별을 분별로 내면화한 채 상당한 시간이 떠나간 후 지배세력의 일원으로서 행세할 가능성이 적잖다는 우려가 든다. 판(判), 변(辯), 변(辨)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 조선 후기 정약용이 절규한 애절양(哀絶陽)의 시대적 유효성을 부인할 자 누구이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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