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시작
나선희(스피치커뮤니케이션즈 대표)

설 황금연휴를 누리고 또 휴일을 보내며 이번 설은 평화롭게 보냈구나 생각했다. 이십여 년 동안 시댁을 가든 친정을 가든 크고 작은 사건과 상황들로 심기가 편치 않았었다. 이유는 거의 관계 문제였다. 명절인데 이 정도밖에 안하나? 서로에 대한 기대치를 두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혼자 끙끙거리기도 하고, 눈치를 주기도 하고, 대화를 시도했다가 오히려 상처를 받으며, 마음의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를 이십여 년. 이런 저런 시도들을 거쳐 결국 평화를 찾게 된 거다.

그러고 보면 갈등은 노력에 의해 해결된다. 가만 두면 해결되지 않는다. 뭐가 그러느냐, 굳이 애쓸 필요 없다, 세월이 약이다, 피를 나눈 형제인데 다 풀리게 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덮어두었다가는 골이 깊어져 더 심각한 상황까지 치달을 수 있다. 옛날에야 미우나 고우나 같은 동네에서 부대끼며 살다가 화해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만나려 애쓰지 않으면 평생 안보고 살 수도 있다. 실제로 일 년에 한 두 번 보는 가족에 비해 하루에 한 두 번씩 보는 이웃이 더 가깝지 않은가. 자주 보아야 한다.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말이 안 통해서 또는 싸우기 싫어서 입을 닫아 버리면 절대로 풀 수 없는 것이 관계다. 대화가 없는 관계는 언뜻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평화로 위장된 지뢰밭과 다름없다.

나에게 이번 설이 평화로웠던 것은 연로하신 엄마가 여러모로 좋아졌기 때문이다. 사 오년 전, 엄마는 경미한 치매 증상을 보이셨다. 정신줄이 예전 같지 않음을 감지한 엄마는 적응을 못하고 소란을 피우셨다. 어떤 날은 불같이 성을 냈다가 금방 웃으셨다. 예전의 엄마가 아니었다. 자식들도 엄마의 변화에 적응하기 힘든 상황에서 갈비뼈까지 부러져 아예 드러눕게 되었다. 병원에서 하도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요양원으로 가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 사남매가 선택한 것은 ‘헌신’이었다. 평생 자식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린 억척 엄마였으니 우리도 한 번은 해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와 교대로 수발을 했다. 일으켜 세워 대소변을 처리하고 밥을 떠먹이는 생활을 6개월 쯤 하자 기적처럼 호전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남매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했다. 각자 가정을 꾸리고 사느라 소원해졌던 관계가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어머니를 두고 애쓰는 모습이 측은해 서로를 배려하다보니 어린 시절의 우애가 되살아났다. 덕분에 어머니는 외출에 제한을 받긴 해도 건강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내가 가도 어서 집에 가서 쉬라고 등을 떠밀 정도로 안정되어 있다. 불과 2년 전만해도 못 가게 붙잡는 바람에 애를 떼놓고 돌아온 심정으로 눈물을 쏟곤 했었다.

애착관계가 잘 형성된 80대는 그렇지 않은 80대보다 더 건강하고 기억력도 좋다는 하버드 대학의 연구 결과가 있다. 로버트 월딩어 교수는 TED 강연을 통해 좋은 관계는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뇌도 보호해 준다고 말한다. 사회적 연결 무척 중요하며 고독은 해롭다는 것이다. 실제로 활동적이고 낙천적인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것도 외로움에서 비롯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자식들은 다들 자기 살기 바빴다. 엄마는 늘 잘 지내는 줄로만 알았었다. 어쨌든 엄마는 사남매가 당신에게 쏟은 사랑으로 회복했다. 기억력도 좋아졌다. 로버트 월딩어 교수의 말을 입증한 셈이다.

좋은 관계가 좋은 삶을 만든다니 어서 주위를 둘러봐야겠다.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서로 다르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식이 보고 싶어 목 빼어 기다리는 부모, 한창 활동할 나이라 부모는 뒷전인 자식의 입장 차이.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며느리가 시댁에서 돌아오는 딸을 맞이하고 천천히 친정에 가길 바란다. 며느리는 당신 딸도 친정에 왔는데 난들 친정에 안 가고 싶겠냐는 입장이다. 이왕 황금연휴이니 징검다리 이틀마저 쉬어버렸으면 하는 직원, 그렇잖아도 짧은 2월인데 제대로 근무해야지 무슨 소리냐는 오너. 이런 모든 갈등은 각자의 입장에서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시작된다. 빨리 와줬으면(자식에게), 늦어도 이해해줬으면(부모에게), 좀 더 있다 갔으면(며느리에게), 빨리 보내줬으면(시어머니에게)하는 식이다. 바라는 대로 해주면 좋으련만 상대가 내 마음과 같지 않으니 괴롭다. 상대가 내가 바라는 대로 해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내 마음을 바꾸는 것이 훨씬 빠르고 쉽다. 인생 후반기를 맞고 난 후 마음이 급하다. 인생 길지 않다. 상대를 바꾸려하기 보다 나를 먼저 보는 것이 맞겠다. 그러고 보니 관계의 시작은 나다. 나와 잘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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