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77 2부 4장 만포첨사<277>

선조가 의주를 떠난 것은 1593년 4월 하순이다.

왕은 망명지나 다름없는 북풍 몰아치는 의주땅에서 변변한 수라상마저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으니 몸이 몹시 상했다. 그동안 몸이 비대해서 그 자체로서 의젓하고 권위가 있었지만, 살이 쭉 빠지니 한없이 초라하고 꾀죄죄해보였다. 이런 왕을 바라보는 신하들은 얼마나 나라 걱정에 시달렸으면 저 지경이 되었을까 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나라의 지어미인 왕이 백성들 안위를 걱정하며 고민하는 모습은 일견 고마우면서도 신하들로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잘못 모셔서 그러는 것으로 알고 언제나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생각이 달랐다. 그런 것들이 아무 쓸모짝없는 아첨으로만 비쳐졌다. 입으로 해결되는 거 보았나? 그저 걱정 태산, 아첨 풍년, 변명 또한 책 한권일 뿐이다. 의심과 불신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그래서 불안하다. 근래는 일본 무사들이 칼을 빼들고 침소로 달려드는 꿈을 꾸고 뻑 고함을 지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이럴 때의 처연한 고독감. 그런데도 어느 누구 하나 그것을 위무해주는 자가 없다. 몸은 식은땀으로 목욕을 하고, 머리는 띵하고, 육신은 곤죽이 되어있는데 그것을 그 혼자 감당해야 한다.

왜놈들이 남으로 패주하고 있다고 하지만 도처에서 복병이 나타나 세를 모아 습격하면 꼼짝없이 당할 것이다. 저런 히리삐리한 호위병이나 보군(步軍)이 왜놈 칼을 막을 수 있겠는가. 결국 당하는 것은 자신이다. 인생 목표가 적어도 고희를 넘길 때까지 사는 것으로 잡아놓았는데, 꼴을 보니 오십 넘기기도 힘들 것 같다. 지금 나이 마흔하나, 재위 26년차로서 하룻밤에도 후궁 서넛을 꿰찰 힘이 있는데 일년 사이 너무 폭삭 늙어버린 것이다.

이때 충신 이항복이 나타나 입성을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상한 몸을 갱신하려면 일단 의주를 뜨고, 환도 길에 북선(北鮮)의 음식맛을 보면서 가자는 것이다. 한양 상황을 살피면서 소풍가듯 삼라만상을 살피며 산해진미를 맛보며 가다 보면 그 자체로서 즐거움이요, 그러다가 어언간에 한양에 도달할 것이다. 백번 생각해도 옳은 말이다. 명색 임금이 변경에 계속 죽치고 있다는 것도 체모에 관한 문제다.

“가면서 왜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렸다?”

“물론입지요. 숨을 곳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가는 도중 동림에 이르러서 선사포의 정충신 첨사를 부르면 상감마마 입이 풍성해질 것이옵니다.”

선사포는 내륙으로부터 귀가 빠져있고, 곽산이라는 산을 넘어야 하니 그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려면 몇날을 지체해야 한다. 그래서 파발을 띄워 모일 모시에 동림으로 나오도록 조치해두었다. 어가는 벌써 용천을 거쳐 염주땅에 이르렀다.

“우리의 조공선이 선사포에서 출항하여 가도를 거쳐서 중국 등주(登州)에 상륙하면 거기서부터 육로로 조공품을 운송하여 북경에 이릅니다. 사신들의 사행(使行) 길이 이 해로를 타니 고생입니다.”

“사행단의 규모가 크지 아마?”

“사행단의 규모는 서른명입니다. 정사, 부사, 서장관(書狀官), 역관, 의관(醫官), 화원(?員) 등 정관(正官) 30명으로 구성됩니다. 전에는 육로로 많이 갔지만 누루하치 세력(후금)이 요동반도를 분탕질하기 때문에 바닷길을 열어서 가고 있습니다. 요동반도 패거리들까지 설치니 해로를 택할 수밖에 없나이다. 앞으로 앞으로 선사포를 큰 군항요충지로 키워야 할 것같습니다.”

”북은 오랑캐, 남은 왜적 무리...“ 왕이 투덜거렸다.

“거기에 명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만 중간에서 멍석말이가 된 형국이지요.”

“명에 대해선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그건 불충이다. 너는 잘 나가다가 실수를 한단 말이다.”

이항복이 말을 돌렸다.

“선사포 생물을 준비하겠습니다. 기병이 빨리 달려오면 물건이 상하지 않을 것이니 회를 뜰 수 있나이다.”

한편 정충신은 선사포 바다 건너 가도와 탄도 사이의 물골을 막았다. 해적들의 퇴로를 막고 소탕할 작정이었다. 그는 가도 선창에 올라 주막을 찾았다. 주막의 아낙이 떨고 있었다.

“다 가져가버렸습니다. 그자들이 또 여자를 찾지요. 여자가 씨가 말랐는데 대주지 않으면 목을 친다 했습니다. 오늘 저녁엔 두목이 내려온다는군요. 이거 죽을 지경이구만이오.”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가 대적할 것이오.”

“그런 말 마시오. 당신들은 떠나버리면 그만이지만 여기 사는 우리가 그 보복을 어떻게 감당하게요.”

정충신은 완전 청소를 하기 전에는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얌전해보이는 병사 넷을 여장으로 변복토록 하고, 졸지에 술집 작부로 만들었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