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4장 환도(還都)<290>

“깃대의 저 두상은 무엇이오?”

정충신이 하양 허씨에게 물었다. 그녀는 여름인데도 잘록한 범털 조끼를 걸치고 있어서 흡사 여두목 같았다. 그가 부재한 사이 선사포 상황이 많이 바뀐 모양이었다.

“산적 수급이옵니다. 이번에는 다른 놈들이 들어왓습니다.”

“산적 수급이라니?”

“명군 탈주병인데, 명병 잔당들이 마을에 들어와 황소를 끌고 가고 돼지 닭, 곡식 무엇이든지 닥치는대로 강탈해 갔나이다. 전쟁에는 약하고 약탈에는 능한 자들이지요. 저놈이 마을의 소녀를 뒷집 헛간으로 끌고 가 겁간하고 있었습니다. 소녀가 비명을 지르고 울면서 저항하는 것을 소첩이 발견하고 뛰어들어가 쇠스랑으로 놈의 등짝을 찍어버렸지요. 명군사령부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소첩에게 상을 내렸습니다.”

“상을 내렸다고?”

“탈주병이 잔당을 끌어모아 무기를 지니고 떼를 지어 다니며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비적이 되었으니 현상이 붙은 것이지요. 저놈을 때려잡으니 명군사령부가 ‘아녀자도 저렇게 용감하다‘는 표상으로 우리집 마당에 탈주병 두상을 장대에 매달아 꽂아놓고, 상을 내린 것이랍니다.”

정충신은 겁 없는 여자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행장을 수습했다. 식사하는 앞에 하양 허씨가 앉았다.

“서방님, 철산 가도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요동의 배가 가도에 들어와 행패를 부립니다. 정체도 불분명합니다. 길이 한번 뚫리면 쥐새끼들처럼 뻔질나게 드나들텐데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항상 문제 아닌가?”

“들어보시어요. 요동인들이 건어와 목재, 약초를 약탈하러 온 것을 명국에 통보하면 요동의 변장들이 화를 내는 한편으로 책망받을까 우려되어 더욱 까탈을 부릴지 모릅니다. 명이 약해지니 변경이 흉흉해지고 있습니다. 앞 일이 어쩔지 모르니 명국 예부(禮部)에 직접 통보하지 말고, 진하사(進賀使:임시로 파견되는 비정규 사신)가 명국에 갈 적에 이자(移咨:자문을 보내는 외교문서)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 사이 저놈들이 도주해버리면 어떡하고?”

“도망가고 안가고의 사정까지 감안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세가 복잡하니까요.”

“사세가 복잡하다니?”

“잘 보세요. 지금 가도에서 명국인들은 여러 척의 배를 모아 무기까지 갖추고 우각(牛角)을 불면서 쳐들어왔다고 하는데, 이 자들 명을 어기고 노략질을 하는 자들임이 틀림없습니다. 여진족들과는 또 다른 문제지요. 어쩌면 요동에서도 명인들을 잡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통쾌하게 여길지 모릅니다. 그들을 힐문하여 죄상을 명국에 통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명나라는 총병을 두고 요동을 다스리고 있었으나 여진족에게 발리고 있어서 낮엔 명국, 밤엔 여진족이 지배하는 형국이었다. 바닷가 유역만 명의 지배하에 있을 뿐, 내륙은 사실상 여진족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누구를 상대해야 할지 애매하였다. 조선은 명나라의 지원을 받고 있으나, 세가 나날이 커져가는 여진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가도를 수습하고, 변경으로 진출하여야 합니다. 변경 또한 심상치 않습니다. 명과 여진족 사이에서 조선의 위치를 잘 세워야 합니다. 군사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외교력이 필요합니다. 외교력이 바로 군사력이지요.”

선사포와 가도는 전략요충지였다. 나중 모문룡 사건에서부터 유흥치난의 근거지가 된 곳이었다. 이것을 예견하고 하양 허씨는 미리 방비하자는 것이었다. 그녀가 다시 힘주어 말했다.

“남쪽 왜구만이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명과 여진족 사이에서 조선의 위치를 세워야 합니다. 변경으로 가세요.”

“왜 험지로 가라는 것이오? 나는 왕명에 따라 움직일 뿐이오.”

“모두가 기피하는 험지는 자원하면 되는 것이옵니다. 중앙 정치엔 기웃거리지 마세요. 투기하고 모함하는 곳에서 무얼 얻으려고요? 상감마마 환도 중에도 목이 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장군들의 공을 시기해서 모함한 뒤 공을 빼앗는 자가 있습니다. 전하께옵서는 백성들의 식량을 거둬 명나라 군대에게 보급하라고 명령하는데 굶주려 죽는 백성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나오고 있습니다. 명군이 와서 하는 것이라곤 연전연패인데, 뒤로는 왜군과 화의하고 있지요. 조선군이 행주성 싸움의 승세를 몰아 왜군을 밀어붙이면 완전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데도 명이 들어서서 화약(和約)을 맺으려 하니 닭쫓던 개 꼴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화가 나지요. 그럴 바에는 변경으로 나가십시오. 굳굳하게 군인의 길을 가세요."
"점을 보았던 것이오?"
"서방님이 행주산성으로 출정한 다음, 소첩은 주역을 통독하고, 매일 기도로써 나라의 앞날을 점쳤나이다."
그녀의 신통력과 예지력은 뛰어났다. 그러나 정충신은 하양 허씨 뜻과는 반대로 얼마 후 조정으로 들어오라는 왕명을 받았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