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4장 환도(還都)<289>

“오는 과정에서 백성들은 어떻더냐.”

“제가 죽을 판인데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나이다.”

왕은 그럴 것이라고 여기며 두 자식들을 측은하게 내려다보았다. 왕자들은 전쟁으로 논밭이 잡초만 무성하고, 피골이 상접한 백성들이 통곡할 힘조차 없는 모습으로 길바닥에 쓰러져있는 광경들을 보긴 했으나 피상적이었다. 항용 그러니 그러려니 하고 보았을 뿐이었다.

“그래, 참으로 고생을 하였다.”

아비 선조는 임해군 진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왕권의 적자 승계 원칙에 따라 그에게 왕위가 넘어가야 하는데 조정신료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한지라 어쩔 수 없이 차자인 광해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런 처지에 근왕병을 모집하러 강원도로 갔다가 일본군에 쫓겨서 함경도까지 밀려갔던 것이다. 함경도는 또 오죽 추운 곳인가.

선조는 왕이 되리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중종의 다섯번째 후궁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덕흥군의 3남이었으니 족보로 따지자면 왕권의 곁불도 쬐기 어려웠다. 요행히도 자식이 없는 대비마마(명종 비)의 눈에 들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런 것들 때문에 영이 서지 않아 왕권을 행사하는 데 무진 애를 먹었다. 그래서 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는데, 임해군이 성질이 포악하고 사대부는 물론 노비를 죽이기까지 했으니 일찍이 파문을 당하고 말았다.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로부터 탄핵을 당해 차자인 광해에게 세자 자리를 넘긴 것이다. 그런 처지에 오지 중의 오지 함경도에서 고생하다 왔으니 아비로서 마음이 처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임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국경인과 그 동생 국세필 이 새끼들 목을 따버려야 제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건 왜?”

“그것들 때문에 이 고생한 것 아닙니까.”

그는 함경도에 동생 순화군 보와 함께 움직였다. 그런데 어느날 국경인과 국세필 일당이 가토 기요마사 2군대장 진영에 밀고해 붙잡히고 말았다. 국경인은 그 지역의 향리였다. 국경인의 눈으로 볼 때, 이들은 왕자라고 할 것이 없었다. 하는 꼬라지가 도대체 한심했다. 사냥한 사슴과 멧돼지가 화살을 맞고 어디론가 숨어버려 다음날 찾으러 나서도 없으면 고을 사람들이 가져갔다고 불러내 개패듯이 패고, 혹 사냥감을 찾았다며 작은 노루를 가져오면 큰 것을 숨기고 작은 것을 들이민다고 창으로 눈을 찔렀다. 애초에 낚시질이든 사냥질이든 놓친 고기는 큰 법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술과 안주를 제공해야 하고, 여자도 갖다 바쳐야 했다. 몸이 아파 징병에 못나간 장정을 꾀병이라고 두둘겨팼다. 임해군은 나이가 21세니 그렇다 치더라도 13세의 순화군도 그 형을 그대로 따라 못된 짓을 했다. 동네 개를 불러서 흘레를 붙이고, 흘레 붙는 수컷 배때지를 칼로 쑤셔박아 난자를 하고, 지나가는 노비를 옷벗겨 채찍질을 가했다. 민정을 시찰해 가여운 백성들을 보살펴야 하는 왕자들이 그 모양이니 국경인과 국세필이 가토 기요마사에게 밀고했다. 왜군에게 밟히나 왕조에 밟히나 그게 그거라고 절망한 그들은 죄책감없이 이런 짓을 했으니 나라가 망국의 기로에 선 것은 분명해보였다.

가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밀서를 받고 이들을 데라고 남으로 내려가 밀양을 거쳐 부산 다대포에 당도했다. 일본으로 압송하기 위해 왜 군선에 왕자 가족들을 구금했다.

그때 고니시 1군대장은 도요토미의 문서를 받아 중국의 심유경과 강화회의를 진행중이었다. 도요토미의 화의 문서는 7개항의 장황한 것이었지만 핵심은 조선 4도를 명에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4도는 일본이 갖는다는 계산일 것이다. 명의 4도는 산악지대인 북방지역이고, 왜가 갖는다는 4도는 곡창지대 전라도를 포함해 인구가 많은 한수 이남이다. 고니시는 전쟁에 신물이 나고, 본래 주전론자가 아니어서 이를 받아들여 명군 진영에 연락했다.

명군 역시 남의 나리에서 하세월로 싸우는 것이 어떻게 보면 귀신에 홀린 것 같아서 벽제관 패전 이후 후퇴 명분 찾기에 바빴다. 그런데 강화회의 조건으로 조선 4도를 먹으라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조선의 반을 먹는 셈이다. 띵호아. 그러나 조선 조정을 달래야 했으니 가토 군대가 볼모로 잡고 있는 임해군과 순화군을 풀어줘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래서 이들이 풀려나게 되었고, 이 사실을 명 도독 이여송이 귀로에 선조를 만나 알려준 것이었다.

왕은 환도하고 있었지만 왜군이 무서워서 내려오다가 말고 숨고, 그러면서 산천경개 유람하듯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조선반도가 생선토막 나누듯 왜와 명이 사이좋게 나누고 있다는 사실도 그는 알지 못했다. 두 나라가 비밀에 붙이긴 했지만, 그는 잠자리에서 걸핏하면 통곡하고 괴성을 지르고 마비증세가 생기는 발작증세를 보이고 있었으니 정신도 온전하지 못했다(선조비망기).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지만 할 생각도 없었다. 세월이 약이겠지...

왜는 방어벽을 쌓기 위해 광양만에서부터 경상도 해안 일대와 동해안의 초입 울산까지 고을백성들을 동원해 왜성을 쌓기 사작했다. 이 지역은 벌써 왜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왜성 쌓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때 신임 도원수 권율이 경상도로 떠나고, 정충신은 선사포에 당도했다. 정충신이 집에 들어서자 마당의 깃대 끝에 웬 효수가 매달려 바람에 대롱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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