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
문상화(광주대학교 교수)

문상화 광주대 교수

이제 보름만 지나면 새로운 한해가 시작된다는 말은 식상하다. 지나간 한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한다는 말도 전혀 새롭지 않다. 서구에서는 12월을 상징하는 신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여서, 앞과 뒤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말도 심드렁하다. 어쩌면 우리의 올해가 이러한 수사로 장식하기에 너무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연초에 덕담으로 시작된 새해가 또 이렇게 저무는구나 하는 무덤덤한 느낌에 익숙한지도 모르겠다.

오이디푸스는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인물이다. 비록 신화 속에 존재하고, 연극을 통해 재현되기는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비극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승리의 대가로 어머니를 취해서 아들이자 동생을 키워야하는 운명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오이디푸스에게 가장 잔인한 순간은 자신의 행동이 신탁을 통해 밝혀지는 순간이다. 몰라서 한 행동이지만, 그의 비극적 결말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자신이 칼을 겨누고 있는 상대방이 자신의 아버지이고, 자신이 취한 여인이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던 게 비극이고, 알지 못한 게 죄다.

수년전에 천만관객을 끌어 모았던 영화 ‘암살’의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전지현이 이정재를 총으로 겨눈 채, “왜 그랬냐고, 왜 일제에 빌붙어서 동지들을 팔았냐고” 물었을 때 이정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자조적이다.

“몰랐어, 정말 몰랐어. 해방이 될 줄 정말 몰랐다구!”

일본이 패주할 것을 알았다면, 그래서 우리 민족이 해방이 될 줄 알았다면 민족을 배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일본의 위세가 영원무궁할 것 같은 생각에 그 위세에 빌붙어 자신의 안위를 지키겠다고 다짐한 것이 이정재의 실수라면 실수일 것이다. 몰랐던 게 이정재의 죄지만 현재에 함몰되어 있던 그가 어떻게 미래를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있다면 현재는 생각보다 손쉬운 일일 것이다. 지금 이렇게 힘든 일이 조금만 참고 지나면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라는 보증서 같은 것이 있다면 지금의 고난은 오히려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이것도 안하면서 도대체 뭘 얻겠다는 거지?” 콧노래를 부르면서 현재의 어려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올 환한 미래가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의 어려움이 무슨 대단한 것 일 수 있겠는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마치 공포영화에서 겁에 질린 인물 코앞으로 카메라를 바짝 들이대서 시야를 좁게 하면, 시야가 제한된 관객들의 공포심이 극대화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카메라를 뒤로 빼서 관객들이 사건이 일어나는 전경을 보게 하면 공포가 훨씬 줄어들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관객들의 공포가 가중되는 것이다.

시간의 연장선에 있는 우리들은 과거는 시선이 닿는 곳까지 멀리 볼 수 있지만 미래는 바로 코앞에 왔는데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과거를 볼 때는 비교적 차분하고 안정된 마음이 되지만 미래를 볼 때는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의 한가운데 바로 “모르기 때문”이 존재한다. 하지만 모른다는 것은 일어날 불행의 경우와 마찬가지고 다가올 행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렇지 않다면 로또를 살 이유가 없다.

이제 2019년을 코앞에 두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마음이 편치 않다면 “다가올 행운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한 고비만 꺾어 돌면 뜻하지 못한 행운이 미소를 띠고 기다릴 수도 있고, 도저히 출구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지금의 어려움도 정말 뜻하지 않은 곳에서 출구가 있을 수 있다. 평생을 야구에 바쳤던 야구인이 “야구, 몰라요!”라고 하지 않았던가! 결과를 몰라서 재미있는 야구처럼, 미래를 몰라서 재미있는 인생이라고 믿으면 우리의 삶이 조금은 덜 힘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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