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78. 3·1만세운동과 광주·전남

<上. 3·1만세운동과 광주>

1천여 명 광주 학생·백성들 목 터져라 ‘대한독립만세’

최원순·남궁혁·황상호등 거사준비
나팔 신호로 큰 장터인파 ‘만세~’

여학생들 한복 뜯어 태극기 만들고
제중원 직원은 격문·노래 인쇄 배포

1천여 명 시위군중 태극기 흔들고
독립가 부르며 광주경찰서로 집결

애국지사·어린학생·주민들 모두 동참
일본 경찰·헌병 잔혹하게 무력진압

수피아 여학생 팔 잘려도 계속해 만세
광주지역 3·1운동 유적지 잘 관리해야

 

3·1만세운동으로 투옥됐던 수피아학교 학생들.(1920년대)
앞줄 왼쪽부터 고연홍, 김필호, 기숙사도우미 최수향, 이봉금, 뒷줄 왼쪽부터 강화선, 이나열, 최경애, 양태원. 감옥에 갇혀 있다가 같은 날 출옥했다.

■3·1 조선독립만세운동 의의

1919년 3월 1일부터 수개월에 걸쳐 벌어진 조선독립만세운동은 일본 제국의 한반도 강점에 맞서 조선민족이 펼친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조선 각지는 물론이고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조선 백성들은 신분과 계층, 종교와 이념, 학식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두들 조선 땅에서 일제가 물러나기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3·1 조선독립만세운동은 거족적인 비폭력 일제 저항운동이었다. 조선민족은 독립선언을 통해 폭압과 수탈을 일삼는 일제에 저항했다. 일제는 만세운동이 조선팔도로 번지자 강경진압에 나서 무차별 살상을 저질렀다. 일제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조선백성들을 체포, 고문해 죽이거나 심지어 마을주민들을 한 곳으로 모은 뒤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수십 군데에서 자행했다.

3·1 독립만세운동은 조선민족의 민족혼에 불을 지폈다. 조선이 일제의 통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민족적 각성의 계기가 됐다. 3·1운동은 해외의 독립군창설에 불을 지폈으며 대한민국의 모체(母體)인 상해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해 독립 후 건설할 국가로 민주공화국을 천명했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제정된 건국강령, 임시헌법 등은 1948년 제헌 헌법의 초안에 대거 반영됐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의 원형이 되고, 이들 건국강령과 임시헌법은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됐다. 1919년 3월 1일의 만세운동과 4월11일의 임시정부수립을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의 초석으로 여기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1919년의 독립선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기미독립선언이 일어난 직후 1920년대까지는 ‘3·1 운동’, ‘3·1혁명’, ‘만세운동’ 등이 사용됐다. 그러다가 1930년대 국권회복투쟁이 격렬해짐에 따라 ‘3·1혁명’이란 표현이 더 널리 사용됐었다. 당시 민족진영은 3·1운동의 성격이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상해임정수반을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은 3·1운동을 통해 군주제라는 과거 틀을 벗어나 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국가체제 틀이 마련된 만큼 ‘혁명’의 성격이 강하다고 주장했었다. 3.1운동의 초기 성격은 일제 식민지배에 대항해 조선백성들이 분연히 일어난 독립선언이지만 결과적으로 ‘민주공화국’으로의 전환을 가져온 사건인 만큼 ‘혁명’의 범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부여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확산되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 역시 지난 2018년 12월 14일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전체회의에서 ‘3·1혁명’이라는 용어를 언급했었다. 동학농민운동 역시 동학농민혁명으로 명명되고 있는 점을 들어 앞으로는 ‘3·1혁명’이라는 용어가 ‘공식화’될 가능성이 높다.

3·1운동은 조선의 독립운동에 일대전기가 됐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인도 등의 독립운동 발흥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일제의 통치에 신음하고 있던 중국인들은 조선에서 벌어진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5·4운동을 전개했다. 일부에서는 3·1운동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가 간디를 중심으로 비폭력저항운동을 펼친데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3·1운동의 규모와 일제의 탄압

광주시 남구 수피아여고 교정에 있는 광주3·1만세운동기념탑. 옆면에 옥고를 치른 여학생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국사편찬위가 2019년 2월 20일 발표한 ‘3·1운동 100년 기념 데이터베이스 구축’ 결과에 따르면 1919년 3~4월 전국에서 일어난 시위와 파업, 휴학 등은 모두 2천464건이다. 이중 시위는 1천692건으로 집계됐다. 3·1운동 시위 참가 인원은 최소 80만~최다 103만명이며 사망자는 최소 725~최다 934명에 달한다. 당시 조선에는 220군(郡)이 있었는데 95.9%인 211개 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3·1운동에 대한 규모나 참여 인원, 사망자 등 기본 통계는 박은식 선생이 지난 1920년 작성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나 일제가 작성한 자료를 참고하거나 인용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전국에서 벌어진 시위가 1천542건으로 기록돼 있다. 시위인원은 약 200여만 명이며 7천509명 사망, 1만5천850명 부상, 4만5천306명이 체포된 것으로 나타나있다.

또 일제의 잔인한 진압과정에서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일제는 시위참가자들을 잔인하고 혹독하게 다뤘다. 조선에 있었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일본 경찰과 헌병이 만세시위에 참가한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발가벗겨 연행하고 구타하는 것은 물론 성적(性的)으로도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위에 알릴 정도였다.

일본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848회에 달했던 조선독립만세시위에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하고 1만2천명이 체포됐다고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이번 국사편찬위의 조사에 따라 시위참여자와 사망자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편찬위는 일본 육군성 자료인 ‘소요사건관계서류철’(騷擾事件關係書類綴)과 조선총독부의 ‘소요 사건에 관한 도장관(道長官) 보고철’ 등을 참고했다.

또 일제가 남긴 시위참여자에 대한 각종 판결문과 재한(在韓) 선교사 자료 등 3·1운동 관련 1차 자료 2만1천407건을 검토해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했다. 국사편찬위의 조사에 의해 3·1운동의 규모와 전개양상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우리 역사교과서의 기술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기술과 관련해 지금까지의 한국 교과서는 일제가 남긴 기록을 참고로 해 저술됐다.

국사편찬위의 조사결과 3·1운동은 3월 1일 이후에도 수개월동안 전국 211군에서 벌어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었다. 일반 백성은 물론이고 어린 학생들과 유림, 종교지도자, 부녀자, 심지어 기생들까지 모두 조선독립을 위해 일어섰다. 운동형태도 다양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장터에서만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산과 섬에서 불을 피우는 한편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산상 횃불 시위’가 이어졌다. 농민과 어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어린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는 향후 조선의 독립운동이 치열하고 광범위하게 전개된 배경으로 작용했다. 서울에서 벌어진 3·1만세운동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평안도와 함경도 등지에서 곧바로 이어진 것은 기독교와 천도교 등 종교 세력이 만세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도 3·1운동의 특징이다.

■광주지역의 3·1만세운동

<전남역사이야기> 107회 ‘2·8독립선언과 최원순 선생’편에서 3·1 운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적은 바 있다. 그리고 광주 출신 최원순 선생이 2·8독립선언이 이뤄질 수 있도록 구심점 역할을 했던 사실에 대해서도 소개했었다. 2·8독립선언에는 최원순선생과 함께 화순 출신 정광호(明治大, 광복 후 광주시장과 제헌국회의원을 역임) 선생 등이 핵심역할을 했다.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던 정광호 선생은 2·8독립선언문을 몰래 숨겨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서울로 가서 광주출신 김범수와 김기명 등 호남출신 학생들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배포해줄 것을 요청했다.

광주천 부동교 아래 작은장터.

또 장성으로 내려가 친지 김기형의 집에서 일경의 감시를 피해 독립선언서를 대량으로 인쇄했다. 최한영과 김복수 등이 독립선언문을 등사해 배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광주지역의 3·1 운동이 조직적으로 이뤄진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최원순 선생이 경성고보사범과 학생이었던 시절에 만든 계몽단체 ‘광주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신문잡지종람소’는 최한영을 비롯 최춘열, 강석봉, 이이동 등이 참가해 조선백성들에 대한 계몽활동을 펼치던 단체다. 최원순 선생이 경성고보 사범과 졸업을 한 달 앞두고 벌어진 교내 항일사건으로 퇴학당한 뒤 1916년 만주로 건너가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학교 설립에 몰두하면서 잠시 활동이 중단됐으나 2·8독립선언문 광주반입과 인쇄, 광주만세운동 준비과정에서는 회원들이 대거 참여해 광주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1920년대 부동교 일대 모습.

광주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0일(음력 2월 9일)에 일어났다. 3월 6일 김철 등 10여명의 명인사와 기독교인들은 양림동(당시는 양림리)의 남궁혁(南宮赫)장로 집에 모여 거사일을 광주의 큰 장날인 3월8일로 잡았다.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과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 등도 거사준비에 동참했다.

박애순 교사의 지시로 수피아교 학생들은 고종황제 인산 날 입었던 소복을 뜯어 태극기를 만들었다. 학생들은 밤새워 학생 한 사람당 10매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준비에 차질이 있어 거사일이 광주의 작은 장날인 3월 10일로 늦춰졌다. 마침내 3월 10일 오후 2시 숭일고 학생이 사직공원에서 나팔을 불었다. 만세운동을 시작하자는 신호였다.

작은장이 있었던 부동교에서 큰 장이 있었던 광주천과 양동시장을 바라본 모습(2019년).

당시의 광주 큰 장은 구 현대극장 아래쪽의 천변이었으며 작은 장은 지금의 부동교 일대였다. 나팔소리를 신호로 숭일학교와 수피아학교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최병준과 박애순 교사의 지시에 따라 숭일학교와 수피아교 학생들은 미리 준비해온 선언문과 태극기를 작은 장을 보러온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큰 장이 들어섰던 광주교 일대. 직강공사로 둔치가 없어져 버렸는데 큰 장은 넓은 둔치에서 열렸다.

양림동 일대 동네사람들도 만세를 부르며 합세했다. 또 한쪽에서는 농업학교 학생들이 몰려왔다. 지산면 일곡리와 생룡리의 이씨와 범씨, 노씨 문중 사람 상당수가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순식간에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1천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손에 ‘조선독립만세’라는 글이 쓰인 흰 깃발이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노래(獨立歌)를 불렀다.

최한영 선생이 구술한 시위당시의 노랫말은 아래와 같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독립성(朝鮮獨立聲)/십년을 참고 참아 이제 터졌네/삼천리 강사에 이천만 민족/살았구나 살았구나 이 한소리에/만세 만세 만만세요 조선독립 만만세라’

만세행렬은 광주천변과 북문통(지금의 충장치안센터 부근)을 돌아 광주경찰서(옛 충장서점:지금의 광주우체국 건너편)로 몰려갔다. 일본 헌병과 경찰은 무력진압에 나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곤봉에 맞고 칼에 찔려 피투성이가 됐다. 이곳에서만 100여명이 체포됐다. 광주읍성 사람들과 학생들은 광주경찰서에서 잠시 물러났다. 그러나 다음날 인 11일과 큰 장날인 13일에 다시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큰 장날이었던 13일의 시위에는 1천여 명이 참가했다.

조선독립광주신문.

서울에 이어 광주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은 인근 지역에 곧바로 알려졌다. 광주만세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신속하게 알려진 것은 광주제중원(지금의 기독교병원)경리직원이었던 황상호선생이 1919년 3월13일 자 ‘조선독립광주신문’을 제작해 13일 시위현장에 뿌린 것이 주효해서다. 황상호는 약제사인 홍덕주, 장호조와 함께 시험지 크기의 9절지 2매로 된 ‘조선독립광주신문’을 밤 새워 등사판으로 밀었다.

황상호는 1면에 손병희 등 33인의 대국민호소와 일제에 의한 고종황제독살설,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에 입각한 조선민족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을 실었다. 그리고 2면에는 3월10일 일어난 광주만세운동을 자세히 보도했다. 광주장터로 몰려드는 조선백성과 학생들의 결의에 찬 모습과 열광하는 백성들, 그리고 우레와 같은 만세소리에 뒤덮인 만세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무력진압을 울분에 차 묘사했다. 이 신문은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고, 기사내용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광주 큰 장에 갔다가 이 신문을 가져온 다른 지방의 사람들은 조선독립에 대한 결의를 같이 다졌고 일본 경찰의 잔혹함에 대해 함께 치를 떨었다.

황상호 등은 ‘조선독립광주신문’을 4호까지 발행했다. 그러나 신문을 제작했던 황상호 등이 일본경찰에 체포되면서 더 이상 발행되지 못했다. 이들은 일본경찰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다. 발행인 황상호는 징역 3년을, 홍덕주와 장호조는 징역 2년을 각각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지역역사 연구와 정리에 대단한 열정을 보이고 있는 노성태 선생(광주 국제고 역사교사)은 지난 2019년 2월 20일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열린 ‘광주 3·1혁명100주년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광주제중원 직원 황상호 등이 서울의 만세시위 소식 등을 실은 광주지역 첫 신문인 ‘조선독립광주신문’을 시위현장에 집중적으로 뿌린 것이 시위확산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비밀결사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 모습(전남대학생독립운동연구소).

또 최원순 선생 등을 중심으로 세워진 계몽단체 ‘광주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의 적극적인 만세운동 참여가 광주 3·1 만세시위가 일어난 배경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노성태 선생은 “지난 1919년 광주지역 3·1 만세시위는 광주 양림동 기독교인들과 함께 2년 전 조직된 비밀결사 ‘신문잡지종람소’’청년 학생들의 조직적 가담으로 치밀하게 준비돼 일어났고 4월 8일까지 광주 인근지역 횃불시위로 지속됐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노성태 선생은 숭일·수피아학교 등 광주지역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이 만세운동에 대거 참여한 것도 시위가 커진 이유라고 적시하고 있다. 그는 이날 세미나에서 ‘광주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형을 선고받은 103명의 연령과 직업, 거주지 등 재판기록을 분석한 결과 10∼20대가 89명, 학생이 53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고 밝혔다.

당시 광주지방법원에서 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는 다음과 같다.

-징역 3년: 김 철, 정광호, 범윤두, 김용규, 한길상, 최정두, 박일구, 김윤호, 이창호, 김태열, 김범수, 강석봉, 최병준, 김강, 최한영
-징역 2년:김정수, 송기호, 황상호, 정두범, 노천묵, 김철주, 송흥진, 조보근
-징역 1년:박애순, 진신애, 송광춘(대구감옥에서 옥사)
-징역 8월:김화순, 윤순임, 이옥희, 박영자, 최경동
-징역 6월:이나열, 이태욱, 김덕순

■애국·박애의 성지로 양림·방림동 가꿔야

노성태 선생이 분석한 결과 일본경찰에 체포돼 재판을 받은 사람 중 62명의 거주지(주소)가 양림동으로 나타났다. 이는 양림동에 광주 3·1만세운동을 주동한 애국지사와 학생들이 속해 있는 양림교회와 숭일, 수피아학교, 기독교병원 등이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양림동에 대한 성격규정 및 역사적 평가가 새롭게 이뤄져야할 필요가 크다.

양림동과 봉선동, 방림동 일대는 근대화시기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조선인들에 대한 선교·의료봉사 활동을 펼쳤던 곳이다.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과 오웬(Clement C. Owen, 오기원), 목포에서 활동하던 포사이드(Wiley H. Forsythe)선교사, 엘리자베스 셰핑(Elisabeth Shepping, 서서평)선교사 등이 양림동에서 헌신적인 이웃사랑을 실천했다.

그리고 광주최초의 목사인 오방(五放) 최흥종 목사의 헌신과 노력이 스며있는 곳이다. 특히 최흥종 목사의 박애정신은 참으로 위대했다. 한센인 환자(나환자)들을 내 가족처럼 여기고, 보살피면서 사랑했다. 1911년 광주 양림동과 봉선동에 있는 자신의 땅 1천 평을 기증해 나환자 수용소가 들어서도록 했다.

광주만세운동당시 배포된 격문.

1924년에는 수용된 한센인 환자가 560명에 달했다. 지역주민들의 반발이 커졌다. 일제 역시 전남의 중심지인 광주에 전염성이 강한 한센인 환자들이 몰려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광주봉선동에 있는 광주나병원은 1926년 인적이 드문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로 이전하게 됐다. 1935년 환자들에게 새 이름을 공모했는데 ‘애양원’(사랑으로 양을 키우는 동산)이라는 이름이 채택됐다. 이 애양원은 후에 고흥 소록도 병원이 생겨난 토대가 됐다.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빈민·나환자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박흥종 목사는 87세를 일기로 지난 1966년 세상을 하직했다. 최영욱·노영철씨 등이 전쟁고아와 병자들을 보살폈던 방림동 동광원(귀일원)은 후에 정인세, 김준 선생의 협동·자조정신이 꽃 피운 곳이기도 하다. 동광원의 협동·자조정신은 새마을 정신으로 채택돼 한국근대화를 이루는 기본정신이 됐다.

양림·방림·봉선동은 인류애의 발휘는 물론이고 여성교육, 의료발전(광주진료소:광주기독병원), 조선간호협회결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근대화가 진행된 곳이다. 특히 선교와 교육을 통한 조선계몽운동과 일제의 탄압에 맞서 기독교의 양심과 조선 혼을 지켜낸 자랑스러운 성지이기도 하다.

‘역사 속의 광주’는 충의의 고장이다. 민초들은 수탈에 시달리면서도 나라가 어려우면 분연히 일어서 목숨을 바쳤다. 근대기에는 병자와 빈민들에 대한 사랑이 꽃을 피웠다. 3·1만세운동과정에서도 양림동의 기독교인들과 학생들, 주민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그런 양림동의 역사와 정신을 기리는 노력이 부족하다. 5·18 정신과 함께 광주가 지니고 있는 항일정신을 다양하게 기리는 정성이 필요하다.

광주만세운동 당시 불렸던 독립가.

■광주 3·1운동 사적지 관리에 정성 쏟아야

아쉬운 것은 광주지역의 3·1운동 관련 사적지 관리가 매우 허술하다는 것이다. 광주지역 3·1운동 관련 사적지는 부동교 아래의 작은 장터(현 동구 불로동 174 일대)를 비롯 광주 수피아학교, 숭일학교 터(현 남구 양림동 무등파크), 제중원(현 남구 광주기독병원) 등이다.

이중 광주 수피아학교(여중·고교)는 당시의 학교 건물인 수피아홀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어 3·1만세운동의 감동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또 교정에는 ‘광주 3·1만세운동 기념동상‘이 세워져 있어 방문객들에게 당시 수피아교 학생들의 기개와 나라사랑 정신을 전달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광주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작은 장터와 큰 장터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안내판 하나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뿐이다.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대거 참여했던 숭일학교 교사 역시 그 자리에는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 있고 아무런 안내판이 세워져 있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1971년 북구 운암동으로 이전한 숭일중·고교에도 교정에도 학생들의 만세운동참여를 기리는 기념물이 없다.

제중병원 직원들.

광주만세운동 당시 배포된 ’조선독립광주신문‘이 등사된 제중원 건물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제중원 건물은 헐려버리고 그 자리에는 현대식 병원 건물이 들어서 있다. 병원 건물에는 배유지, 오원선교사 등 조선과 광주를 위해 헌신했던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안내와 병원역사에 대한 안내가 마련돼 있지만 3·1 운동과 관련된 사실은 평소 부각되지 않고 있다.

3·1운동100주년기념광주기독병원사진전.

이런 가운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광주기독병원 측이 제중역사관에 마련한 ‘3·1운동과 광주 제중원(현 기독교병원) 사진전’이 2월 22일부터 3월 15일까지 열리고 있어 3·1운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사진전에는 3·1운동 전후 광주제중원 현황을 비롯해 당시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유인물, 3·1운동에 앞장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광주제중원 직원 소개 및 판결문, 조선광주독립신문 등이 전시되고 있다.

수피아홀과 3·1만세운동 기념탑.

광주시 남구 양림동 256번지수피아 여고 교정에는 광주지역의 3·1 만세운동을 기념하고 옥고를 치른 학생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진 ‘광주 3·1 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다. 1995년 5월 10일에 건립된 기념비 앞면에는 ‘광주 3·1 만세운동 기념’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 뒷면에는 옥고를 치른 박순애, 이태옥, 김양순, 윤혈녀, 김덕순, 조옥희, 이금봉, 하영자, 강화선, 이라혈, 최수향, 김만순, 홍순해 등 23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 옆면에는 ‘역사의 별이 되어’ 라는 추모시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천추에 이름 석 자 누구나 남기는가, 기미년 3·1 운동 선두에 서서 구국의 일념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태극기 앞에 두고서 독립만세를 외쳤네. 일제의 총칼 앞에 나라가 침탈당하자 자유 없는 속박에서 사느니보다 사슬을 끊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네. 모진 고문을 당하여도 이겨낸 고결한 애국 얼이 역사의 별이 되어 무궁토록 빛나네’

일제만행을 묘사한 중국언론의 3·1운동 보도. 만세를 부르던 윤형숙 학생의 팔을 잘라버리는 장면이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진 옥고를 치렀다. 특히 ‘광주 3·1 만세운동 기념비’에 새겨진 23명의 명단 중 ‘윤혈녀’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수피아 여학생중의 한명이다. 윤형숙은 만세를 부르다 일본 헌병이 휘두른 칼에 태극기를 흔들던 왼팔이 잘려나가는 참변을 당했다. 그러나 윤형숙은 그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오른손으로 태극기를 쥐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전해진다.

윤형숙은 일본 경찰의 취조를 받을 때 자신의 이름을 ‘윤혈녀’라고 말할 정도였다. 윤형숙은 징역 4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혀 있던 중 오른쪽 시력을 잃었다. 그녀는 출옥후 결혼을 하지 않고 문맹퇴치와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에 헌신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여수에 있었던 윤형숙은 손양원 목사등과 함께 북한군에 의해 피살됐다.

3월10일에 시작된 광주만세운동은 4월까지도 산발적으로 계속됐다. 비아·하남·임곡 등 광주 근교에서는 밤에 산봉우리나 들에 봉홧불이 피워졌다. 수많은 이들이 일제에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일부는 중국이나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돼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도움말/박선홍(광주1백년), 김정호, 노성태, 광주·전남 향토수호사(보병 제31사단)

사진제공/광주기독병원 제중역사관, 전남대학생독립운동연구소, 광주시립박물관, 위직량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