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5장 변경<297>

누르하치가 조선에 대해 적나라하게 알게 된 것은 김풍달이라는 조선의 궁인(宮人) 때문이었다. 선조가 의주로 도망갈 때 궁인 김풍달도 행렬의 뒤를 따랐다. 왜군이 어느결에 조선반도 전역을 장악하자 왕을 호종하던 예조판서 이덕형이 명국에 구원병을 청하자고 긴급 제의했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이덕형이 청원사가 되어 명나라로 건너갔다. 이때 김풍달이 여러 명의 종자(從者) 중 하나로 이덕형을 수행했다. 육로를 통해 깊은 산중을 가는데 김풍달이 숲속에서 대변을 보았다. 그때 매복한 누르하치 군대에 생포되고 말았다. 그렇게 포로가 되었으나 지금은 핵심 막료로 변신했다.

“김풍달의 얘기에 따르면, 조선왕조 200년 정치 중 가장 나쁜 제도가 신분제라고 하더군. 백성을 갈갈이 찢어놓는다고 했어. 한번 종놈은 대대로 종놈이라니, 그 말 맞나?”

“사실이 아닙니다. 저도 신분상으로 낮은 계급이지만 이렇게 군관이 되었습니다.”

“너는 사람 잘 만나 성공한 예일 거고, 대개는 그럴 것이다. 조선에는 왕족 양반 평민 중인 천민 중 평민 이하가 9할이요, 1할이 양반이라더군. 1할의 양반 계급이 부의 9할을 차지하고, 9할의 백성이 1할의 재산으로 서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부의 편중현상, 이런 불평등한 땅에서 사는 것이 지긋지긋하다고 김풍달이 우리 건주여진에 귀순한 것이야. 수렵생활을 하고, 싸움터에 나가 싸워도 평등하게 사니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배신자 올시다.”

“배신자라니? 사람사는 게 별 건가. 나뉨이 없이 고루 배때지 따뜻하게 사는 것을 인생이 가치로 아는 인생관이 다르겠지. 그는 지금 산해관의 매복작전에 투입되었다. 며칠 후, 군사 이끌고 이곳으로 올 것이다. 명군의 침공에 대비해야 하거든.”

“여진족은 취한 물건을 골고루 나눈다고 했나요?”

“그렇다. 약한 자를 뜯어먹고 발라먹는 조선과는 완전 다르다. 너희처럼 둥궈(중국) 후장을 빠는 사대가 아니라 맞짱뜨는 종족이라니까. 전리품을 나누니 흩어진 부족들이 단합하고 있다. 장수나 병사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니 조선이란 나라가 만족(蠻族) 같군.”

누르하치 곁에서 묵묵히 술만 먹던 막료장 오쿠타이가 끼어들었다.

“조선왕조 200년을 보니 가관입디다. 당파싸움 술수정치 매관매직, 양반 상놈 차별적 신분제, 상놈 중에서도 관노 사노 천인, 이들 천인은 또 보부 노비 광대 백정 기생 악공 승려 무당 상여꾼 천장인(賤匠人) 망나니, 수도 없이 많소. 여자는 관기 애첩 소첩, 그중 세습까지 된다고 하니 살 곳인가. 성을 착취하면서 양반끼리 나눠 갖고, 나이들어 쓸모가 없어지면 폐기처분 한다면서? 이렇게 사람값을 똥값으로 취급하니 그게 과연 예법의 나라라고 할 수 있나? 상놈의 나라지.”

술기운인지 오쿠타이는 흥분하며 방방 떴다.

“김풍달은 조선왕조 밑에서 밥벌어먹는 것이 창피하다고 했네. 우리에게 합류한 것이 정말 행복하다고 했지.”

누르하치가 말하고 이었다.

“나는 내 조상이 고구려, 발해인이라고 여겨왔지. 그래서 조선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졌다. 하지만 안타까웠어.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하여서 건국했다고 하나 왕도정치의 폐습과 중국과의 사대 관계 유지가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보는데, 이건 잘못된 길이야. 주체성이 없으면 쓸개없는 인간이거든. 그리고 건국하면서 왜 최영 장군의 북벌을 지지하지 않았나. 그랬다면 우리도 자랑스런 조선의 후예로서 요동땅을 떵떵거리며 살았을 것 아닌가. 그런데 속국으로 스스로를 가둬서 주권을 포기하고, 고구려 발해의 민족웅비를 폐기해버렸어. 그로부터 200년간 기회주의자만 살 판이 났어. 조선 왕국의 말로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야.”

오쿠타이가 나섰다.

“쥐새끼 같은 사대 기회주의자들만이 사는 세상이 되었지요. 나라 팔아먹는 배신자를 외세가 이용할 뿐입니다. 이용가치가 있으니까 꿀을 주면서 부려먹는 것이고, 그러나 속으로는 경멸하지. 그들은 너나없이 지위를 이용해 특권 반칙 불법을 저지른다니까. 영혼이 없으니 먹고 튀자는 인생관만 가지고 있어. 이런 것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중국 땅을 밟으면서 도망을 가버려. 여진 땅이 사람살만하다고 탈출하는데, 우리는 이삭줍듯 그들을 맞아들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명군, 왜군의 동태를 빠삭하게 파악하게 되었어.”

오쿠타이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장군, 대신 그들이 명과 짜고 우리를 토벌하러 올지 모릅니다. 어버이나라를 넘본다고 우리를 아작내려 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정충신이 분명하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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