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더 멀어지기 전에
김홍식(광주일동중 교장·문학박사)

고등학교 때 읽은 소설 한 편이 생각난다. 오래 전이라 세세한 내용까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기억된다. 주인공이 퇴근길에 우연히 살인 현장을 지나게 되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살인용의자로 체포된다. 본인의 무관함과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살인자로 확정되어 감옥에서 20년을 복역하고 출소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진데다가 자신의 잃어버린 인생은 그 어디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참담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때 주인공이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신만은 내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라고 힘없이 중얼거린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소설에서만이 아니었다. 우리 주위에서도 똑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까.

지금은 목사님이지만 1972년 당시 38세의 만화방 주인이었던 정○○씨. 그는 춘천 초등학생 강간 살인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강압 수사와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참혹한 고문 앞에 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유린되었다. 결국 15년을 복역한 후 광주교도소에서 출소한 그는 목사가 되었다. 명예회복을 위해 재심을 청구하여 사건 발생 39년 만에 법원으로부터 무죄선고 판결을 받아냈다. 잔학무도한 범죄자로 낙인찍혀 가족들도 도망치듯이 겨우 몸만 고향집을 빠져 나왔고 부친도 그 충격으로 인해 사건 발생 불과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가슴을 쥐어뜯는 그 숱한 세월을 무슨 말로 형언할 수 있으며 그 무엇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오죽했으면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고 하니 삶이 곧 지옥 그 자체였다.

몇 년 전에 천 만 관객을 동원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을 울고 웃겼던 영화 ‘7번방의 선물’도 그냥 나온 게 아닌 듯싶다. 세상 그 어디에 머리를 들고 자신의 억울함조차 호소할 수 없는 회색빛 세월 앞에서 인간으로 태어난 자신이 얼마나 한스럽고 원망스러웠을까. 생각할수록 소름끼치는 끔찍한 일이다. 당시 위증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조금만 더 사려 깊게 들여다보았더라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조차 끝내 그의 편이 아니었다.

송광사에 가면 효봉관이 있다. 효봉스님은 출가 이전에 10년 간 법관 생활을 하였다. 그는 판사로서 한 인간에게 내린 사형선고로 인해 근본적인 삶의 회의를 일으킨다. 꼬박 3일을 번민하던 그는 결국 36세의 나이에 아내와 어린 세 자녀를 남겨두고 한마디 말도 없이 무작정 집을 나섰다. 물론 직장에는 사표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3년 간 속죄의 방랑길로 전국을 떠돈다. 결국 속세와 영원히 이별한 채 출가하여 불자의 길로 들어선다. 어느 봄날, 금강산 여여원에 한 젊은 부부가 경내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장성해서 갓 결혼한 속세의 아들 부부였다. 비록 세월을 건너뛰었지만 그래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조용히 돌아앉아 버렸다는 스님의 일화가 참 서럽고 가슴 아프다. 깊은 자책과 참회의 길 앞에서 아무리 속가와의 인연을 끊었다지만 돌아앉으며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스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또한 실로 오랜만에 잃어버렸던 아버지를 눈앞에 두고도 아버지인 줄 모른 채 그냥 지나쳤던 사실을 뒤늦게 안다면 그 아들의 마음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설움 주체하기 어려우리라.

죄와 벌을 둘러싸고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슬픈 사연 앞에서 참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진정한 정의는 무엇인가. 인간의 야만적인 폭력으로 한 영혼을 파멸시켜버린 사건을 보며 처절하게 빼앗기고 무너진 인생을 어찌한단 말인가.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 벌’에서 초인을 자처하며 전당포 노파를 살해했던 라스콜리니코프도 결국 자신은 초인이 아니며 그 누구도 인간을 죽일 권리가 없다는 내면의 소리를 깊이 자각한다. 그는 순결한 영혼을 지닌 소냐와의 만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진실한 참회와 눈물로 속죄하며 타락한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려는 인간으로 거듭 태어난다. 많은 분들이 올해도 여전히 힘들게 5월을 보냈다. 어두웠던 역사의 뒤안길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고통의 도가니에 몰아넣으며 송두리째 삶을 빼앗거나 뒤틀리게 한 사람들에게 5월이 더 멀어지기 전에 조용히 이 책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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