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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206>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206>

12장 지체와 문벌을 넘다

정충신이 자신감있게 설명했다.

“쪼깐한 왜것들 아주 아직을 내버리겠습니다. 씨알이 작은 놈들이라 몇 볼태기 안될 테니, 한번 패대기치면 깨구락지 뻗듯이 쭉 뻗을 것잉마요. 우리가 고런 쥐새끼들한티 당하는 것이 분이 납니다요. 우리가 학문이 부족합니까, 예의법도가 부족합니까. 그렇다고 덩치가 작습니까. 키 크고 잘 생기고, 기골이 한족 마냥 장대한디, 맨날 당하고만 있으니 환장해불겠고만요.”

정충신이 열을 올리자 높은 방석에 앉아있는 이항복이 이윽히 그를 내려다 보며 웃었다. 사랑채에서 정충신을 불러 하루 있었던 얘기를 듣는 것은 이항복으로서는 낙이었다. 기발한 기지와 패기넘치는 말은 답답한 정사를 다룬 골치아픈 그에겐 한 모금 냉수를 마신 것같은 청량감이 있었다.

“그렇게 분이 나는 것이냐?”

“당연하지요. 좁만한 것들한티 당하니 기분 잡쳐불죠. 중국의 남방 병사들이 쳐들어가면 우리도 왜의 본토로 쳐들어가야지요. 집어먹어부러야지요.”

“허허허.”

이항복은 비현실적인 얘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뿌듯했다. 젊은 청년의 용기와 불타는 야망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꿈을 한번 꾸면 꿈으로 끝나지만, 계속 꾸면 현실이 된다.

이항복 자신, 젊은 시절 그런 꿈을 가졌다. 개국 200년이 되니 나라는 무력해지고, 보신주의가 만연했다. 발전의 동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그는 패거리들을 끌어모아 토론으로 밤을 새우고. 삼각산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에 올라 호연지기를 길렀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를 낭인 취급했다. 세상은 젊은이의 뜻을 받아들일 여건이 못되었으며, 방에 쭈그리고 앉아 공맹(孔孟)을 달달 외워야만 사람 구실을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난세에 영웅 난다고 했지만, 노상 난세니 누구나없이 타성과 나태에 빠져있었다.

그는 돌아와 뒤늦게 책을 붙들고 과거에 매달렸다. 그도 기득권의 한 자리를 찾고자 공맹을 달달 외웠다. 그리고 다른 연배들보다 늦게 급제했다. 세월만 낭비한 셈이 되었다. 다행이라면 부친과 처가의 후광으로 출세의 급행열차를 탔다는 점이다. 대학자 이제현의 후손으로서 아버지는 참찬 이몽량이고, 처가쪽은 장인이 권율이고, 처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다. 그는 손쉽게 지배층의 복판에 서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나름 중심을 잡고 있었으니, 그것은 제 정파로부터 일정 부분 거리를 둔 결과였다. 제 정파들은 연일 별것도 아닌 이치로 치고박고 싸우고, 조상 제사 시 이배를 올려야 하느냐 삼배를 올려야 하느냐, 곶감과 대추의 배치를 옳게 했느냐 안했느냐로 피터지게 다투었다. 도대체 두 번 절하면 어떻고 세 번 절하면 어떤가. 곶감과 대추의 배치를 모르고 바꿔놓으면 또 어떤가. 삽 한자루 만드는 것보다 못한 이런 쟁투 속에 묻혔으니 국정의 생산성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쟁투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니 이항복은 누구로부터도 공격을 받지 않는 인격자가 되었다. 화려한 명문 가대의 후광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올라서도 점잖고 마음 넉넉하니 존경을 받았다. 어전회의에 나가서도 그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해학 넘치는 농담 한마디 던지면 회의 분위기는 아연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매사 쌍통 찌푸리며 치고 박는 신료들도, 그래서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불안해 했다. 그런 대인풍의 넉넉함이 저 멀리 전라도에서 올라온 솜털 보송보송한 막 소년티를 벗어난 신임 초관도 마음 편안하게 받아들여 거리낌없이 뜻을 펴보이는 것이다. 이항복이 물었다.

“너는 나라에 불만이 많은가.”

“당연합지요. 이런 나라는 정말 싫습니다요.”

“어째서 그렇단 말이냐.”

“이런 얘기 될랑가 모르겄는디요?”

행랑채는 이항복과 정충신 단 둘 뿐이었다. 이항복이 웃음을 머금고 그를 바라보자 정충신이 마음 놓고 말했다.

“상감마마는 의심병환자 아닙니까요?”

이항복은 놀랐지만 조용히 되물었다.

“왜?”

“세자 저하가 일 잘하면 칭찬할 일이지, 왕권을 노린다고 오해하는지 자꾸 내칠라고 한단 말입니다. 깜도 안되는 풍문조차도 반역 떡밥을 놓아서 옥사로 다스리려 한단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냐.”

“죄없는 사람을 뒤집어 씌운 뒤 배 창사를 뽑아버링개 하는 말이지요.”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큰 일 난다는데도?”

“조선이 망하니께 하는 말이지요. 망할 징조가 폴세 나타났습니다요.”

“조선이 망한다고?”

“점쟁이는 아니지만요, 종당에는 그러할 것이옵니다요. 악덕 사대부들이 나라를 거덜낼 것입니다요.”

“네 이놈, 듣자듣자 하니 못할 말이 없구나!”

이항복이 호통을 쳤다. 나가도 너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충신이 눈에 잔뜩 힘을 주며 대답했다.

“제 말이 틀렸사옵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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