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2부 5장 변경<304>

다음날 오랑캐 무리의 효수된 머리 30이 변경 메마른 벌판에 장대에 매달려 하늘 끝에 대롱거렸다. 이를 본 아군 병사들은 사기가 올랐고, 여진 부족은 겁을 먹고 도망을 갔다. 그후 변경에 접근해오는 여진 부족은 없었다. 이 소식을 듣고 함경도관찰사 장만이 달려왔다.

“정 만호의 뱃심이 두둑하구나. 어떻게 이런 전과를 다 올렸느냐.”

“병사들이 목적의식이 뚜렷하니 힘이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둘째아들 다이샨과 합동작전을 펼쳤나이다.”

“다이샨과 합동작전?”

장만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들 부대가 여연촌을 침공했다. 알고 있는냐? 강계의 여자들을 훔쳐서 달아난 놈들이다.”

여연은 사군육진(四郡六鎭)을 개척할 때 4군 중의 하나였다. 본래는 함길도(咸吉道) 갑산군의 여연촌(閭延村)이었으나 4군을 설치할 때 평안도 관할로 이관되었다. 여진족의 침입로라서 골치를 앓았는데 그들은 주로 건주여진 부족이었다. 누르하치 산하인 추엥과 다이샨 형제 부대가 침공했고, 그것은 이웃 군인 강계의 여인들을 훔쳐가기 위해서였다. 강계 여인은 예로부터 팔등신 미인이 배출되던 곳이었다. 산세가 수려하고 차고 맑은 압록강물로 인해 여인의 피부가 백옥같이 빛난다고 했다. 이목구비가 분명하고, 눈이 호수처럼 맑아서 한번 바라보면 넋을 뺀다는 여인들이었다. 행색이 추하고 더러운 여진 부족이라 할지라도 보는 눈은 있어서 이런 여인을 보면 미치고 환장하는 것이었다.

장만은 압록강의 지류인 죽전천이 합류하는 지점인 여연 서쪽에 진을 치고 있었으나 매번 약탈을 당했다.

“아무리 친구로 사귀었다고 해도 적군은 적군이다. 그들은 형제간에도 잔혹한 후계 다툼으로 피비린내나는 칸의 쟁탈전을 벌이고 있지 않느냐. 돌아서면 배신 때리는 부족들이다. 유념하라.”

“알겠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경계선상에서 양쪽을 조율하면서 힘을 키우는 것도 필요합니다. 여진족의 부족이 세 갈래, 네 갈래가 되어 있으니 한쪽과 손을 잡아 다른 쪽을 치고, 다른쪽과 연맹을 맺어 또 다른 쪽을 치는 것도 방법입니다. 남의 손을 빌려 적을 치는 것은 훌륭한 외교수완이면서 또다른 병술(兵術)입니다. 지금 누르하치 진영이 그렇게 하고 있나이다.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하나로 뭉치는 과정에 있어서 그런 전술을 구사하고 있나이다. 힘만 가지고 사세를 돌이킬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까지 하니 너는 남다르구나. 네가 여진 부족에 대해서 궤뚫는 것이 우리에게도 전략상 힘이 될 것이다. 그런 지혜는 어디서 얻었느냐.”

“변경 복무가 벌써 10년째입니다.”

“응, 그 점 높이 살만하다. 무인은 애초에 중앙 정치에 관심을 둘 것이 없다. 어느 불에 화상을 입을지 모르니 군인은 국토를 방위하는 전선의 최선두에 서있는 것으로 영광을 삼으면 된다. 그것이 장한 일이 될 것이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할 내치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너에게 하명할 것이 있다.”

그는 정충신에게 지방 나리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암행감찰 특명을 내렸다. 정충신이 어느 고을의 객주집에 당도했다.

“묵어갈 수 있겠소?”

“어서 들어오세요.”

객주집 여인이 몸을 팔랑거리며 환영했다. 분내를 풍기던 그녀가 그에게 방을 안내하더니 말했다.

“젊은 분이 보통분이 아닌 것 같구려. 어디서 오셨나요?”

“산막에서 나무를 찍다가 술이 좀 쿨쿨해서 왔소.”

“그러면 좀 일찍 오셨더라면 귀한 음식을 잡수실 수 있었을 텐데...”

“귀한 음식이라니, 어떤 음식이오?”

“호랑이 혓바닥 고기에 곰좆을 먹을 수 있었지요. 사슴 피는 아무것도 아니구요. 여기 나릿님들이 날마다 사냥을 나가는데 어제 오늘은 호랑이와 곰을 잡아왔답니다.”

그날 저녁에도 지방 군수와 포도대원들이 백성들을 끌고 산으로 올라갔다. 주민들을 시켜 짐승몰이를 하고, 산골짜기에 설치한 덫을 하나하나 수습해나갔다. 철사로 된 덫에는 노루가 목에 걸려 숨이 멎어있고, 오소리, 담비, 시라소니까지 숨통이 끊어져 있었다. 이들은 이것을 모두 거둬들여 돌아왔는데, 노루와 사슴을 객주집에 맡기고 요리를 부탁했다. 그들은 흥청망청 독주를 마시고, 불러온 기생들과 질퍽하게 놀다가 돌아갔다. 정충신은 생각 끝에 다음날 관아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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