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3부 광해시대 1장 역사 청산 <329>

광해는 왜국(倭國)의 새로운 변화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역시 조선을 개조하고 싶었다. 선왕이 고수하던 국방 졍책을 혁파하고 북방 변경과 남쪽 바다의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주변국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었다. 그러나 사대부의 기득권 체제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게 만들었다. 무엇을 고치려고 하면 하나같이 들고 일어나 “마마, 선왕대엔 이러했나이다” “일찍이 순임금에 따르면...” “공맹(孔孟)의 사례로 보건대..” 따위로 변화를 통제하고 차단했다. 그러니 선왕의 지시대로 살아야 하고, 순임금을 본받아야 하고, 공맹의 예법대로 행해야 한다. 새로운 변화의 모색을 찾아볼 수 없도록 구조는 옛 체제에 걷혀있다.

그런 중에도 광해는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대동법을 실시하고, 양전(量田)을 실시했다. 대동법을 실시하는 관아인 선혜청은 곡물 가격을 잡아주고, 생산자들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하는 기관이었다. 영의정 이원익이 산혜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변했다.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이 각사의 방납인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십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습니다.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을 설치하여 매년 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당 매번 8두씩 거두어 본청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헤아려 정한 다음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용하도록 합니다”(광해군일기 권제4, 9장, 광해군 즉위 5월7일).

양전은 식량 증산을 위해 유휴지를 개발하는 개간운동이었다. 광해는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선조실록을 편찬했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했다. 그러나 왕의 적통 문제와 왕권 도전에 시달려 늘 파쟁 속에 있었다. 그것은 왕실을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그가 이것을 덮을 수 있는 길은 나라를 개혁으로 몰고 가는 일밖에 없었다.

광해가 한숨을 내쉬며 정충신에게 물었다.

“이에야스란 자가 지도자로 등극하면서 왜국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하니 대저 변화의 핵심이 무엇이냐.”

“네, 이에야스는 전쟁과 공포, 끊임없는 복수의 내전에 염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인접국을 침략해 적을 만들고 대립하는 것이 이젠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민심은 지쳐있고, 평화를 갈구하며, 그래서 전쟁이 아니고도 나라를 먹여 살릴 방도를 찾아나서고 있나이다.”

그 변화의 깃발이 상공(商工)이라고 했다.

“상공은 일찍이 천한 것들이 붙들고 사는 업종 아니더냐.”

“전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데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는 자들인데 어찌 천하다 하겠습니까. 만물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고정 아닌 것이 생물의 법칙입니다. 하물며 사람이라는 것은 금수와 다르므로 변화해야 사는 것입니다. 나라의 근본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쉽게 바꿀 수 있겠느냐. 저렇게 벽은 두껍고, 나 또한 그 길이 편하고 안전해서 선택하고 있잖느냐.”

“왜의 변화를 타산지석의 틀로 삼아야 합니다. 예법도 모르는 무도한 자들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7년간이나 밟혔으며, 그러니 우리는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지요. 야만인이라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저들의 상인적 계산 능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판이라는 것이 있는데, 오래된 나라인 희랍에서 쓰던 것을 왜국이 받아서 왜식으로 개량하여 셈법을 가름하는 계산기입니다. 상점마다 이것을 비치하고 신속 정확하게 수리를 계산하고 있나이다.”

“그것은 본래 우리가 전수한 것이다. 그런데 그자들이 주인처럼 쓰고 있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무엇이든 발명품은 사용하는 자의 몫입니다. 그들은 무인(武人)도 산술과 상인 감각을 익히고 있다고 합니다. 전투에 몇 명을 투입하고, 그중 궁수·포병·기병·공병·전마를 얼마만큼 투입하면 승리로 이끌 것이냐, 주판알을 굴리며 분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수리에 밝지 못합니다. 주먹구구식입니다.”

“이에야스란 자의 생각은 실측(實測)에 강하다, 그 말이냐.”

“그렇습니다. 수리법과 미신법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수리법과 미신법?”

“그렇습니다.”

정충신은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광해의 미신법이 황당하다고 느껴왔던 터다. 그렇지 않을 사람인데, 어떤 때는 귀신에 씌인 사람처럼 보인다. 아마도 왕위 쟁취 과정에서 험난한 과정을 겪은 뒤끝인지라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편집증일 것이었다.

“전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역사관, 인간관, 종교관, 건강법까지 다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인간경영법을 터득하고 있나이다. 근거주의에 입각해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요행이나 미신은 정사의 기본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임란 때 인질이 되어 왜나라로 끌려간 전라도 영광 출신 강항이란 유학자가 쓴 기록도 있나이다.”

정충신이 품에서 서책을 꺼내 앞에 펼쳐보였다. 강항의 <건거록(巾車錄)>이었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