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어깨 위에서
문상화(광주대학교 교수)

이제 내일이면 우수(雨水)다. 봄의 시작을 알린다는 입춘도 지나고 개구리가 잠에서 깬다는 경칩이 멀지 않았으니, 지금 온몸을 감싸는 바람이 차다고 해도 머지않아 봄은 올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봄이 오는 것을 가장 극적으로 느낀 때는 부활절 방학 무렵이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을 짓던 나무들이 부활절을 전후해서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연녹색 잎을 틔우고,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마치 자연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봄이 왔음을 알렸다. 다시 태어난다는 부활절 축제를 보면서 이제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 것을 느끼곤 했다.

부활절에 비하면 우리의 봄은 이른 감이 있다. 입춘이 봄의 시작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생명의 기운을 느끼기에는 빠르고, 부활절과 비슷한 시기의 청명은 봄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조상의 묘소를 떠올리게 한다. 한겨울을 힘들게 지낸 묘소를 손질하다가 등에 따뜻한 햇살을 느끼면 ‘이제 봄이 왔구나’ 하고 느낄 수야 있겠지만 청명에 봄을 느낀다는 것은 어딘지 어색하다.

우수가 미지근하다고 해서 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은 벚꽃이 만개해야만 봄이 왔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은 우리의 발밑을 소리 없이 흐르다가 우리의 시선이 멈춘 곳에서 비로소 지상으로 올라온다. ‘봄이 왔나?’ 라는 순간 주변은 온통 신록과 봄꽃으로 뒤덮이는 것이다.

발밑으로 흐르는 봄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봄은 인간사와 무관하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아직 부끄러움을 타는 초여름을 소개하기도 하고,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겨울을 땅위로 끌어당기기도 한다. 장난꾸러기 같은 봄을 향해 우리는 봄이 꽃을 시샘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얘기도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올봄이 작년 봄이 땅속에 엎드려 있다가 그대로 다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올봄이 우리에게 오기 위해서는 겨울을, 가을을 그리고 여름을 지나와야 했다. 그러한 과정이 없었다면 올봄은 우리에게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겨울을 지나지 않은 봄은 진정한 봄이 아니기에 자신에게 자리를 내주는 겨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신을 따라오는 여름을 소개하고 다시 땅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말에 원년(元年)이라는 것이 있다. 노사합의 원년이라느니, 평화와 번영의 원년이라느니 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말들이 수시로 언급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문이 되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하는 뜻에서 원년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과연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 의문이 든다.

런던에 처음 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민박집의 화장실 천장에 달린 줄 스위치였다. 편리한 벽스위치로 바꾸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불편이 없어서 그냥 쓰고 있다는 단순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을 통해 삶은 조금 불편해도 참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훈련이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편리를 위해서라면 스위치를 벽에 설치하는 것이 맞겠지만 천장에서 내려온 줄 스위치를 당기면서 부모님의, 그리고 부모님의 부모님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은 지나간 것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전부 없앴다면 새로운 시작이라는 이름으로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다. 멀리 보려면 거인의 어깨 위에서 발돋움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운좋게 거인의 어깨 위에 올랐다면 거인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자신의 어깨를 빌려주어서 더 멀리 볼 수 있게 해준 거인에게 감사해야한다. 거인의 어깨가 없었다면 바로 코앞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을 깨닫지 못하고 거인을 가볍게 여긴다면, 거인이 화를 내고 어깨에서 내팽개칠 것이다. 그게 인간사의 이치이고, 봄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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