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60. 해남 녹우당과 고산 윤선도

고산의 노래인 듯 바람에 쓸리는 비자나무 잎 소리…
<綠雨>

녹우당, 해남 덕음산 자락 연동마을 해남 윤씨 종갓집

조부 어초은 윤효정이 큰 인물 나기 바라며 자리 잡아

조선 최고 명필 이서와 이광사 서체 동시에 즐기는 기쁨

윤선도, 당쟁에 지친 마음을 아름다운 서정시로 풀어내

양반화가 증손자 공재 윤두서는 불후명작 ‘자화상’ 남겨
 

고산 윤선도 유적지 전경. 녹우당 뒤쪽으로 보이는 산이 덕음산이다. 비자나무 숲이 조성돼 있는데 바람부는 날이면 비자나무의 푸르름이 마치 비오는 것처럼 떨쳐진다해서 녹우당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녹우당(綠雨堂)과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하늘에서는 비(雨)와 눈(雪)만 내리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꽃도 잎도 내린다. 꽃비는 그래서 생긴 이름이다. 녹우(綠雨) 역시 그렇다. 비처럼 쏟아지는 잎들. 잎이 비 되어 쏟아지는 곳. 생각만 해도 아름답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처연하다. 녹우의 장면은 고통을 동반한다. 스러지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세찬 바람에 가지로부터 떼임을 당한 푸르른 것들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른다. 성하(盛夏)에 푸름을 뽐내야 할 것들이 모진 운명에 제 삶을 내려놓는 곳이 녹우의 현장이다.

녹우당(綠雨堂). 아름답지만 처연한 곳. 녹우당은 그런 곳이다. 녹우를 바라보고프면 해남 연동마을을 찾을 일이다. 연동마을은 자동차를 타고 해남읍에서 삼산면사무소로 이어지는 806번 도로를 10여분 정도 가면 자리하고 있다. 도로변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라는 안내간판이 많아 쉽게 찾을 수 있다. 녹우당은 해발 381m의 덕음산(德陰山)을 병풍으로 삼아 서 있다. 녹우당은 윤선도 고택 중의 하나다.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이다.

녹우당이라는 이름은 덕음산에 울울창창(鬱鬱蒼蒼) 자리 잡은 비자나무숲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비자나무 잎들이 바람에 쓸리면 마치 비처럼 떨어진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어떤 이는 녹우당 앞쪽에 자리 잡고 있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를 녹우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이면 우수수 잎들을 떨어뜨려 그리된 이름이라고 말한다. 집 뒤편 가까운 곳,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소리를 녹우라 표현했다고 하는 이도 있다.

이러면 어쩌고 저러면 어찌하리~, 관계없는 일이다. 이파리들의 사정이야 딱하지만 비와 바람에 쓸려 푸른 잎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장면을 볼 수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눈과 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다. 마음이 씻기고 머리가 맑아질 것이다. 작가는 그런 호강을 누리지 못했다. 녹우당을 찾은 날이 겨울의 끝자락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람이 제법 불었지만 이파리들을 소스라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낸 나무들이 안도의 한숨처럼 토해 놓은 그 연한 것들이, 바람에 부르르 떠는 것을 마냥 좋다고 바라본다는 것도 실은 미안한 일이었다. 덕음산은 제법 숲이 깊은 산이다. 덕음산에는 비자나무를 비롯한 여러 활엽수들이 자리를 잘 잡고 있다. 중턱에는 500여년이 된 비자나무 400여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이 비자나무숲은 지난 1972년 천연기념물 241호로 지정됐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설명하는 해남군 박미례 문화관광해설사

덕음산 비자나무는 해남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심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초은 선생은 “뒷산의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며 덕음산에 많은 나무를 심도록 당부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둔 유훈이라고 여겨진다.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긴 세월을 두고 무엇이든 준비해야 한다는 것, 어떤 일이든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복합적으로 강조한 것이라 생각된다.

우측이 비자나무숲길 가는길이다. 좌측은 추원당과 산책 숲길로 향한다.

어초은 선생의 유훈은 잘 지켜졌다고 생각된다. 나무가 많아져 덕음산은 깊어지고 그 음덕(陰德)은 후손들에게 잘 전달됐다. 해남 윤씨들은 글과 그림, 사상으로 이 나라의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그래서 덕음산 녹우당은 비단 ‘초록비’를 보는 곳만은 아니다. 마음을 열면 질곡에 찬 조선의 역사를 볼 수 있으며 뜻을 끝까지 펼치지 못한 경세가(經世家)들의 회한까지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500년 전 이곳에 터를 잡은 해남 윤씨들의 삶은 곧 조선 사대부의 삶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귤정 윤구와 고산 유선도, 공재 윤두서의 숨결을 마주한다. 어쩌면 녹우당에서 대하는 바람 소리는 조선의 모진 현실에 고뇌하던 그분들의 신음인지도 모른다.

■녹우당의 역사

녹우당은 덕음산 자락 연동마을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해남 윤씨 종갓집을 총칭한다. 녹우당은 전남지역에 남아있는 고택(古宅)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이다.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로 이뤄졌다. 한편으로는 사랑채 이름이기도 하다. 효종 임금이 사부였던 고산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지어준 집의 일부를 뜯어 1668년에 배로 옮겨온 것이 녹우당이다.

녹우당이란 당호가 해남 윤씨가의 사랑채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당호가 있는 대부분의 고가는 사랑채 당호를 고가전체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종갓집 녹우당은 1968년 12월 9일 사적 제167호로 지정됐다. 면적은 1만4천268㎡이다. 녹우당은 원래 1만 평 부지에 99칸으로 건축됐지만 현재 55칸만 남아 있다. 종갓집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대표적인 건물인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연동마을에 윤씨들이 들어온 것은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 1476~1543)대부터이다. 윤효정은 해남의 최부 선생에게 글을 배우기 위해 강진과 해남을 오가다 해남의 대부호인 정귀영의 마음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됐다. 터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야 큰 인물이 나온다는 생각에 명당자리를 찾아다니다가 백련동(연동마을)을 찾아냈다. 전남 강진 일대에서 살던 윤씨들은 연동으로 들어와 마을을 꾸몄다.

윤효정 선생은 덕음산 바로 아래에 터를 잡았다. 따라 들어오거나 분가한 일가붙이들은 그 앞쪽으로 집을 지었다. 차츰 마을이 커졌다. 마을 앞에는 연못과 소나무 숲이 조성돼 있다. 연못은 고산 윤선도가 직접 만든 것이라 전해진다. 윤선도는 마을 앞 들판이 너무 넓어 전체적으로 마을이 허해질 우려가 있기에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못은 물을 채우기 전 파낸 흙을 쌓아 산처럼 만든 5개의 가산(假山)과 3개의 섬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연못의 모양이 마음 ‘心’자가 된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 은행나무

연못을 지나 녹우당 쪽으로 향하면 500여 년의 세월을 버텨낸 큰 키의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어초은 윤효정 선생이 아들의 과거 급제를 기념해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은행나무는 덕음산 중턱의 비자나무와 함께 녹우를 만들어내는 나무다. 가을에는 녹우가 아닌 황우(黃雨)를 뿌린다. 노란 은행잎이 하늘하늘 내려와 녹우당으로 가는 길목을 채운다. 이래저래 계절 따라 아름다운 곳이다.

추원당

녹우당은 400여 년 동안 여러 차례의 증개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녹우당은 윤효정과 윤선도가 기거할 때는 살림집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가 한양에 머물 때는 재실형태로 운용됐다, 이후 1752년 윤두서가 낙향한 뒤에는 본격적인 살림집으로 사용됐다. 1815년에 어초은 사당과 고산 사당이 다시 지어졌으며 1938년에 녹우당 뒤에 있는 재각(齋閣) 추원당(追遠堂)이 새로 만들어졌다.

녹우당은 드물게 남아있는 조선 사대부의 가옥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중하다. 그렇지만 건축학적으로는 전통적인 사대부 가옥과는 구조와 배치 면에서 다른 점이 많다. 녹우당은 전라도 지역에서는 매우 드문 ㅁ자형 집이다. 그리고 비례가 특이하다. 전통적인 가옥은 마당이 정방향인데 반해 녹우당은 안마당이 앞뒤로 길쭉하다. 안채와 사랑채의 구성이 서로 다르다. 개수과정에서 건물의 권위를 살리기보다는 실용적으로 손을 본 점도 특이하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 사랑채 녹우당

녹우당의 집채는 서향이고 대문은 남향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앞뒤로 자리하고 있으며 안채 뒤쪽 대밭에는 선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외원(外垣) 바깥에 윤선도를 모신 고산사당(孤山祠堂)과 증조인 윤효정(尹孝貞)을 모신 어초은(漁樵隱) 사당이 위치해 있다. 북동쪽으로 어초은의 제실(祭室)인 추원당(追遠堂)이 있다. 북쪽에 녹우당(綠雨堂)이 있다.

녹우당 편액은 공재의 친구인 옥동 이서가 쓴 것이다. 이서는 성호 이익의 이복형이기도 하다. 이서는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창안한 당대의 명필이었다. 서결(書訣)이라는 서예 지침서를 짓기도 했다. 녹우당 현판 옆에는 ‘芸業’(운업)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원교 이광사가 쓴 글이다. 안내문에는 ‘운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 있다.

‘운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고 업은 일이나 직업, 학문, 기예,의 뜻을 지니고 있어 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녹우당 선대 당주들의 이상과 뜻을 담고 있다’

그 곁에는 ‘靜觀’(정관)이라 쓰인 현판 하나가 더 걸려있다. ‘고요한 가운데 바라보라’는 뜻이다. 그게 어디 녹우만 바라보라는 말이겠는가? 헛된 것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일갈(一喝)임이 분명하다 ‘靜觀’ 글씨 역시 원교 이광사가 썼다. ‘운업’이라 쓴 서체와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동국진체의 ‘운업’에는 한 획마다 범접할 수 없는 기개가 넘쳐난다. 이에 반해 정관의 글씨체는 유려하다.

고산 윤선도 유적지 녹우당 현판들

이광사는 동국진체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조선의 명필이다. 추사 김정희는 평탄했던 삶을 살았던 시절에는 이광사의 서체를 폄훼했다. 하지만 인생의 곡절을 겪은 뒤로는 이광사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런 일화가 담겨 있는 장소가 연동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해남대흥사다. 대흥사 대웅보전 옆 승방인 백설당(白雪堂)에서는 추사와 원교의 글씨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녹우당에서 조선 최고의 명필 이서와 이광사의 글씨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여간해서는 맛볼 수 없는 행운이다. 힘차고 유려한 원교의 글씨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눈이 또 호강을 하는 것이다. 어디 눈뿐이랴? 눈으로는 허공을 가르는 일필휘지의 현란함을 보면서, 귀로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푸른 잎들의 춤추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이런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고산 윤선도 사랑채 녹우당 현판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우리에게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조선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각인돼 있다. 윤선도가 지은 시조 어부사시사를 외우며 국어와 고문(古文)시험공부를 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윤선도는 시인이라기보다는 정치인이었다. 그가 남긴 시들은 정치적 부침과정에서 그가 느낀 여러 가지 감정들을 표현한 것이다. 고산은 84살이라는 천수를 누렸지만 그의 정치적 역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산이 당쟁에 휩쓸린 것은 그의 운명이었다. 왜냐하면 조부 어초은 윤효정이 눌재 박상의 제자가 되면서 사림파의 일원이 돼 훈구파에 맞섰기 때문이다. 당시 조정은 기득권세력인 훈구공신파와 사림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림파는 훈구파의 음모와 정치공세에 밀려 자주 화(禍)를 당했다.

윤효정은 구(衢), 행(行), 복(復) 등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인 귤정(橘亭) 윤구(尹衢)는 최산두, 유성춘과 함께 호남3걸로 꼽히는 인물이다. 윤구는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으나 기묘사화 때 삭직됐다. 동생 윤행과 윤복도 문과에 급제해 높은 관직에 올랐다. 윤구의 아들 홍중ㆍ의중 형제 역시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윤의중은 문무 당하관의 인사권을 행사하는 이조정랑, 정치의 잘잘못을 따지는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이때부터 해남윤씨 가문이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윤선도는 윤의중의 아들이었으나 큰 집에서 아들을 보지 못한 탓에 양자로 들어가 해남윤씨의 대를 이었다. 윤홍중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관례대로 동생 의중의 둘째 아들인 유기로 하여금 대를 잇게 했다. 그런데 유기 역시 아들을 보지 못했다. 하는 수없이 형 유심의 둘째 아들인 윤선도가 윤홍중의 호적에 입적된 것이다. 고산은 작은아버지의 집이 있던 명례방(지금의 명동)에서 살다가 25세에 처음으로 해남 종가에 내려왔다고 한다.

1575년(선조 8)부터 조정대신들은 동·서인으로 나뉘어져 대립하기 시작했다. 붕당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중종반정을 성공으로 이끈 뒤 조정을 장악했던 훈구·척신파(기호)는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그러나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집권 주류 세력은 여전히 경기·충청(호서) 출신인 기호사림파 차지였다. ‘기호’는 경기, 호서(충청)에서 한 글자씩 따온 말이다.

1567년 즉위한 선조는 조선왕조 최초의 방계승통(傍系承統 )왕이었다. 방계승통은 왕이 아들 없이 죽으면 혈족이 임금의 후사로 들어가 대(代)를 잇는 것이다. 선조는 적장자가 아니었던 만큼 정통성이 없는 왕이었다. 지지기반이 취약했다. 따라서 선조는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기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세력을 대거 중용했는데 이 세력이 바로 영남사림파였다. 그런데 해남 윤씨 가문 사람들은 이 영남사림파에 속했던 것이다.

고산 윤선도 영정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은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 등 수많은 참화를 불러일으켰다. 사림파는 기호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극심한 정쟁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기축옥사다. 송강 정철이 주도한 기축옥사로 1천여 명에 달하는 사림파 인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해남 윤씨 사람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명종(1545~67년)때 호남 사림은 영남사림파를 지지하는 화담 서경덕(전라右도) 계열과 기호사림파를 지지하는 면앙정 송순(전라左도) 계열로 나뉘어져 있었다. 화담 서경덕 계열은 동·서인 분당 때 영남사림파에 가담했던 이발·이길 형제 및 정개청 등이 주축이었다. 반면 면앙정 송순 계열은 송강 정철과 고경명, 김천일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그런데 송강 정철은 서경덕 계열 인사들을 축출하기 위해 ‘정여립모반사건’을 꾸미고 피바람을 몰고 왔다.

서인에 속했던 정철이 정여립을 역모 주동자로 몰아가는 와중에 정여립이 자살해버렸다. 그러자 역모사건은 사실이 되고 말았다. 정철은 정여립이 역모를 하지 않았다면 왜 스스로 죽었겠느냐며 증거가 없는 반역모의를 사실화시켜버렸다. 정여립과 친한 사이였던 윤의중은 파직됐다. 낙향하는 도중에 죽음을 맞고 말았다. 당시 동인의 영수는 윤의중의 생질이었던 이발이었는데 이발은 동생 이길과 함께 처형돼 버렸다.

정철은 어렸을 때 호남명문가인 광산이씨 가문을 찾았다가 이발·이길 형제로부터 수모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사적인 감정과 권력다툼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정철은 잔인하게 이발·이길 형제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거기다 두 형제의 82세 된 노모와 8세 난 아이까지도 지독한 고문을 받도록 해 결국은 죽게 만들었다. 정철의 칼날은 호남사림파의 거두인 전남 무안의 정개청과 경남 진주의 남명학파 최영경에게도 향했다. 둘은 결국 처형당했다.

3년 동안 계속된 기축옥사로 해남윤씨를 비롯 나주 나씨, 창녕 조씨 등 수많은 전라右도 호남 사림들이 죽어 나갔다. 호남 지역에서만 1천여 명이 역모가담·동조의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때 목숨을 잃은 이의 수가 무오(1498), 갑자(1504), 기묘(1519), 을사사화(1545) 등 4대 사화 처형자 수보다 많았으니 호남사림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를 헤아려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고산 윤선도는 서인이 장악한 조정에서 배척을 받았다. 고산은 30세에 당시 최고 권세가인 이이첨 일파의 불의를 규탄하며 탄핵 상소를 올렸지만 오히려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당한다. 다음 해에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돼 6년을 더 귀양살이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51세에는 인조를 구하기 위해 강화도로 갔지만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에 뱃머리를 돌렸다. 결국 문안하지 않은 불충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된다.

고산은 서인의 집요한 배척과 모함으로 74세에도 함경도 삼수로 유배됐다. 79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광양으로 이배돼 81세까지 귀양 생활을 했다. 효종의 스승이었지만 조선은 고산이 뜻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못다 이룬 야망의 한과 좌절감을 시를 통해 토로했다. 오우가(五友歌)나 어부사시사와 같은 고산의 시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읊은 것이 아니다. 피맺힌 가슴이 써낸 격정과 회한의 울부짖음이라 해도 무방하다.

서인의 압박은 윤선도의 세 아들에게까지 미쳤다. 당시 조정은 권력을 쥔 서인과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는데 남인이 열세였다. 해남 윤씨는 남인에 속했다. 이런 이유로 고산의 맏아들 윤인미는 문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고산의 아들이라는 점이 벼슬길을 막았다. 윤인미의 외아들 윤이석 또한 말년에야 겨우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공재 윤두수 초상화

윤이석의 아들이 ‘자화상’을 그린 공재 윤두서로 윤선도의 증손자다. 자화상은 공재가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수염 한 올 한 올이 살아있는 듯하다. 공재선생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말을 건넬 것 같다. 조선미술의 정수다. 양반화가가 그린 풍속화는 조선미술의 변혁을 가져왔다.

윤두서의 화풍은 정선과 김홍도, 신윤복에 영향을 끼쳤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실개혁의 당위성을 드러낸 이런 실사구시 형 작품세계는 실학이라는 학풍과 연결됐다. 윤두서의 외증손 다산 정약용이 실학의 집대성자가 된 것은 해남 윤씨 가문의 실학기풍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해남 윤씨 가문 사람들의 곧음과 실사구시는 외손 정약용에 의해 다시 한번 활짝 꽃을 피운다.

국보인 공재 작품 ‘자화상’이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넘어가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실제 일제는 공재의 자화상에 눈독을 들였다. 일본 육군 우시지마 장군이 공재 윤두서 그림을 팔라고 하자 17세손 윤정현(尹定鉉, 1882~1950)이 “우리 혼을 팔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강직한 조상에 강직한 후손이다.

■윤선도 유물전시관과 보길도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전경

녹우당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은 조선 중기의 역사와 문화를 헤아릴 수 있는 4천600여점에 달하는 문화유산이 보관, 전시돼 있다. 지난 500여 년 동안 해남 윤씨가 부대껴온 각종 사건과 궤적들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곳이다. 또한 고산 윤선도의 삶과 문학세계를 잘 들여다볼 수 있다.

<고산연보>(孤山年譜)는 고산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는 고산의 외모가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용모가 단정하다. 안색이 엄숙하고 굳세어 대하는 사람이 바로 볼 수가 없다. 응시하는 눈빛이 섬연하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에 놓여 있는 고산의 표준영정은 이런 묘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눈빛이 형형하다. 그 눈빛은 불의를 넘기지 않는 사람만이 내는 것이다. 영정 속의 고산을 한참 바라본다. 평생을 정적들의 모함과 시기 속에 살아온 이. 학문이 깊었기에 왕의 스승이었던 이. 그렇지만 그 학문을 나라를 위해 제대로 사용해보지 못한 비운의 정치가. 한편으로는 그 회한을 글로 풀어내 우리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작품들을 남긴 대문호.

유물전시관에 보관돼 있는 그의 저서와 유품들이 새삼 정겹다. 유물전시관에서는 윤선도의 대표적인 작품인 <산중신곡>(山中新曲)과 어부사시사 등을 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공재 윤두서 작품과 그의 손자 청고 윤용의 작품인 ‘미인도’도 만날 수 있다. 국보급 작품들을 대하는 즐거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해남 윤씨 가문 내에서 전통 대대로 내려오던 옛 생활 물품들을 구경하는 것은 덤이다.

고산 윤선도의 자취는 연동마을에서 남서쪽으로 10여㎞ 떨어진 곳에 있는 금쇄동(金鎖洞)과 완도 보길도에서도 대할 수 있다. 금쇄동은 영덕 유배에서 돌아온 54세의 고산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시를 짓던 곳이다. 고산은 금쇄동에 원림을 조성하고 회심당과 불훤요, 휘수정 등을 짓고 연꽃과 물고기를 길렀다. 이곳에서 대표적인 조선시가인 <오우가>가 만들어졌다.

보길도 부황리 윤선도원림 곡수당

완도 보길도 역시 윤선도의 자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낙서재(樂書齋)와 동천석실(同天石室), 세연정(洗然亭) 등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고산이 <어부사시사> 등 많은 시문을 남긴 곳이다. 윤선도의 생활상과 자연관을 유추해볼 수 있는 문화사적 가치가 크다.

도움말/이덕일, 최요찬, 김세곤, 유홍준, 박미례

사진제공/위직량, 해남군, 완도군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보길 부황리 윤선도원림 낙서재
보길 부황리 윤선도원림 동천석실
보길도 부황리 윤선도원림 세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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