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3부 2장 변경의 북소리<344>

다이샨은 조선의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간자(間者)를 풀어서 조선 조정의 동태를 살피고, 정권의 실세, 그중 친명파와 친금파 신원이 어떠한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나중 필요할 때 이들을 써먹거나 제거하기 위한 근거를 확보한 셈이었다.

“조선의 신료들은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요. 세상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소. 공자왈 맹자왈만 읊어대면 밥이 나오고, 떡이 나오고, 여색(女色)도 골라 취하는 권세가 주어지니 변화할 생각이 없겠지. 신분사회의 틀을 견고하게 짜서 백성을 꼼짝못하게 누르고 이익을 취하니 어떤 변화도 싫은 거요. 기득권의 한 자락만 쥐면 이렇게 대물림하면서 군림하고 떵떵거리고 사는데 변화 자체가 귀찮은 거요. 이런 사대부들이 쓸만한 것들이라고 믿고 있소?”

“답답하오이다. 역모는 3대를 멸하오이다.”

정충신이 무겁게 받았다.

“백성만 쪄누르면 세상 살기 좋은 나라 조선왕조... 이런 것들은 창으로 배때지를 쑤셔박아버려야지, 안그렇소? 보시오. 우리는 군시력을 키워서 중원을 제압하러 가는 것이오.”

그러면서 보여줄 게 있다면서 그가 정충신을 먼지 휘날리는 드넓은 연병장으로 안내했다. 아스라하게 먼 평야의 끝에 게르들이 조가비같이 줄지어 엎디어 있고, 그 앞 벌판에 조를 이룬 보병들이 칼로 겨루고 활쏘기를 하는 훈련 모습들이 보였다. 북편쪽 산귀퉁이에서는 먼지를 일으키며 기병들이 말을 몰고 달려왔다가 달려가는 훈련을 펼치고 있었다.

“팔기군 군사조직이오.”

“팔기군이라니요?”

“이런 답답함이 있나. 팔기란 말 그대로 여덟 개의 깃발을 말하는데, 새로운 군사조직이오. 처음에는 부족 집단들을 4개의 묶음으로 하여 노랑 빨강 남색 백색 4가지 색의 깃발로 조직을 편성했소. 초기에는 이렇게 4기였으나 그후 4기를 더 만들어서 8기가 되었소. 팔기의 기본 단위는 니루인데 1니루는 300명의 장정이 소속되어 있소이다.”

편제는 니루를 기본단위로 하여 군대징발, 보병과 기병, 장비제조 및 수리, 요역(?役: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수취 제도)·잡역(雜役)·호역(戶役) 등을 수행했다. 5니루를 1잘란, 5잘란을 1구사로 편성했고, 구사가 곧 기가 되는 조직체계다. 한 기는 산술적으로 약 8천명의 병사가 소속해 있는 집단이었다.

각 기는 유력한 대표자들에 의해 통제되었으나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도 전 부대를 다 장악하지 못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태종 홍타이지에 이르러 정복 활동이 보다 활발해지면서 몽골족, 한족들을 중심으로 몽골팔기와 한족팔기를 따로 편성했으며, 이들이 군사력의 중심이 되었다(리그베다위키 자료 일부 인용).

“팔기군은 평상시에는 일상 업무를 관장하다 전시에는 군대로 편성되는 유목민 특유의 조직체계요. 중원을 차지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오.”

다이샨은 팔기군의 구심점인 정홍기(正紅旗)의 기주(旗主)였다.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누르하치와 숙부 슈르가치, 그리고 동복 형 추옌을 따라 전장터를 누볐으며, 건국한 이후 맨먼지 버일러(貝勒:패륵)에 봉해지며 암바 버이러(大貝勒:대패륵)로 불렸다. 친형 추옌이 아버지의 정부를 탐하다 졸지에 암살된 후 그가 장자 역할을 대신하고, 왕위 승계 1호가 되었지만 열네 명의 동생들 중 여덟째 동생 홍타이지에게 대권을 양보했다. 그는 야전군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뿐, 권력욕이 없었다.

정충신은 사심없는 다이샨이 좋았다. 막강 군대를 장악하고 있지만 권력을 탐하는 탐심이 없는 것이 직업군인으로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회만 있으면 궁궐을 기웃거리며 승급과 노른자위 근무지를 바라고 뇌물 싸들고 들어오는 정치군인에 비하면 그는 존경할만한 사람이었다. 팔기군이 강력군대가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충신은 팔기군의 규모에 압도되었다. 멀리 긴 타원형을 그려서 둘러선 군대는 끝이 안보였고, 마상의 기병들이 수기에 따라 달리고, 기라병들이 붉고 푸르고 흰 깃발을 휘날리면, 장졸들 수만 명이 하나로 뭉쳤다가 흩어지고, 깃발의 움직임에 따라 함성을 지를 때 천지를 진동하는 것 같았다. 기병들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말을 달려올 때는 흡사 대륙을 집어삼킬 듯하였다.

“정 군관은 명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을 다녀왔다고 했지요?”

“왜국도 다녀왔소이다.”

“비교해보니 어떠하오.”

“명국은 노쇠하고 병들었습니다.”

“늙고 병든 호랑이는 빨리 잔명을 끊어주는 것이 그나마 고통을 덜 받게 하는 것이오.”

다이샨이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그런데 고따우 나라에 의리를 지켜야 한다면서 군사를 수만 명 파송한다고 하니 조선이란 나라, 맨 정신이오? 정 군관의 생각을 말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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