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행옥 변호사의 호남정맥 종주기
(7) ‘가죽재-곰치재’ (2018. 10. 9)

주화산 오르니 금남-호남 정맥 분기 표지판 반겨
등산로는 사람 발자국 희미…잡목숲과 구분 없어

정맥길도 호남인 다니지 않으면 없어져 버릴 듯
웅치전적비 안내표지판 따라가면 곰치재 다다라
임진왜란때 나라지킨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 간직

호남정맥과 금남정맥 분기점인 주화산에서 바라본 능선들. 멀리 전북 전주시가지가 보인다.
주화산 정상에 세워진 호남정맥과 금남정맥 분기 표지판.
주화산 오르는 길에 만난 봉분들. 먹이를 찾는 멧돼지들로 봉분이 훼손돼 있다.해
곰치재 가는 길에 세워진 웅치전적비.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려는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간직하고 있다.

찌는 듯한 여름의 더위에 산행을 잠깐 중단한 것이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었다. 오늘은 사실상 금남호남정맥을 마무리하고 진정한 호남정맥 1구간을 시작하는 산행을 해야 한다.

10시 20분쯤 지난번에 하산한 오룡고개에 이르러 차를 농로에 주차하고 앞을 살피니 ‘가죽재(해발 370m)’라고 쓰여진 큰 팻말이 보인다. 앞으로 모든 지명을 변경된 명칭으로 쓸 생각이다. 예전의 지명은 나이 드신 택시기사분들은 알지만 새로 호남정맥을 타려는 정맥꾼에게는 헷갈릴 수가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정맥 길을 찾아드는데 5분여를 측백나무 가지들이 뺨을 때린다. 사람들의 발자국이 희미하니 잡목 숲과 구분이 어렵게 된 것이다. “우정은 산길과 같아서 자주 다니지 않으면 없어져 버린다”는 문구를 본 적이 있는데, 호남정맥 길도 호남인들이 다니지 아니하면 없어져 버릴 것 같다.

10분 정도 가니 정맥 길이 환하게 드러나는데 이제부터는 상당한 급경사길이다. 30분 만에 500고지를 넘어서면서 초벌 땀을 꽤나 쏟았다. 길섶에는 구절초들이 무리지어 가을의 향취를 선사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 색깔이 마음 한군데를 애잔하게 한다. 군데군데 보이는 묘지들이 꼭 해병대 상륙머리 같아서 자세히 살펴보니 멧돼지들이 봉분둘레를 파헤치다 보니 모양이 변한 것이다.

멧돼지들이야 띠뿌리 등 달콤한 풀뿌리를 캐먹기 위해 벌인 일이나 묘지를 관리하는 후손 입장에서는 열불이 날 일이다. 그러나, 다시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어차피 흙으로 돌아간 몸을 감싸는 봉분이 좀 허물어진들 어떠랴. 어찌 보면 우리식 매장이야말로 제일 친환경적인 장묘문화라고 볼 수도 있겠다. 몇십 년 지나서 찾는 이가 없어지면 봉분도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다시 산의 일부가 되고 마니까.

산행 시작한지 1시간 만인 11시 28분경 해발 622미터인 턱골봉에 다다랐다. 이곳에는 표지석은 없고 누군가가 노란리본에 ‘622m 산봉’이라고 써 놓았을 뿐이다. 산행지도에는 위 산이 665봉으로 나타나 있다. 턱골봉을 지나고는 계속 오르락 내리락을 거듭하면서 정맥이 이어 나간다. 지도상으로는 높이를 알 수 없지만 ‘준·희’라는 사람이 ‘620.9 금호남정맥’, ‘635고지’라고 리본을 달아놓은 고지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12시 30분경 모래재 휴게소로 통하는 고갯길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도상에는 주줄산이 금강정맥과 호남정맥의 분기점이라고 나와 있는데, 팻말에는 ‘주화산(조약봉) 0.22㎞’라고 쓰여져 있다. 2004년에 나온 월간 산 별책부록인 ‘실전 호남정맥 종주산행’ 책자와 지도를 가지고 산행을 하다 보니 벌써 산 이름과 고개이름이 바뀐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궁금증에 2∼3분 만에 주화산 조약봉에 오르니 여기가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의 분기점이라는 커다란 T자형 표지판이 나를 반긴다. 백두대간과는 달리 거북이 산행을 하다 보니 눈 내리는 벚꽃 길에 장안산에서 시작한 산행이 오늘에야 분기점에 다다른 것이다. 잠깐의 감상과 사진촬영을 마치고 호남정맥 쪽으로 몇 걸음 걷다 보니 헬기장이 나오고 그 옆에 데크로 잘 조성된 전망지점이 있다.

지난주의 가을비로 깨끗이 물청소된 데크 위에서 가져 온 도시락을 꺼냈다. 밥맛이 너무 없어 밥은 절반쯤 남기고 아침에 삶아온 계란 두 개와 연양갱으로 나머지 식사를 대신했다. 데크에서는 전주시내의 아파트단지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보인다. 모래재 터널로 난 지방도가 옛날에 전주와 진안을 잇는 최초의 신작로라고 하니 전주가 코앞에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점심을 먹고 나니 날씨도 맑아져서 기온도 올라서 오전의 쌀쌀함이 많이 가셨다. 14:00경 죽전치에 이르렀다. 죽전치 근처에는 산죽 우리말로 조릿대가 많이 우거져 있다. 오죽했으면 죽전이라고 이름을 붙였겠는가. 다만 대밭고개라고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섬진강의 발원지가 데미샘인데 그 위에는 천상데미란 봉우리가 있다. 어릴 때 윗마을을 ‘우데미’, 아랫마을을 ‘아래데미’라고 했었는데, 아마 천상데미는 하늘 위의 마을이란 지명이 아닐는지. 결국 데미샘은 천상데미샘의 약자로서 하늘마을샘이라고 풀이하면 될 것 같다.

계속 완만한 경사에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시속 2.4㎞를 넘기더니 14:20경 오늘의 마지막 봉인 563고지에 다다랐다. 스스로 내 걸음에 만족한 순간 한순간의 방심이 고난을 자초하고 말았다. 563고지 바로 지나 오른쪽에 리본이 수 십개 달린 하산로가 있는데, 눈 번히 뜨고 이를 놓친 채 그대로 직진하고 만 것이다. 짐승도 기어오르기 힘든 벼랑길을 내려가며 호남정맥 리본이 하나도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기며 10여분을 내려가니 갑자기 길이 끊기며 앞에 봉우리가 나타난다. 내친 김에 봉우리에 올라 지도와 트랭글을 꺼내 살피니 아뿔사 지금 나는 세동리 방향으로 하산 중에 있는 것이다. 갖은 꾀를 부리다가 다시 563고지로 발길을 돌려 방금 봉우리를 내려와 다시 힘든 오르막길을 오른다. 도중에 산 모양을 살피니 옆구리로 돌아가면 정맥 길이 있을 것 같은 판단이 든다. 산짐승이나 다녔을 옆구리 비탈길로 5분여를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여 옆 능선에 다다랐으나 여기도 정맥 길은 아니다.

허탈한 마음에 다시 산을 오르니 산 정상 부근에 아까 내려 온 563고지로 오르는 비탈길이 보인다. 40여분의 알바 끝에 거의 탈진 직전에 이르러 잠시 낙엽 위에 앉아 하바로프스크에서 사온 잣을 꺼내 한 움큼 씹고 물을 두 컵 정도 들이키고 나니 겨우 몸이 회복된다. 천신만고 끝에 563고지에 이르니 왼쪽에 아까 놓친 리본들이 수 십개 보이고 비단길 같은 곰치재로 이르는 하산로가 환히 드러난다. 대간길이나 정맥 길에서 길을 잃으면 반드시 길을 놓친 곳으로 짐작되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잔꾀를 부리다가 더 고생만 한 셈이다.

563고지에서 5분여 내려가니 왼쪽에 큰 흑염소 목장이 있다. 정맥 길을 따라 펜스가 설치되어 있는데, 꽤나 큰 목장이 조성되어 있다. 멀리 흑염소 무리의 모습을 보면서 길을 재촉하는데 이쪽 길에는 웅치전적비 안내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서 그 표지판만 따라가면 곰치재에 이른다.

마지막 600고지를 타고 무사히 완주한 것에 안도하며 계단으로 조성된 하산로를 지나 5분여 만에 웅치전적비에 다다랐다. 웅치전투는 임진왜란 때 전주성을 침공하러 온 왜장 고바야키와 타카키게가 이끄는 일본군을 맞아 의병장 황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과 해남 현감 변응정 등이 거의 전멸당하면서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 전투라 한다. 왜군 또한 이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고, 인근 인림원 전투에서 황진에게 패배하면서 전주성을 도모하려는 뜻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니 웅치에서 산화한 선열들이 이 강산을 지킨 셈이다,

하산하여 트랭글로 확인해 보니 산행개시 시각은 08시 26분, 끝난 시각은 오후 4시 22분, 운동시간은 5시간 16분, 운동거리는 13㎞로 나와 있다. 백두대간 1구간이 보통 25㎞에서 30㎞가 되는 것을 감안해 보면 절반 정도 되는 거리를 걸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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