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74.순천왜성(順天倭城) 전투와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

순천왜성…임진 7년의 최후전투가 벌어지다

小西行長 성 쌓고 방어기지 삼아
정유재란 마지막 전투 벌어진 곳

조명연합군 고립된 왜군에 총공세
두 달 동안 陸·海에서 치열한 전투

明 진린 수행화가 왜성전투도 남겨
美 학자 전투도 사진 확보 후 공개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정왜기공도권>는 명나라 황실의 임진왜란 종군화가가 그린 것이다. 원본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전투도를 찍은 사진을 콜럼비아 대학의 게리 레드야드(Gari K. Ledyard) 교수가 확보해 1978년 공개했다.

■순천왜성

순천왜성(順天倭城)은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성이다. 정유재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축성했다. 성(城)은 튼튼하게 지어졌다. 성은 3면이 바다에 둘러져 있다. 서쪽 성만이 육지로 이어지는 곳에 세워졌다. 성곽은 다섯 겹으로 만들어졌다.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사이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垓字)를 만들었다. 해자에 다리를 놓아 필요할 때만 사용했다. 멀리서 보면 성과 육지가 다리로 연결해 놓은 모습이어서 ‘왜교성(倭橋城)’으로도 불렸다.

검단산성에서 바라본 순천왜교성 일대와 광양만.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과 진린 도독이 이끌던 명 수군이 왜교성을 공격했던 광양만 앞 바다는 매립돼 예전의 바다풍경을 찾아볼 수 없다. 전투가 벌어졌던 왜교성 앞 바다에는 율촌산업단지가 들어섰다.(조원래 교수의 <정유재란과 순천왜교성> 전투에서 발췌

순천왜성은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전라도 남부지역 지배를 목적으로 세운 성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공하면서 조선 남부에 성을 쌓도록 했다. 보급기지로 삼으면서 조선정벌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때 조선 남부 해안지역에 20개의 성이 지어졌다. 정유재란 때는 8개가 만들어졌다. 순천왜성은 정유재란 때 세워진 것이다. 전남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왜성이다.

순천왜성 주변 항공사진(조원래 교수의 <정유재란과 순천왜교성> 전투에서 발췌, 네이버 항공사진)

순천왜성은 1597년 음력 12월에 세워졌다. 면적은 18만8천여 m²(6만여 평)이다. 성곽 외성 길이는 2천502m에 달했다. 규모가 튼튼하고 방어시설도 치밀해 난공불락의 성으로 지어졌다. 성 중앙 가장 높은 곳에는 고니시 유키나가 등 왜장들이 정세를 살피며 전투를 지휘했던 천수각(天守閣)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성안에는 1만5천여 명의 왜병이 주둔했다. 성 동쪽으로는 방어시설과 함께 선착장이 마련됐다. 수백 여척의 일본전선이 출입하면서 군사와 물자를 실어 날랐다.

정유재란 당시 순천왜성은 전라도를 공략한 뒤 한양으로 진격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성안으로 들어가 방어전을 치른 곳이다. 순천왜성에서는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명연합군은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했고 일본군은 성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은 순천왜성을 격파하지 못했다. 성이 너무도 견고하고 저항이 거셌기 때문이다.

왜성 안쪽 전경.

1598년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 군사들의 신세는 말 그대로 ‘독 안에 든 쥐’였다. 순천왜성과 마주한 육지 쪽의 검단산성에서는 권율(權慄) 도원수와 유정(劉綎) 제독의 조명연합군이 벼르고 있었다. 성 앞 바다에는 이순신(李舜臣) 삼도수군통제사와 진린(陳璘) 도독의 조명연합 수군이 버티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고성과 부산, 남해에 있는 일본 왜군에 구원을 요청했다. 일본수군 500여척의 전선과 1만여 명이 노량앞바다로 몰려왔다.

이순신과 진린은 무수한 적들이 순천왜성 앞바다로 진격해온다는 첩보를 듣고 470척의 전선을 이끌고 노량 앞바다로 향했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노량에서 조명연합수군과 일본수군 사이에 대해전이 벌어졌다. 치열했던 전투는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조명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일본수군 전선 200척이 침몰 당했다. 왜장들은 가까스로 도망갔다. 이 와중에 고니시 유키나가도 남해도 외해를 통해 부산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조명연합군 순천왜성 육해상공격상황도.

그렇지만 이 노량해전에서 조선은 영웅을 잃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이 왜병이 쏜 총탄에 맞아 순절한 것이다. 낙안군수 방덕룡과 흥양현감 고득장, 가리포 첨사 이영남도 전사했다. 순천 왜성 전투는 정유재란의 마지막 대규모 육지전투였다. 조명연합 육군·수군 4만2천여명이 일본 육군·수군 2만5천여명과 사상 최대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의 연장선상에서 노량해전이 벌어졌다. 노량해전 또한 정유재란 마지막 해상전투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 왜장들이 조선에서 물러남으로써 임진왜란 7년 전쟁은 끝이 났다. 순천왜성 전투와 노량해전은 조선을 침공한 왜적들을 단 한명도 살려 일본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충무공 이순신의 결의에 의해 치러진 전투였다. 순천왜성과 왜성 앞 바다에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용장(勇將)과 수군 그리고 이름 모를 백성들의 충혼(忠魂)이 스며있다. 우리가 역사의 교훈과 함께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야할 장소다.

순천왜성에서 바라본 검단산성. 최혁 주필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의 왼쪽 봉우리가 검단산성이 있는 정상이다. 사진 중앙에 보이는 비닐하우스 일대가 순천외성의 가장 바깥쪽이었다. 사진 앞쪽의 울타리가 내성이 시작되는 곳으로 외성과 내성 사이에는 해자가 있었다. 해자자리에는 갈대만 무성하다.

한편으로 순천왜성 전투와 노량해전은 조선과 일본, 명나라가 사활을 걸고 최후의 일전을 벌인 국제적 전투였다. 명의 군사 중에는 중국이 전통적으로 오랑캐라고 불렀던 변방의 군사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신출귀몰해 귀병(鬼兵)이라고 불리던 묘족(苗族)과 섬라(暹羅·태국), 도만(都蠻·티베트), 능국(楞國·스리랑카), 면국(緬國·미얀마) 등의 병사들이 일본군과 싸웠다. 병사들의 출신만 놓고 보면 정유재란은 동북아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 각국의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맞붙었던 아시아 초유의 국제 전쟁이었다.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

1598년 9월부터 순천왜성과 왜성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는 장기간에 걸쳐 벌어진 매우 치열한 전투였다. 조선과 일본, 명나라 3국의 7만여 명에 달하는 육군과 수군이 생사를 걸고 싸운 공방전이었다. 순천왜성 전투는 정유재란 기간에 벌어진 최대 전투였다. 순천왜성 전투와 노량해전에 대해서는 난중일기 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런 기록을 통해 전투의 규모와 참상을 헤아려 볼 뿐이다.

순천왜성을 함락시키려는 조명연합군의 수륙 양면 공격과 이를 막아내려는 왜군의 분전은 대단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421년 전에 벌어진 일이라 전투장면은 상상만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 상상의 나래에 현실감을 부여할 수 있는 대단한 그림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명나라 황실의 임진왜란 종군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을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콜럼비아 대학의 게리 레드야드(Gari K. Ledyard) 교수를 통해서 1978년 공개됐다.

게리 레드야드 교수가 공개한 11장의 사진은 <정왜기공도권>을 촬영한 것이다. <정왜기공도권>원본 소장자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사진만 내놓았고 이를 레드야드교수가 세상에 밝힌 것이다. 한국에는 1978년 <신동아> 12월호에 게리 교수가 200자 원고자 75매 분량의 <임진정왜도의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을 기고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이 논문에는 노량해전과 왜교성 전투에 관련된 10여 매의 그림사진이 포함돼 있다.

조원래 순천대학교 명예교수는 <참전기록을 통해본 왜교성 전투의 실상>이라는 논문을 통해 <정왜기공도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왜기공도권>은 가로 650㎝, 세로 30㎝의 채색화로서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그려진 두루마리이며, 시간상의 순서에 따라 공간의 변화가 계속된 그림이었다는 것이 레드야드 교수의 분석이다. 그림 전체에 등장하는 사람은 약 4천400명인데, 그 가운데 일본군이 약 2천70명(840명은 시체이거나 물에 빠진 사람)이며 2천330명 가량이 조·명연합군인데, 그 중 113명 정도가 조선군이고 대부분은 명군을 대상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선박은 모두 235척인데 그 가운데 136척이 조·명연합군의 것(약 9척 정도가 조선군 전선)이고 99척이 일본군의 선박이라고 한다.

이 두루마리의 전쟁기록화는 레드야드 교수자신이 소지한 것도 아니고,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었다. 1960년대에 이 그림의 감정평가를 맡았던 미국의 한 교수가 찍어둔 한 세트의 사진을 자신이 복사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림의 원소장자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던 중국태생의 미국시민이었는데, 그 뒤 중개상을 통하여 홍콩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그 그림을 매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원래 교수는 레드야드 교수가 <정왜기공도권>의 전체적인 내용을 순서대로 7개 장면으로 나누어 개관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첫 번째 장면은 명수순 도독 진린의 대전선단이 1598년 7월에 고금도에 도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명군의 지휘관회의다. 조교수는 이 장면을 순천 왜교성 전투 직전에 조?명연합군의 육군과 수군 지휘관들이 참석한 작전회의로 보고 있다.

셋째는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방어중인 순천 왜교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조·명연합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격렬하게 공격을 쏟아 붓고 있는 장면이다. 넷째는 순천 왜교성 앞 바다에서 일본수군의 전선을 추격하는 조·명연합수군 을 묘사한 것이다. 조원래 교수는 이 장면에 대해 ‘1598년 11월 12~18일 사이에 왜교성 탈출을 시도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전선과 사천성에서 구원 온 도진의홍 휘하의 일본전선, 이들을 공격하고 추적했던 조·명 연합수군이 광양만에서 벌였던 해상전투 모습’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다섯째는 조·명연합군이 수많은 일본수군 전선을 포격해 격침시킴에 따라 불바다로 변한 관음포 모습이다. 즉 노량해전을 그렸다는 것이다. 여섯째는 남해왜성으로부터 일본군이 철수하는 장면이다. 일곱째는 관음포 해전(노량해전) 이후 조·명연합수군 일본수군을 소탕하는 모습이다.

레드야드 교수는 <정왜기공도권>을 그린 화가가 수군도독 진린을 수행했던 화가라 단정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그림 전반에 걸쳐 진린이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더구나 진린의 모습이 매우 강조돼 그려졌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조원래 교수도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다.

<정왜기공도권>에는 조선과 명나라의 장군들이 지휘관회의를 하는 장면부터 정유재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 모습까지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어떤 이는 <정왜기공도권>을 보고 ‘종이위에 펼쳐진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만큼 장면 장면이 생생하고 사실적이라는 말이다. 조선과 명, 일본 군사들의 움직임과 무기, 탄약, 깃발, 전선, 군마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 있어 마치 눈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정왜기공도병(국립중앙박물관)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2012년 <정왜기공도권>을 모티브로 해 제작된 병풍(정왜기공도병)을 영국 딜러를 통해 구매하기도 했다. 이 병풍은 전체 크기 174×374㎝로 6폭씩 두 점이 한 세트 로 구성돼 있다. 이 병풍에는 순천왜성 전투에 참가한 명의 제독 유정(劉綎) 휘하의 육상군과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 명 수군제독 진린(陳璘) 연합군의 합동작전 등이 순차적으로 배열돼 있다.

이 병풍 역시 정유재란 직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미상이다. 중앙박물관이 구매한 병풍은 순천왜성 전투 후반부에 속한 것이다. 병풍은 지난해 11월 영국 딜러를 통해 구매됐다. 전반부 장면이 그려져 있는 나머지 6폭의 병풍은 스웨덴 스톡홀름 극동아시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정왜기공도권>中 순천왜성 전투장면

정왜기공도권에 묘사돼 있는 순천왜교성과 성안으로 도주하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모습.
순천왜성전투도(서쪽 성문 도주하는 고니시유키나가를 확대한 것)
순천왜성전투도에 나타나 있는 3층 규모의 천수각.
고니시 유키나가.

<정왜기공도권> 두 번째 그림에는 순천왜교성 전체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다. 이 그림에는 순천 왜교성을 공격하고 있는 조·명연합군의 모습과 속임수에 빠져 자칫 죽을 지경에 놓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황급히 성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바다에서는 조·명 연합수군이 화포를 성안으로 쏘아대고 있으며 육지에서는 성을 넘기 위해 병사들이 성벽으로 돌진하고 있다. 고니시가 부하들과 함께 황급히 달아나는 모습이 그려진 곳은 서쪽 성문 쪽이다.

왜성안 왜군들은 필사적으로 전투를 치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긴박한 가운데도 대오가 정연하고 조명연합 군사들이 공격해올 만한 곳에는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 곳곳에 배치돼 있어 수성준비를 매우 치밀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새삼 느낄 수 있는 것은 순천 왜교성이 천혜의 성이라는 것이다. 공격을 당할 만한 곳이라고는 천수각이 있는 동쪽 바다와 서쪽 육지부분에 불과해 수성에 매우 유리하다.

순천왜성 성밖에 만들어진 해자. 바닷물을 끌어와 웅덩이를 만들어 공격을 쉽게 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해자 건너편에 두 개의 성곽이 있다. 해자를 건넌다 하더라도 또 세 개의 성곽을 거쳐야 지휘부가 있는 천수각에 이를 수 있는 방어구조다. 순천왜성이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알게 해준다. 레드야드 교수는 두 번째 장면의 그림을 정밀하게 분석한 뒤 그의 견해를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해안선 연해의 전함배치는 매우 생생하며, 순천 동남방 13㎞ 해안의 실제위치를 탐방해본 사람은 행장의 성채와 대치하여 일렬로 정렬해있던 전함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성내에는 왜장들의 (지휘를 받는) 많은 병사가 있다. (중략) 그림 속의 성곽과 순천의 실제 경관을 비교해보면 이 왜성이 얼마나 광대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6개의 동심원을 형성하며 싸여져 있는데 오늘날 유적지에 가보면 내성의 유적만을 볼 수 있다. 그림속의 광대한 성곽과 무겁고 거대한 돌들을 비교해보면 명군과 조선군이 이들 방어물을 깨뜨릴 수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성들은 결국 왜군이 철수함으로써만 함락되었다.’(조원래교수 번역)

특히 시선을 붙잡는 것은 우측 중앙의 성안으로 급히 도주하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부하들의 모습이다. 그림은 상황이 매우 급박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상황은 다음과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다.

사로병진책

‘명은 왜와의 강화협상이 깨지고 왜군이 1597년 2월 조선을 다시 침략(정유재란)하자 군사를 파견,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을 통해 왜군들을 조선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사로병진책은 명나라 군사의 최종 책임자였던 병부상서 형개가 입안한 전략이다. 명나라와 조선, 두 나라의 연합군을 네 갈래로 나눠 왜군을 공격한다는 작전개념이다. 이후 1598년의 정유재란 전투들은 모두 이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로병진 책에 따라 조명연합군 중 육군은 전라도 방면의 서로, 경상우도 방면의 중로, 경상좌도 방면의 동로 세 갈래로 진격했다. 수군은 서해와 남해로 이동했다. 1598년 9월 한양을 출발해 남원에 도착한 명나라 서로군의 제독 유정은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 등이 이끄는 조선군과 함께 9월 20일 순천왜성을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짰다. 그리고 고금도에 있는 수군에게도 이 같은 작전계획을 시달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유정은 9월 18일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편지를 보내 강화회담을 다음날인 9월 19일에 순천왜성 밖에서 갖자고 제의했다. 유정은 병사들을 미리 매복시킨 후 기패관(旗牌官) 왕문헌(王文憲)과 우후(虞候) 백한남(白翰南)을 각각 유정과 권율로 속여서 회담 장소로 보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회담 장소로 향했으나 명나라 군사기 실수로 미리 대포를 쏘는 바람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자신을 죽이려는 명의 술책임을 눈치 채고 순천왜성 안으로 급히 몸을 피한 것이다.’

유정은 매우 졸렬한 인물이었다. 강화를 빙자해 적장을 사로잡으려 한 것은 비겁한 일이었지만 기만전술이었다고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뇌물을 받고 왜군에게 퇴로를 열어주려 했다. 그리고 조명 연합수군이 바다에서 순천왜성을 공격해도 육지에 있는 조명연합 육군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군을 겁박해 왜군을 공격하지 말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정왜기공도권>의 순천왜성 공격 장면을 보면, 조명연합군은 공성(攻城)장비를 이용해 성벽 앞에 설치된 목책을 넘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조총의 사격과 화살로부터 군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로 짠 네모형태의 2층 높이 장대를 앞장세우고 있다. 왜군은 성벽 앞에 이중으로 목책을 두르고 성벽에 뚫어놓은 총안(銃眼)을 이용해 조명연합군에게 사격을 하고 있다.

순천왜성전투도. 조선수군이 화살을 날리고 있다. 조선수군 전선에 걸린 태극문양 깃발이 보인다.

바다에서는 성 쪽 해안으로 전선을 대려는 조명수군에 맞서 왜군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이 보인다. 바다에서 순천왜성을 공격하고 있는 전선 중 우측에서 두 번째 전선에는 태극문양을 기(旗)로 삼은 조선수군의 전선을 볼 수 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들은 왜군 병사들이다. 명의 화가가 그린 것인 만큼 명나라 군사들의 전공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일부러 그렇게 그린 듯싶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과 명나라 군사들의 피해도 매우 컸다.

왜교성 전투의 전개상황은 다음 회 <순천왜성 전투와 노량해전>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조명연합군의 순천왜성 공격은 실패한 작전이었다. 명나라 유정은 일본군을 섬멸할 의사가 없었다. 길을 열어주면 일본군이 철수하겠다고 하는데, 굳이 싸울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일본군이 뇌물을 갖다 바치면서 퇴로를 마련해달라고 사정하는 판인데 자신은 물론이고 부하들이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었다.

유정은 어떻게든 힘을 들이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원했다. 그래서 꾀를 써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생포하려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생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 순천왜성 전투가 시작됐지만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앞서 밝힌 대로 이순신과 진린 도독이 바다에서 왜성을 공격해도 수수방관했다. 바다에서 전력을 다해 싸워도 육상 군이 전혀 움직이지 않자 하급자인 진린 도독이 분개해 유정을 찾아가 항의하면서 수자기(帥字旗)를 찢어버릴 정도였다.

조선 관군과 의병은 왜군을 몰살시키고 싶었지만 명나라 유정이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고 미적거리고 있으니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이순신장군과 진린의 수군만이 전투다운 전투를 벌였다. 조명연합군 수군은 개전 첫날인 9월 20일 왜군의 해상기지인 왜성 동쪽 장도(獐島)를 장악해 군량과 마필을 탈취했다. 그리고 조선인 포로 300여명을 데려왔으며 왜적의 소굴인 삼일포를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조명연합군이 2개월 동안 벌인 순천왜성 전투의 목적은 왜성에 갇힌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 왜군 1만5천명을 섬멸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11월 19일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 다수의 왜군이 왜교성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왜군의 수성(守城)과 탈출 작전이 성공한 셈이다. 왜교성을 탈출해 조선에서 퇴각하는 왜군들은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인 노량전투에서 이순신 장군과 진린 도독에게 참패를 당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민족의 큰 별 이순신 장군도 전사하는 비운이 발생했다.

■왜군은 순천왜성을 어떻게 쌓았을까?

복원되기 전의 순천왜성 천수기단 모습.
왜교성 복원전과 복원후.
천수기단에서 내려다본 왜성 안쪽 전경.

정유재란 발발과 동시에 구례~남원을 거쳐 전주에 입성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왜군의 부대배치 계획에 따라 남해안으로 회군하거나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했다. 왜군은 전라도 50개 고을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통치에 들어갔다. 가등청정이 이끄는 일부 부대는 경기도를 향해 북상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구례를 거쳐 1597년 9월 1일 순천 왜교에 도착했다. 그리고 즉시 성 쌓는 일에 착수했다.

천수기단에서 바라본 율촌산단 전경. 정유재란 당시 조명연합수군이 왜교성을 공격하던 곳이다. 건너편이 광양제철소다.

순천왜성 축조는 9월초부터 시작돼 12월 2일에 끝났다. 불과 3개월 만에 대역사(大役事)를 끝낸 것이다. 그렇지만 순천왜성의 규모나 입지조건상 3개월 만에 축조를 끝낸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왜군은 순천지역의 사찰에 있는 승군과 백성들을 총동원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끌려와 성 쌓는 일에 투입됐는지는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러나 3개월 만에 끝낼 정도였다면 수천 명이 노역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 때 만들어진 성보류(城堡類)의 잔재를 이용해 성을 쌓았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고려 때 순천지역은 왜구들이 집중적으로 약탈을 벌였던 곳이다. 그런 만큼 고려 때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성이 그 이전에 순천왜성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교라는 이름이 정유재란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순천일대가 왜인들과의 접촉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도

<고려사>열전에는 왜인들이 고려조정을 협박해 식량과 땅을 제공받아 순천일대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우왕 초년에 왜의 등경광(藤經光)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장차 쳐들어오겠다고 큰 소리 치고 공갈하면서 양식을 요구해오니 조정의론이 순천·연기 등지에 나누어 두고 관에서 식량과 물자를 나눠주게 하였다’

왜인들이 살았을 장소는 배를 쉽게 몰수 있는 바닷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순천왜성이 세워진 그 일대가 왜촌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교라는 이름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14년 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1999년 순천 해룡과 여수 율촌을 잇는 도로공사를 위해 분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1583년에 만들어진 지석이 발굴됐는데 이 지석에 ‘왜교촌’(倭橋村)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매립사업이 시작되기 전의 장도 일대 모습.

도움말/조원래, 김세곤, 박명희

사진제공/기경범, 조원래, 순천시청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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