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72.조선은 왜 바다와 섬들을 포기했을까?
섬과 바다 포기한 조선, 병약한 나라로 전락하다

왜구 약탈 피하기 위해 섬 비우는 쇄환정책 실시
麗末에 시작, 중앙통제 힘든 섬 세력 약화 의도도

동북아바다 호령하던 해상왕국 영화·기개 단절돼
바다경시 중국대륙 중시 思潮가 약체한반도 초래

韓·日 레이더갈등 고조…한국 해군력 日本에 열세
우리의 미래는 바다에…역사적 성찰 새롭게 해야

거꾸로 된 세계지도.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은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인의 미래가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의 미래는 바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과 일본이라는 해양강국에 맞서 한국의 안보와 경제를 지켜내려면 동북아의 바다를 우리의 무대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동원그룹제공

■해군 강국의 필요성

한국과 일본 간에 ‘레이더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2018년 12월 20일 우리 해군 광개토대왕함이 표류 중인 북한 어선에 대한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일본 초계기가 접근해왔다. 이런 상황이 끝난 후 일본 측은 광개토대왕함이 초계기를 사격하기 위해 표적까지 거리를 계산하는 추적레이더(STIR)를 발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우리 국방부는 광개토대왕함이 추적레이더를 쏘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오히려 일본 초계기가 근접해 위협적인 저공비행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일 양국민 간의 감정싸움도 깊어지고 있다. 일본 방위성은 2018년 12월 28일 일본 자위대 해상초계기(P-1)에서 촬영한 동영상을 유 튜브에 올렸고, 우리 국방부 역시 2019년 1월 4일 ‘일본 측의 사실왜곡을 반박’하는 동영상을 유 튜브에 게재했다.

국방부가 공개한 일본 p-1초계기 저공비행영상 .노란원안에 일본 초계기가비행하고 있다.

이후 양 국 네티즌들은 인터넷 상에서 댓글 전쟁을 벌이며 상대측을 비난하고 있다. 양국 정부는 물론이고 국민들까지 합세해 벌이고 있는 ‘레이더 감정’싸움이 ‘실제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일본 측의 도발이 격해질 경우 우발적인 군사충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군사충돌은 독도 일대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 한일 간의 군사충돌 가능성은 지난 2006년에 벌어졌었다. 당시 일본 측이 해양탐사를 핑계로 독도 수역에 들어오려고 하자 노무현대통령은 3,000톤급 이상 해경함정들을 독도로 출동 시킨 뒤 일본 순시선과 해양 탐사선이 오면 충각공격(배에 부딪쳐 배를 밀어내는 것)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일본 측은 해상자위대를 출동시켜 일촉즉발의 긴장상태가 벌어졌다.

결국 미국의 중재로 한일 양국은 독도해상에서 함정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이번의 경우는 우리 해군 함정과 일본 초계기 간에 갈등이 벌어진 것이어서 지난번과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독도수역 도발’이나 ‘레이더 도발’ 모두 군사력 증강을 통해 군사대국이 되려는 일본 정부의 ‘불순한 의도’가 개입돼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일본 아베총리는 평화헌법 개정과 재무장을 통해 일본을 군사강국화 하려는 야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비핵화가 진행되면서 군사력 증강의 명분이 다소 약화된 상태였다. 그런데 한일위안부협정백지화와 신일본제철 등 일본전범기업에 대한 한국 측 법원의 배상판결로 한일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레이더 갈등이 터지자 이를 국면전환용으로 삼은 것이다.

일본 측이 공개한 동영상에는 일본 초계기 조종사들이 광개토대왕함을 ‘목표’(target)라고 지칭하고 있다. 조난어선이 아닌 한국 함정을 목표라고 부른 점을 볼 때 일본 초계기의 광개토대왕함 근접비행은 일본 측의 ‘기획도발’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일본 측의 도발은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한국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군력만 놓고 따진다면 사실 한국 해군은 자위대 해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군사전문가들은 만약 독도를 놓고 동해상에서 한국 해군과 자위대 해군이 전쟁에 돌입했을 경우 한국 해군이 7시간 이내에 전멸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비참하고 충격적인 예상이다. 하지만 양국 해군력에 대한 비교는 이런 예측이 사실로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불과 4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 수군은 조선수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조선수군의 전선은 일본 수군 전선보다 더 크고 튼튼했다. 그리고 조선수군의 전선은 각종 화포로 무장하고 있어 해상전투에서도 유리했다. 장거리에서 대포를 쏴 왜 전선에 타격을 입힌 뒤 가까이 다가가 부딪쳐 배를 부셔버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그런데 지금은 전세가 역전된 상태다. 함정규모나 병력 규모에 있어서 모두 한국 해군이 열세다. 일본 해상 자위대는 대형 수상함만도 50척에 달한다. 헬기항모 4척을 비롯 강습상륙함 3척, 1만 톤 이상의 아타고 급 이지스 3척을 포함한 호위함 38척 등을 보유하고 있다. 호위함도 46척이나 된다. 지방대의 전투함 22척도 신형함으로 모두 교체됐다.

혼일강일역대국도지도. 조선개국 초기 건국 공신들은 강국조선을 위해 세계 각 나라와의 교류를 염두에 두었다. 이 지도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둔 중화사상에 기초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알리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인들의 세계인식이 대단히 넓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어서 의미가 깊다.

한국 해군의 전력은 세계 7위로 평가되지만 일본에 비해서는 턱없이 열세다. 2010년 이후 해군력이 증강되고 있지만 대부분 함정들은 노후화된 것이다. 1990년대 일본과 중국이 어마어마한 국방비를 투입해 해상전력을 극대화하고 있을 때 우리는 육군 전력 증강에만 매달려 있었다. 북한군과의 대치상태를 감안한 것이었지만 해군력 증강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일본이 아닌 중국과 해상전투를 벌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군사전문가는 현 상태의 전력이라면 한국 해군은 중국 해군의 엄청난 화력에 무참하게 난타당해 2시간 만에 전멸할 것이라고까지 전망하고 있다. 참으로 참담한 전망이다. 한중일해군의 병력은 123만:46만:19만이다.

함정 보유 톤을 기준으로 해 한국 해군의 규모를 1로 잡을 경우 중국과는 6.47:1, 일본과는 대 2.42:1이다. 실제 전력은 더 차이가 크다. 중국은 항공모함 4척을 비롯 동북아의 모든 이지스구축함보다 많은 함대방공구축함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 역시 경항공모함을 비롯 대부분의 함정이 각종 첨단 미사일과 방어 장비로 무장돼 있다.

워 게임(War Game:가상전투)을 해보면 중국과 일본의 해군력은 ‘힘센 청년’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해군력은 ‘젖먹이 아이’ 수준이다. 비교 자체가 무의미한 상황이다. 동북아 바다에서 한국은 중국과 일본에 밀려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장보고 시대 동북아 바다를 호령하던 그 기상은 어디로 갔을까? 그 원인은 단 한가지다. 고려 이후 우리 조상들이 너무도 바다를 멀리했기 때문이다. 바다를 잃으면서 웅혼했던 민족의 기상 역시 퇴락하고 만 것이다.

■바다를 멀리하게 된 조선

조선은 500년 동안 동·남·서해안 연안과 먼 바다에 있는 섬에서 사람들이 살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폈다. 이를 공도정책(空島政策) 혹은 쇄환정책(刷還政策)이라 한다. 일부에서는 공도정책이라는 표현에는 조선 섬을 방기(放棄)하고 영토로서 관리를 하지 않았다는 측면이 내포돼 있다고 지적한다.

‘공도정책’이라는 용어는 일제의 독도침탈(영유권주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공도정책이라는 용어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공도정책의 전제개념은 ‘국가권력이 미치는 통치대상지역이 아니다’는 것이다. 즉 고려와 조선이 방치했기에 일본이 영토로 귀속해 관리했다는 논리로 귀결되는 것이다.

고려말과 조선초기에 우리 연안의 섬들은 버려지고 말았다. 결국 이런 이유로 바다로 버려졌다. 바다로 향하는 우리의 힘을 키워야한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공도정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적이다. 공도정책은 섬을 비워두고 아예 관리를 하지 않는 것이지만 쇄환정책은 섬을 비워두되 관리의 순찰을 통해 영유권을 행사한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측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도움을 주는 만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쇄환정책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도정책이라는 표현이 ‘영토로서의 섬에 대한 포기’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조선조정은 연안의 섬들을 군사력과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기에 방치했을 뿐, 우리 땅으로서의 개념은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공도정책과 쇄환정책이라는 용어를 병기하기로 한다.

조선이 섬에서 사람들이 살지 못하도록 한 첫 번째 이유는 섬에 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가는 왜구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이유는 도망친 노비나 세금이나 군역을 피하려는 범죄자들이 숨어들어가 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즉 너무 멀고 넓어 조정의 세력(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두고 보느니, 아예 육지에서부터 사람이 섬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버리겠다는 것이다.

몽탄대교에서 강봉룡 교수가 고려시대의 해상세력과 왕건의 서해진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교수는 육지중심의 폐쇄적 역사인식을 바다로 확대하여 개방적 역사인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세 번째는 고려시대에서 보듯 물자와 교통이 편한 섬에서 해상세력이 크게 일어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고려 건국과정에서 태조 왕건에게 우호적이거나 혹은 적대적이었던 해상세력은 나주 회진포의 오다련(吳多憐)과 영암 상대포의 최지몽(崔知夢), 신안 능창(能昌)등이었다. 모두 강력한 해상세력이었다. 여몽(麗蒙)연합군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삼별초 역시 그 세력중심이 전라도 남해안과 제주도. 경상도 남해안 일대 바다 사람들이었다.

조선조정은 군사력과 행정력을 동원해 섬을 지키기보다는 포기하는 정책을 폈다. 섬을 버린 것은 결국 바다를 버리는 것이었다. 이후 조선의 역사는 육지만의 역사가 돼 버렸다. 땅으로 연결되는 중국만을 선진문명과 사상을 받아들이는 통로로 여겼다. 이런 중국 중심의 사고와 행동은 결국은 사대주의를 낳았다. 땅만을 바라보던 조선 초기 권력자들의 사고방식은 종국적으로는 ‘바다로부터의 접근’을 막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이어졌다.

상대포. 영암 상대포는 전남 내륙사람들이 영산강을 거쳐 중국과 일본으로 가는 해상교통로의 중심지였다.

해로(海路:바닷길)의 관점에서 한국 고대사의 새로운 흐름을 정리한 강봉룡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장은 그의 저서 <바닷길로 찾아가는 한국고대사>에서 오랫동안 육지중심의 사고에 안주해 바다에 대한 관심을 방기해 온 조선의 역사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조선은 500년의 긴 세월동안 바다를 통한 대외교류를 금지하는 해금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우리가 흔히 쇄국으로 일컫는 조선의 폐쇄주의 정책이 바로 이것이다. 조선의 해로는, 국가차원에서는 주로 세곡(稅穀)을 운송하는 길(漕運路)로, 그리고 민간차원에서는 어업활동과 소규모 국내 물자유통의 통로로, 극히 한정적으로 이용되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이에 관계하는 사람들에겐 국가적 통제와 사회적 천대가 덧씌워졌다. ‘뱃놈’‘섬놈’‘갯것’ 등의 비칭이 이를 반영한다. 해로는 외국과 문물을 교류하는 국제적 통로로서의 기능도 온전히 상실하였다. 당연히 해로에 대한 국가·사회적 관심도 극도로 왜소해졌다.

장구한 세월 지속해온 조선시대 해금의 역사는, 해양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까지 역사의 관성(慣性)으로 작동하여 우리의 인식을 제약한다.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해로를 낯선 길로 간주하고 멀리하는 이유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해로에 대한 과감한 인식 전환과 이를 위한 새로운 역사적 성찰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육지중심의 폐쇄적 역사인식을 바다로 확대하여 개방적 역사인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공도정책의 시발

강봉룡 교수는 고려 말·조선의 공도정책은 삼별초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즉 고려 말 삼별초와 관계를 맺은 주요 섬들이 ‘空島’화된 현상에 주목해, 여몽(麗蒙)이 그간 삼별초의 저항해 가담했던 도서해양세력을 위험세력으로 낙인찍어 그들의 생활기반인 섬을 비우는 ‘공도’ 조치를 강제로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공도조치는 삼별초가 완전 평정된 이후에 삼별초에 동조, 항몽대열에 적극 가담했던 전남지역 도서해양세력이 완전히 소멸되는 운명에 빠지게 했다. 결국 그간 해양활동에 전념하며 국가 운영에 기여해온 전남지역의 도서해양세력은 ‘지는 해’의 운명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강 교수의 추론이다.

복원된 병영성 옹성. 왜구를 막기위해 세워진 강진병영성은 1555년 을묘왜변 때 왜구들에 의해 함락되고 마는 비운을 겪었다.

이에 따라 자위세력을 상실한 도서연안지역은 왜구의 침탈을 받아 버림받은 황폐의 공간으로 전락해 갔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역사에 기록돼 있는 왜구의 노략질은 상상을 초월한다. 고려사에 기록돼 있는 최초의 왜구 침입은 1223년(고종 10년)이다. 이때부터 고려가 망하는 1392년까지 왜구는 169년 동안 고려를 529회 침입했다.

특히 섬 지역은 무방비상태였다. 왜구가 나타나면 그대로 죽임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려조정은 섬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모두 뭍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를 공도정책 혹은 쇄환정책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려 말기 왜구의 침탈로부터 섬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섬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영산강 일출. 영산강이라는 이름은 고려때 공도정책으로 강제 이주당한 영산현(현 흑산도) 사람들이 고향이름을 따서 강 이름을 부른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영산강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배경이다. 고려 조정은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영산현(지금의 흑산도)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그곳 사람들을 모두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영산현 사람들이 정착한 곳이 지금의 영산강 변 일대이다. 영산현 사람들은 서해안 바다로 이어지는 강을 거슬러 올라와 지금의 나주근처 강변에 터전을 잡았다.

그리고 강의 이름을 고향이름을 따서 영산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산강과 바닷길을 되짚어 흑산도 근처까지 다시 나가 고기잡이를 한 뒤 영산강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런 과정에서 삭힌 홍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속설도 있다. 영산포 사람들이 흑산도 일대에서 홍어를 잡아 영산포로 돌아오는 보름정도의 기간에 홍어가 자연발효 되면서 코를 톡 쏘는 홍어가 생겨났고 이후 사람들이 이를 즐겨먹었다는 것이다 .

한편 조선 개국 초기 조정대신들은 버려져 있는 섬을 적극적으로 복구시켜 부국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의 신하였으면서 또한 조선개국에 공이 큰 조준은 고려 우왕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려 도서연안복구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오늘날에 압록강으로부터 남쪽은 대개 모두 산이고 비옥한 땅은 바닷가에 있는데, 비옥한 들판의 수천 리 논밭이 왜노(倭奴)에게 함락되어 갈대만이 하늘에 닿고 있기에 나라가 이미 어염과 목축의 이익을 잃고 또 비옥한 들판과 좋은 땅의 수입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원하건대 한(漢)에서 민(民)을 모집하여 변방을 채우고 흉노를 막았던 고사를 이용하시어 쇠망한 고을의 황무지를 개간한 자에게는 20년을 기한으로 그 땅의 조세를 받지 말고 그 민에게 역을 부담지우지 말 것이며, 모두 수군만호부(水軍萬戶府)에 소속시켜 성루(城堡)를 수축해서 노약한 자들을 모여 살게 하고, 척후병(斥候兵)을 멀리 보내고 봉화(烽火)를 신중히 하며, 일이 없을 때에는 농사짓고 고기를 잡거나 주조하고 야금(冶金)하여 먹고 살게 하되 때때로 배를 만들게 하여, 적이 이르면 들판을 비우고 성보 안으로 들어가 수군이 공격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합포(合浦)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이 한다면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유망한 자들은 모두 그 고향 마을로 돌아올 것이니, 변경의 주·군이 이미 채워진 뒤 여러 섬도 점차 충실해질 것이고, 전함은 많아지고 수군은 훈련되어 해적이 도망가고 변방 고을이 안녕해질 것이며, 조운은 편리해지고 창고는 채워질 것입니다. 수군만호(水軍萬戶)와 여러 도(道)의 원수(元帥)로서 능히 둔전을 두고 전함을 수리하면서 인심을 결속하고 호령을 시행하여 적을 섬멸하고 변방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자에게는 섬의 토지를 하사하여 대대로 그 수입을 먹으며 자손에게 전하여주게 하시고, 한 성보를 잃거나 한 주·군을 망친 자는 군법으로 처단하여 가볍게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권장하고 징벌함을 보이십시오.’

이 상소문에서 조준은 고려 태조가 ‘도서연안의 재력을 장악하여 삼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왜노에게 함락되어 황폐화돼 있으니 군사를 보내 섬을 지키고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고 고기잡이를 하게 하되,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면 섬에 사람들이 들어갈 살 것이라며 그 구체적인 섬 복구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개국 초기 상당기간 동안 이 도서연안복구는 실천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세기 후반 부분적으로 육지사람(당초는 섬사람이었으나 육지로 강제이주 당했던 사람들)들의 섬 이주가 이뤄졌다. 김경옥 목포대 교수가 쓴 <전라도 도서지역 마을공동체의 조직과 기능>이라는 논문에는 진도군의 복군(復郡)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15세기 초에 왜구들이 진도에 자주 출몰하자 중앙정부는 진도 주민들을 육지 땅 해남으로 이주하도록 하고 해진군(海珍郡)이라 칭하였다. 그러다가 진도 주민들이 해남에서 다시 섬으로 이주하여 진도군을 복설하게 되는데 이때 공을 세운 성씨가 창녕 조씨, 밀양 박씨, 김해 김씨 등이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조선 개국 초기 조선조정이 고려 말부터 시작된 공도정책을 계승한 것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지만 조선개국 공신들과 학자들은 매우 전향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의 발문에는 ‘중국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여러 나라에 대한 조선의 관심과 부국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다.

이 지도의 상단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글자가 횡서돼 있고, 지도의 하단에는 권근의 발문이 기재돼 있다. 권근의 발문에는 지도 제작과정이 적혀져 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하는 아주 넓다. 중국으로부터 밖으로 사해에 이르기까지 몇 천만리인지를 알 수가 없다. 이것을 줄여서 지도로 만들면 그 내용이 소략해지나, 중국의 오문(吳門)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서 나타난 역대 제왕의 국도(國都)를 참조해 만들었다.

건문 4년 여름에 좌정승 상락 김공(金士衡)과 우정승 단양 이공(李茂)이 나라 일을 보는 틈 틈이 이들 지도를 참고해 연구토록 했다. 또 이를 검상 이회(초두머리+會)에게 명하여 자세한 교정을 가해 이들 지도를 합쳐 일도(一圖)를 만들게 했다.

요수의 동쪽과 본국의 강역은 택민의 지도에도 역시 빠져 있고 소략한 부분이 많기에 이번에 특히 본국(조선)의 지도를 크게 그려 넣었다. 또 일본지도를 첨부, 정돈하여 새로운 지도를 작성했다.(후략) 이 해 가을 8월 양촌 권근(陽村 權近)이 적는다’

이 내용을 참조하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1402년(태종 2년) 김사형, 이회, 이무가 만든 관찬 지도이다. 중국 원나라의 <혼일강리도> 등에 우리나라와 일본을 추가해 새로 편집해 제작한 편찬도(編纂圖)임을 알 수 있다. 편찬도는 지형과 거리를 실제로 측량해 만든 실측도와는 달리 기존의 지도나 통계 자료 등을 근거로 해 제작한 지도를 말한다.

벽파진전첩비에서 바라본 벽파정과 명량바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원본은 전하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148×164㎝ 크기의 지도는 1459년 이전 모사본이다. 모사본은 일본 류코쿠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규장각 소장본은 이를 다시 필사한 것이다. 조선과 중국을 포함해 아시아, 인도, 중동, 유럽, 아프리카 일부까지 그려져 있다.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 대륙은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지도에는 중화사상과 조선건국의 정당성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고 있다. 지도 중심에는 중국이 자리하고 있어 세계의 중심은 대국 중국이라는 사상이 반영돼 있다. 또 비록 중국에 비해 조선이 작은 나라지만 잠재력은 중국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웅혼함이 배어있다. 그래서 조선을 일부러 크게 그려 넣었다. 자그만 치 일본보다 4배 크기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 200여 년 동안 조선은 중국만 섬기고 살았을 뿐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해외의 문물과 지식을 외면했다. 이에 반해 바다를 중시하면서 해양으로부터 유입된 신무기와 신학문을 받아들인 일본은 강성한 나라가 됐다. 태평성대를 누리던 조선은 나라를 지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구를 막고 물리치는데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조선은 섬을, 나라를 지키는 전진기지로 여기지 않았다. 무방비로 방치했다. 만약 조선이 연안의 섬을 왜구의 침범을 사전에 알아차리고 이를 공세적으로 퇴치하는 전진기지로 삼았다면 우리의 해양개척사는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수군의 용맹함과 강성함을 겁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정벌을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해양강국으로 우뚝 서야 한다.

13세기 몽골제국의 고려 침략 당시 국난극복에 크게 기여했던 세력은 전남지역 도서해양세력이었다. 1256년에 몽골의 총사령관 차라대(車羅大)가 70척의 전함을 직접 거느리고 압해도를 공격했으나 고려수군과 압해도 백성들이 힘을 합쳐 이를 물리친 것은 고려군과 압해도지역 섬 주민들의 기개가 남달랐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압해도 해전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 해전 사에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몽골군 총사령관이 이끌었던 수군을 압해사람들이 대포를 사격하면서 몽골군의 압해도상륙을 저지하고 결국 몽골군을 물리친 전투이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음에도 압해사람의 포격전과 항전 의지에 기세가 꺾여 퇴각하고 말았다.

삼별초 항쟁 이동로

고려조정이 몽골군에 항복한 뒤에도 삼별초군은 전라도 남해안과 제주도. 경상도 남해안 일대로까지 세력을 확장해 몽골에 대항했다. 이때 삼별초를 도와 여몽연합군에 맞섰던 주요 세력이 서남해지역의 도서해양세력이었다. 진도와 해남, 강진 일대 섬의 바다사나이들의 용맹스러움이 없었더라면 삼별초 해상왕국은 애초부터 태어날 수가 없었다.

조선 수군의 주력함 판옥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왜구와 일본수군을 상대로 바다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둔 장수는 정지장군과 이순신장군이다. 두 장군은 지략과 통솔력이 뛰어나 수많은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두 장군의 승리 뒤에는 바다를 잘 알았던 수많은 수군(바다사나이)들이 있었다. 바다를 제 집 안방처럼 여기고 거센 풍랑과 싸웠던 바다사나이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정지장군의 관음포 대첩과 이순신장군의 그 숱한 대첩이 가능했던 것이다.

거문도 어부가족. 거문도 어부들은 울릉도까지 배를 저어가서 조업활동을 한뒤 돌아오곤 했다.

남도 바다사나이들의 기개는 구한말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고흥 거문도와 초도 사람들은 울릉도, 독도 해상까지 배를 몰고 가 고기잡이를 하고 해산물을 거뒀다. 그런 과정이 결과적으로는 독도를 지키게 된 계기가 됐다. 거센 도전정신과 담대함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동서남해안을 누비고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과거 남도 바다사나이들의 삶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고 있다. 남도 바다사나이들의 역사는 잊혀버린 역사다. 거칠고 넓은 바다를 무대로 꿈을 펼치고, 외세(혹은 타지역 세력)에 맞서 싸우던 전라도 섬사람들의 기개와 저항정신을 되살릴 필요가 크다. 전라도 바다사나이들의 본보기라할 능창과 장보고, 초도 등 선인들의 강인함과 해양인(海洋人)으로서의 담대함을 이어받아야 한다.

바야흐로 해양시대다. 세계 각국이 바다로 눈을 돌리고 있다. 무궁무진한 자원을 지니고 있는 바다는 국가의 생존·경쟁력과 직결이 돼 있다. 예전의 경우 바다는 해외자원을 본토로 가져올 수 있는 교통망 확보의 차원에서 중시됐다. 그러나 지금은 바다 그 자체가 자원의 보고다.

바다를 중시해 바다로 뻗어나갔던 민족과 국가는 지금도 번영을 누리고 있다. 바닷길은 사람과 자원을 풍부하게 했다. 자연 나라는 강성해지고 나라살림은 풍족해졌다. 먼 옛날 한반도 사람들은 바다를 중시했다. 한반도 사람들은 고려 때까지만 하더라도 바다를 통해 쉽게 중국을 오가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본에 그 문물을 전하면서 영향력을 키우고 부를 축적했다. 바다를 다시 되찾아야 한다. 그래야 일본과 중국 등 해양강국의 도전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낼 수 있다. 바다를 중시해 바다로 뻗어나갔던 민족과 국가는 지금도 번영을 누리고 있다. 특히 전남은 ‘바다의 힘’을 키워야 한다. 전남의 미래는 바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다를 다시 우리 품으로 가져오자. 해양강국과 잘사는 전남의 여부는 바다에 있다.

도움말/강봉룡, 김경옥, 한국학호남진흥원, 국립광주박물관

사진제공/동원그룹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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