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4장 환도(還都)<291>

정충신에게 선전관 임무가 부여되었다. 이항복 대감의 명으로 궁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긍으로 들어와 직을 수행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3궁(宮)이 전부 소각되어버렸기 때문에 왕은 군기시(軍器寺) 옆 정릉(오늘의 덕수궁 주변)의 월산대군 옛집과 양천 도정(都正) 이정이 살던 집, 그리고 사화 때 죽은 어느 왕자의 옛집과 심의겸 집을 접수해 임시 행궁을 차렸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 3궁은 나무조각 하나 건질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타버렸고, 귀중한 전적을 보관한 춘추관마저 타버렸으니 왕조의 체통과 권위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골목마다 굶어죽은 사람이 엎어져 있거나 도랑물에 발을 적신 채 기진해 있고,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일도 일어났다. 거리는 폐허가 되어 황량했다. 사람들이 허약한지라 돌림병이 돌면 그대로 죽어나갔다. 그런 속을 쥐떼들이 몰려다니며 시체들을 뜯어먹었다. 왕이 환궁했다고 해도 백성들은 반가울 것이 없었다. 이런 어지러운 도성을 바로잡으라고 이항복 대감이 정충신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정충신은 궁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매사가 거북스러웠다. 한양 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석반을 마치자 그는 쓸쓸한 마음으로 오동나무 밑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먼 남쪽 고향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뒤에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는 자가 있었다. 뒤돌아보니 편복 차림의 광해였다.

“아니, 저하께서 어떻게 이런 복장으로 여기까지...”

“내가 어때서. 사람들은 흔히 어떤 고정관념에 빠져서 당신은 그래선 안되는데 하지만, 그게 옳은가. 예법과 가치기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건 관념의 조작에서 나오는 허구야. 난 그런 것이 싫어. 숨 막히지 않나?”

“그렇습지요.”

정충신은 얼버무렸다.

“얼굴색이 안좋은데, 궁궐 생활이 별론가?”

“저는 이곳이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북쪽 변경으로 가야지요.”

“오호, 그래? 너도나도 왕실에 접근하려고 난린데 신선한 말이군. 내가 분조를 맡아 영변 삭주 안주 영변, 평양, 묘향산 들를 때 우리 만났지? 그땐 서로 바빠서 긴 얘기 나누지 못했지만 관심을 갖고 있었지.”

“세자 저하는 난중에 동분서주하며 소임을 다하셨고, 조정과 백성의 가교 역할을 다 하셨지요. 그래서 백성의 명망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우러러 보았습니다.”

“하지만 인기를 얻는 것이 썩 좋은 것은 아니야.”

“인기를 얻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니요?”

“잘해도 욕인 경우가 있지. 권력의 세계에서는 그래. 주상전하는 내가 탐탁치 않은가봐.”

뭔가 그는 깊은 말을 하려는 듯했으나 내비치지는 않았다.

“세자 저하는 현군의 자질이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하면...”

광해가 대수롭지 않은 듯 받았다.

”형이나 동생들이 개판치고 있어서 내가 돋보일 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리고 나는 특수한 위치로서 큰 쟝애물없이 일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능률이 오른다고 봐야지.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실적을 올리는 것이 당연한 거야. 하지만 너무 나대면 안돼.“

“그렇겠군요.”

정충신도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쉽게 수긍했다. 임해군 순화군의 행패가 날로 심해가고 있었다.

“정충신이 나보다 한 살 아래지?”

“사실은 저도 세자 저하와 같은 을해생(1575년)입니다. 다만 섣달 그믐날 태어나서 병자생(1576년)이 되었지요. 따지자면 을해생의 막내요, 병자생의 첫째가 되옵지요.”

“그거 좋네. 입춘이 을해년(1576.12.27)에 들었기 때문에 세시풍습에 따라 그 이후 태어난 사람은 병자생이 되는 거야. 억울해?”

“억울할 것까진 없지만 하필이면 섣달 그믐날이라...”

“하하, 얼마나 좋은가. 병자년의 첫째라는 기록이 특별하잖아. 그리고 세장(歲粧·설빔)을 거저 얻어입잖아, 하하하.”

광해가 호방하게 웃고 말을 이었다.

“훈련도감을 설치할 거야.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투항해 온 항왜(降倭)들에게 조총 쏘는 방법과 탄환 만드는 기술을 관군에게 가르치도록 할 거야.”

“잘 생각하셨습니다. 낙상지 장수도 불러들이지요.”

“그럼 누루하치 어떻게 생각하나.”

“여진족장 말씀입니까.”

“밀대를 통해 원병을 보내주겠다고 했어. 지금 누루하치가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뻗치고 있잖나. 명나라는 늙은 말이 되어서 활동이 느리고 회생할 가망이 없어. 국제절서가 급히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썩은 동아줄만 잡고 있으면 되나? 정충신 나를 돕겠나?”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