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97>
12장 지체와 문벌을 넘다

“그러면 중국은 왜 만리장성을 쌓았소?”

이항복은 낙상지 참장의 논리가 납득이 가지 않아 되물었다.

“그러니까 미친 짓이요. 왕의 권위를 위해서 축성한 것일 뿐, 적을 물리치지 못하는 허깨비요. 일생동안 군역에 매달리다 산 속에서 죽은 병사만도 기십 만명이오이다. 얼마나 백성을 욕먹이는 짓입니까. 백성을 이런 식으로 다루니 장성을 완성하자마자 나라가 망해버린 것 아니오? 이들을 제대로 양병했으면 최강군 말이라도 들었지. 전쟁은 쓸데없는 권위 놀음, 탁상의 공담(空談)으로 무너지는 것이오. 분명히 말하건대, 성벽을 허무는 순간 당신들의 제국은 넓어집니다. 마음의 성벽도 허물어져 넓어지지요. 조선 지도를 선물로 제공한 걸 보면 상상력이 풍부한 줄 알았는데, 거기까진 미치지 못하는군. ‘성을 쌓으면 망한다’는 말은 징기스칸의 말입니다. 자기만의 성을 쌓고 그 안에 스스로 갇혀 살겠다는 것은 전략중에서도 하수라는 뜻이지요.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서 막아집니까? 열린 세계관이 그들을 구원할 것이외다.”

낙상지는 조선 지도 선물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달리하고 있었다. 그의 새로운 군사철학에 정충신은 귀가 뜨이는 기분이었다. 낙상지가 다시 말했다.

“얼마전 나의 부장(副將)이 통군정에 오른 적이 있소이다. 그때 왕이 명나라 군대가 오지 않는다고 루에 서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더군요. 그래서 통군정을 ‘통곡정’이라고 부른다면서요? 나의 부장은 처음에는 우는 자가 누구인 줄 몰랐는데, 알고 난 뒤 대단히 실망했답니다.”

행색이 초라해서 부장은 그가 초로(初老)의 고을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명군 복색을 한 부장을 발견하자 달려와 반기었다.

“왜 이제 오시오. 얼마나 기다렸는데... 참 잘왔소.”

“누구시오?” 부장이 물었다.

“과인이 몽진해온 조선국의 왕이요.”

그는 처음 그 말을 듣고 늙지도 않은 자가 실성한 줄 알았다. 그러나 뒤에 궁인들이 달려와 그를 부축하는 모습을 보고 상황을 알았다. 부장은 진지로 돌아와 투덜대었다.

“위엄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슴 졸이는 왕의 체모를 보고 내가 과연 조선에 투입될 필요가 있는가, 의심스럽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군병을 이끌고 구련성으로 돌아가버렸다. 낙상지가 덧붙였다.

“사대가 조선 정신의 기본입니까. 사대주의 노예사상이 뼛속까지 새겨진 사람이 왕이라니, 자주정신이 뭔지 알기나 하오? 백성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어도 부족할 판에, 스스로 비관을 만들어 쩔쩔매고 있으니 백성들이 누구를 믿고 따르겠소? 비관이 만드는 공포, 낙관이 만드는 희망이란 말 못들어봤소? 세상의 어떤 비관도 낙관을 이기지 못하오이다. 그런데 명색이 왕이란 사람이 도망 와서 탄식만 하고 있으니 나라꼴이 뭐가 되겠소? 그러면서도 백성은 깻단 털듯 털고, 빨래 짜듯 쥐어짠단 말이오이다. 무능한 음군(陰君)이 아니고 뭐요?”

낙상지의 말에 명의 장수들이 놀라고 있었다. 와, 저 박식과 놀라운 달변. 야전에서 굴러먹은 그들로서는 지식이 짧은지라 낙상지의 똑떨어진 달변에 놀라면서 쫄고 있었다. 낙상지가 하던 말을 계속했다.

“비관주의자는 기회 속에서 어려움만 보고, 낙관주의자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회를 본다 했소. 백성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실천주의자가 왕의 역할 아니겠소?”

“맞소이다. 새겨들으렸다?”

이항복이 동의하며 곁의 정충신에게 명했다. “넷!” 하고 정충신이 장창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가 자기 가슴에 갖다 붙였다.

“조선에 진격하여본즉 나라가 이렇게 타락한 줄 몰랐소. 왕조와 그 사대부들이 사는 방법은 전통적으로 백성을 쪼개어 분열시키고 가두고 있소이다. 이런 나라에서 무슨 힘이 나오겠소. 지역으로 나누고, 신분 계층으로 나누고, 남녀로 나누는 등등 세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잘게 쪼개어 분열시키고 통치하는 수법... 그렇게 가른 백성들이 파편처럼 흩어지지 않겠소? 거기서 무슨 힘이 나오겠소.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노비나 천인, 상놈이고, 그들은 일할도 안되는 양반계급을 위해 혓바닥 늘어지게 부역하고 있으니 누가 나라에 애착을 갖겠느냔 말이오!”

“맞는 말이오.” 누군가가 아는 체를 했다.

“세도가들은 공포를 유포해서 권력기반을 다지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허구요. 사대부와 양반 계급이 이런 위협으로 착취하고, 나랏돈 빼먹는데, 나라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도둑이 되어버리니 개판이 되어버린 것이오. 어느 누가 이런 나라에 충성하겠소? 강제된 충성이 충성이요? 망국의 길로 접어든 것이 당연한 수순이지...”

“낙 참장, 지나치지 않소? 왜 그리 남의 나라에 신경쓰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와 무슨 상관이오? 그들의 정사까지 관여할 필요가 업소이다.”

한 장수가 불만을 표시했다.

“그래요, 낙 참장, 아무리 옳은 말도 계속 반복하면 개소리가 되는 거요. 오늘은 우리를 위한 환영식이니 즐기자고! 조선 기생 맛이 찰지다고 소문나지 않았소? 뽀대나게 놀아보자고!”

기생의 가슴에 손을 넣고 계속 젖을 주물럭대던 한 장수도 덩달아 씨부렸다. 그러자 와크르 그릇 깨지는 소리로 장수들이 웃었다. 낙 참장이 무참해진 얼굴로 이여송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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