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92. 낙안읍성의 처참한 역사

왜구·일군 침탈과 근현대사 격변이 훑고 지나간 곳

고려 때 순천해안 상륙 왜구 수시로 낙안읍성 침입
정유재란 당시 순천왜성 진 쳤던 일군들 낙안 수탈

순천 동학농민군 물자확보위해 낙안읍성 공격 함락
낙안, 안규홍의병부대 활동무대 일군 소탕작전 거세

광복 후 이념대립 거셌던 곳 소설 <태백산맥> 무대
6·25전쟁 때 낙안읍성문과 관아건물 대부분 소실돼

300여 주민 실제 거주하고 있는 국내유일 민속마을
단순한 관광지보다는 역사교훈 깨우치는 장소 돼야
 

낙안읍성. 낙안읍성에는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다.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했다.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이다. 1987년 복원됐으며 현판은 일중 김충현의 글이다. 북문은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해를 끼치기에 폐쇄했다고 전해진다.

낙안읍성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백제시대에 등장한다. 낙안읍성이 파지성(波知城)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백제시대 이전부터 ‘낙안’에는 성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외적의 침입이 빈번해 들판에 살 수가 없었다. 아마도 사는 곳 바깥에 돌무더기를 쌓아올리고 모여 살았을 것이다. 초기 군집사회(群集社會)였던 마한시대부터 성이 있었을 것이다.

낙안은 너른 들판이 있는 곳이면서도 해안에 가까운 곳이다. ‘살기 좋은 곳’이다. 또 낙안은 순천과 보성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교통요충지’다. 살기 좋고 교통이 좋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지리·생활환경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잔혹 사를 더듬어보면 그 반대다. 나는 것(農産物)이 많기에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극심했다. 해안가에 가까운 곳이기에 왜구의 침탈이 끊이질 않았다.

고려 때 순천 쪽으로 상륙해 내륙으로 쳐들어간 왜구들은 어김없이 낙안을 통과했다. 낙안을 거쳐 곡성과 담양·장성(진원)으로 몰려가 약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호란(胡亂) 때는 북쪽에서 내려온 몽골군들이 낙안을 짓밟고 보성과 순천으로 진군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주 전투장은 전라도였다. 하동~광양~구례를 거쳐 남원을 점령한 일본군은 후에 순천에 성을 쌓고 그 일대를 통치했다. 낙안사람들이 얼마나 시달렸을지를 가늠할 수 있다.

전쟁의 화마는 낙안을 비켜간 적이 없었다. 어김없이 낙안을 덮치곤 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낙안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은 수성군(관군)을 죽이고 낙안을 함락시켰다. 이때 순천 쪽 동학군과 보성 쪽 동학농민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동학농민군들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낙안읍성 전투가 유일하다. 순천에 기반을 둔 김개남 휘하의 농민군들이 낙안과 보성에 너무 큰 피해를 끼치기에 낙안·보성농민군들이 맞서 싸운 것이다.

낙안 일대는 항일의병들이 일제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곳이기도 하다. 안규홍 등 의병들은 낙안과 보성의 산을 무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순사건은 낙안에도 피바람을 불러왔다. 지리산 빨치산들이 활발하게 움직인 곳도 낙안이다. 예전의 낙안군(樂安郡)은 지금 보성 벌교읍과 고흥 동강·대서면, 순천 외서면 등을 포함했다. 1908년 일제가 낙안군을 폐군시키면서 벌교·동강·대서·외서 등을 다른 군으로 넘겨버렸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로 등장하는 보성 벌교와 순천 외서는 그 뿌리가 낙안에 있다. 빨치산의 준동이 심했던 곳이니 그만큼 피아간의 살육이 극심했다. 6·25 전쟁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가 보는 관광지 낙안읍성은 평화롭기만 하다. 그렇지만 역사 속의 낙안은 수많은 외세의 외침에 백성들이 고통받던 곳이다. 평화로울 때에는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신음했던 곳이다. 낙안의 흑역사(黑歷史)는 잔인하고 처참하다.

■순천낙안읍성(順天樂安邑城)

낙안읍성은 순천 조계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읍성이다. 낙안읍성이 있는 자리에는 마한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위해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이곳에 성을 쌓고 살았다. 백제 시대 파지성이라는 이름 외에도 분차, 분사, 부사라고도 불렸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분령군으로, 고려 시대에는 양악, 낙안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낙안읍성은 남쪽만 들이 펼쳐져 있고 나머지 삼면은 겹겹이 높은 산에 둘러싸인 지세에 자리하고 있다. 낙안읍성의 형태는 사각형이다. 성곽의 길이는 1천410m이다. 남북 약 310m, 동서 길이는 남쪽에서 약 460m, 북쪽에서 약 340m이다. 성벽의 두께는 아랫부분은 7~8m, 윗부분은 3~4m 정도다. 성벽은 큰 돌을 양쪽 바깥(외탁과 내탁)에 쌓아 틀을 만들고 잔돌을 그 가운데에 채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낙안읍성 안내도

낙안읍성은 여자만 해안에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순천과 보성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1983년 국내 최초로 사적 제302호로 지정됐다. 낙안읍성은 관광객들을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민속촌(民俗村)이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마을이다. 성안에 주민이 살고 있는, 국내 유일의 민속마을이다. 낙안읍성에는 3개 마을(동내리, 남내리, 서내리) 85여 가구 주민 300여 명이 살고 있다. 가옥은 대부분 초가집이다.

낙안읍성에는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다.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했다.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이다. 1987년 복원됐으며 현판은 일중 김충현의 글이다. 성문 정면에는 ㄷ자형 옹성(甕城: 성문 앞을 빙 둘러쳐 쌓아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이 성문을 에워 감싸고 있다. 북문은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해를 끼치기에 폐쇄했다고 전해진다.

낙안읍성 성곽

성곽 곳곳에는 치성(雉城)이라 불리는 凸자형 성곽이 있다. 치성은 초소기능을 한 곳으로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장소다. 치(雉)는 꿩을 의미한다. 꿩은 자기 몸을 잘 숨기고 주변을 잘 살피는 동물이다. 그래서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시설이라서 꿩의 습속을 따와 치성이라 했다. 적이 성벽에 붙어 기어오르려 하거나 공성무기를 이용해 성벽을 허물려고 하면 치성에서 총이나 활을 쏘아 적을 사살했다.

성 밖에는 해자가 설치돼 있었다. 해자는 성곽 주변에 땅을 파 깊은 도랑을 만든 것이다. 도랑에 죽창과 같은 날카로운 방어물을 세우거나 물을 끌어들여 적들이 쉽게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낙안읍성의 해자는 넓이 3m, 깊이 1.5~2m 정도다. 임진·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순천왜성 등 남해안 일대에 쌓은 왜성에서는 해자의 규모가 조선읍성에 비해 훨씬 크다. 왜는 전국시대에 전투가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성을 튼튼하게 쌓고 방어시설을 잘 만들었다. 왜군들의 성은 해자의 방어기능을 튼튼하게 하고 몇 겹으로 해자를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낙안읍성은 조선 태조 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襄惠公)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후 인조 4년(1626) 낙안 군수로 부임한 충민공(忠愍公)임경업(林慶業) 군수가 석성(石城)으로 개축한 것으로 전해진다.

낙안읍성 낙풍루와 관광객

임경업 장군은 인조 6년(1628) 3월까지 낙안군수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푼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병자호란 때에는 의주부윤으로 백마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임경업 장군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을 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명에 적대적이었던 청을 반대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반대파에 의한 모함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숙종 23년(1697) 다시 좌찬성의 관직이 내려졌다.

낙안읍성 객사로 들어가는 입구 도로가에는 임경업장군비각(林慶業將軍碑閣)이 있다. 비각안에는 비석이 있다. 낙안군수로 재직 중 왜구를 물리치고 선정을 베푸는 등 백성들을 잘 보살핀 임경업 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다. 억울하게 죽은 임경업 장군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추앙받고 있기도 하다. 임경업장군비각은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됐다. 동문 밖 낙안향교 입구에는 임경업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민사가 있다.

■낙안읍성과 왜구(일본)의 침입

기록에 따르면 왜구의 침입은 1223년(고종 10년)시작된다. 이때부터 고려가 망하는 1392년까지 왜구는 169년 동안 고려를 529회 침입했다. 1223년 처음 100년 동안 왜국의 침략은 10여 차례에 불과했다. 왜구의 침략은 충정왕 2년(1350)부터 본격화돼 공민왕과 우왕 때에 최고조에 달했다. 공민왕 때는 70여 차례, 우왕 때는 380차례 정도였다. 왜구들은 시기별로 그 규모가 달랐으나 최소 400명에서 최고 수천 명에 달했다.

왜구들은 처음에는 한반도의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을 침략했다. 그러다가 차츰 그 범위를 넓혀갔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물론이고 충청과 경기도까지 침략했다. 경상도는 왜구들이 배를 타고 오기가 가까웠기 때문이고 전라도는 곡창지대여서 곡식을 구하기가 쉬어서였다. 충청도와 경기도에는 세곡을 실어 나르는 고려의 조운선이 많아 이를 노리는 왜구의 노략질도 그만큼 많아졌다. 나중에는 개경 근처 해안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약탈했다.

왜구의 약탈로 고려 고을 226곳이 피해를 입었다. 왜구의 선단은 적게는 20척에서 많게는 500척에 달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왜구들이 타고 온 배는 시간이 갈수록 많아졌다. 130척에서 213척, 350척, 500척 등으로 늘어났다. 자연 왜구 병력도 많아졌다. 수 백 명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왜구들이 한꺼번에 해안에 상륙해 식량과 재물을 빼앗고 여자들을 능욕했다. 기병 700명, 보병 2천명의 왜구들이 상륙해 고려의 수도 개경 근처까지 공격을 감행할 때도 있었다.

1350~1351년 왜구침입경로

현재의 전북지역을 포함해 전라도 지역에는 모두 50차례 왜구들이 침략해왔다. 지금의 전남지역에는 30차례 쳐들어왔다. 특히 순천(여수) 지역의 피해가 컸다. 지금의 여수지역을 포함한 순천은 7번이나 침략을 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1350년(충정왕 2년)에 순천부(여수)에 침입한 왜구의 규모는 4월 100여 척, 5월에 66척이다. 배 1척당 30명씩 왜구가 탔다고 계산하면 2~3천명 규모의 왜구다.

왜구들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전라도를 침략해왔다. 그리고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漕運)선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순천과 강진, 진도, 강진, 목포 등 서남해안에 상륙한 왜구들은 화순과 담양, 구례, 광주까지 들어와 노략질을 했다. 순천 지역에 왜구들의 침략이 많았던 것은 순천에 조창(漕倉)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창은 중앙으로 올라가는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왜구들은 순천에 7회, 광주에 6회, 장흥에 4회, 낙안에 3회 침략했다.

고려조정은 군사들을 동원해 왜구들을 물리치는 한편 유화정책도 병행했다. 군사를 동원해 물리치기에는 왜구의 수가 너무 많았고 침략도 빈번했기 때문이다. 우왕 원년(1375)에 왜구 등경광(藤經光)이 부하들을 이끌고 오자 고려조정은 이들이 순천과 연기 등에서 살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그런 다음 전라도원수 김선치(金先致)가 등경광을 유인해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왜구들은 더욱 흉포해지고 잔인해져 전라도지역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해졌다. 왜구들은 고려조정이 조창을 내륙으로 옮기자 곡식을 쫓아 깊은 내륙까지 쳐들어와 노략질을 했다. 고려조정은 낙안에 읍성을 축조하고 왜구의 침략에 대비했다. 앞서 밝힌 대로 순천에는 모두 7차례 왜구들이 침공해왔다. 왜구들의 순천지역 공략은 어떤 형태로든 낙안읍성에도 큰 피해를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왜구의 낙안공격은 1373년 음력 8월에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순천과 보성해안에 상륙한 왜구는 낙안을 거쳐 내륙으로 진격하려 했다. 이때 경상도 부원수 윤승순(尹昇順)이 바다에서 왜구 20여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왜구들의 공세는 누그러졌다. 2년 뒤인 1375년 왜구들이 타고 온 전선 200여척이 제주도를 거쳐 순천 바닷가에 도착했다. 왜구들은 낙안을 거쳐 광주와 나주 쪽으로 진출하려 했다.

당시 순천병마사 정지(鄭地)장군은 왜구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18명을 죽이고 3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수천의 왜구들은 전라도 곳곳으로 흩어져 노략질을 했다. 낙안읍성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우왕 4년(1378) 10월에 순천병마사 정지(鄭地)와 도순문사 지용기(池湧奇)가 광주에 침입했다가 옥과로 도망친 왜구들로부터 말 100여 필을 노획했다는 기록을 참조해보면 1천명 이상의 왜구가 순천과 낙안, 곡성일대에서 준동했음을 알 수 있다.

왜구의 고려침략과 고려조정의 왜구토벌작전은 1389년까지 계속됐다. 1389년(창왕 2년)에 박위가 왜구들의 소굴이었던 쓰시마(對馬島)를 정벌한 뒤 왜구들의 침입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조선개국 후인 1397년(태조 7년)에 대규모의 왜구들이 전라도 해안에 쳐들어와 여러 고을을 함락시켰다. 이때 왜구들이 낙안에까지 이르렀으나 낙안 호족인 김빈길이 의병을 일으켜 낙안읍성 남문에 진을 치자 왜구들이 이를 두려워해 낙안공격을 포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낙안읍성과 동학농민혁명

1894년 음력 5월 8일 동학농민군과 조선조정 사이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체결됐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해 각자 지역 활동에 들어갔다. 전남 동부출신의 농민군들도 대부분 귀향했다. 김개남은 음력 5월 하순부터 약 한 달간 태인·순창·옥과·담양·창평·동복·낙안·순천·보성·곡성 등 주로 전라좌도 지역을 집중적으로 다니며 농민군을 독려하는 한편 집강소 설치 및 운영에 비협조적인 관리들을 처형했다.

이때 김개남은 순천의 중요성을 파악했다. 김개남은 심복 김인배(金仁培)를 보내 순천을 장악하고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토록 했다. 김인배는 순천에 들어올 때 금구에서 인솔한 동학군 외에 광양 수접주 유하덕(劉夏德)과 함께 동학도 수만 명을 동원해 동학의 엄청난 위세를 과시했다. 당시 순천부사 이수홍(李秀弘)은 동학군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이로 인해 김인배가 인솔한 농민군은 손쉽게 순천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영호도회소가 있던 자리. 순천 연동우체국과 삼성생명 건물 일대가 과거 영호도회소가 들어섰던 곳이다.

순천에는 전봉준의 노선을 따르는 박낙양(朴洛陽) 등의 농민군들도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개남의 지시에 복종하는 농민군이 대부분이어서 박낙양의 영향력은 매우 미미했다. 순천은 예로부터 소강남(小江南)이라 불릴 정도로 물산이 풍부한 유통의 중심지였다. 주위에는 큰 산과 바다에 인접해 있어 교통이 편리한, 영·호남 사이의 대도회지(大都會地)였다. 따라서 전남 동부의 중심지인 순천에서는 인근 지역을 관할하기가 매우 편리했다.

도회소 앞의 ‘영호’(嶺湖)는 섬진강 하류의 순천·광양·하동·진주 지역을 포괄하는 의미다. 경상 서부와 전라 동부 지역을 총괄하는 의미에서 ‘영호’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 측에서도 영호도회소의 대접주인 김인배가 전라 경상 양도의 도통령(都統領)이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김인배는 영호도회소를 세워 전남 동부지역을 관할했을 뿐이다.

영호도회소 영향아래에 있는 농민군은 김개남·전봉준 주력부대의 후방을 방어함과 동시에 치안의 유지와 폐정개혁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또한 농민군의 보급로와 군수품을 확보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았다. 수만 명의 농민군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군수물자의 확보가 가장 절박하고 어려운 문제였다. 영호도회소 김인배 농민군 지도부는 군량과 옷, 신발 등을 각 지역별로 할당해 징발했다. 부자들을 겁박해 반강제적으로 얻어내기도 했다.

그런데 순천과 인접한 낙안군의 경우에는 동학농민군들이 영호도회소에 그리 협조적이지 않았다. 낙안군의 동학교도였던 집강 김사일(金士逸)은 김개남과 김인배의 지나친 물자동원요구에 반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개남과 김인배가 지휘하는 영호도회소의 농민군은 낙안군수와 백성들이 물자지원을 거부하자 1894년 음력 9월 15일 낙안읍성 공격에 나섰다. 김인배는 양하일(梁河一)에게 1천여 명의 농민군을 주어 낙안읍성을 공격케 했다. 양하일은 순천지방의 토호로서 원래 순천에서 군수물자를 징발하려 했으나 부친이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에 영호도회소에 비협조적인 낙안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선암사 전경(조선고적도보). 동학농민군은 1894년 음력 9월 15일 낙안읍성을 공격하기 위해 전남 순천시 승주읍에 위치한 선암사에 집결했다. 양하일은 농민군 1천여명을 거느리고 순천을 출발해 중간 지점인 선암사에 주둔했다.

양하일은 음력 9월 15일 낙안읍성으로 가는 길목인 선암사에 1천여 명의 농민군 연합부대를 집결시켰다. 낙안읍성 공격에는 매우 다양한 농민군 부대가 참여했다. 영호도회소는 순천, 고산, 남원, 태인, 금구 등 전북과 전남 지역의 농민군이 연합한 형태였다. 따라서 전라도 순천·광양·담양·곡성쪽의 농민군과 태인·금구 쪽의 연합농민군이 낙안과 보성의 농민군을 징치하는 성격이 짙었다.

낙안의 농민군들은 낙안을 지키기 위해 수성군과 힘을 합쳤다. 여기에 보성농민군들도 합세했다. 지척에 있는 낙안이 영호도회소의 영향 하에 들어가면 보성에도 불똥이 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낙안과 보성의 농민군은 수성군과 함께 낙안읍성 방어에 나섰다. 동학농민혁명사에 있어서 이 부분은 매우 유의미(有意味)하다. 영호도회소의 무리한 징발을 ‘또 다른 수탈’로 본 낙안·보성 농민군들이 반발해 농민군 지도부와 전투를 치른 것이기 때문이다.

영호도회소 산하의 양하일 농민군은 어둠이 깔리자 선암사를 출발해 낙안으로 향했다. 이들은 오금재를 넘어 낙안에 이르러 야간에 기습공격을 단행했다. 낙안·보성 농민군은 관군·낙안읍 백성과 힘을 합쳐 성을 사수하려 했으나 1천여 명의 영호도회소 농민군 공격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낙안향교. 전남 순천시 낙안면 교촌리에 위치한 낙안향교. 낙안을 점령한 양하일과 농민군은 향교의 서책(書冊)과 기물을 빼앗고 농민군에 적대적이었던 향교의 교임 9명을 구타했다.

낙안읍성을 점령한 영호도회소 농민군은 낙안수성군과 낙안 농민군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양하일의 농민군은 향교에 들어가 창고의 문을 부수고 서책(書冊)과 기물을 접수했다. 그리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향교의 교임 9명을 구타했다. 물자를 징발한 뒤 이교청의 문서를 소각했다. 영호도회소 농민군에 저항한 민가 149호도 불태웠다.

낙안읍성을 빼앗긴 낙안군수 장교준(張敎駿)은 수성군을 다시 모아 의소(義所)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낙안읍성을 되찾으려 했으나 농민군의 방어가 견고해 실패했다. 영호도회소 농민군들은 ‘점령군’으로 행동했다. 낙안에서 소 55마리와 의복, 기물 등을 빼앗아 소에 실어 순천 영호도회소로 돌아갔다. 영호도회소 농민군은 낙안에서 탈취한 물자들을 보급품으로 삼아 이후 영남 진주 쪽으로 진출한다.

■안규홍 의병부대가 활약했던 낙안군

안규홍 의병부대는 1908년 4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보성·순천을 중심으로 한 전남 중동부 지역에서 모두 26회의 전투를 치렀다. 안규홍 의병부대는 일본 순사와 군인, 일진회원 등 200여 명을 사살했다. 광양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일본 어민들과 측량대를 습격하기도 했다. 보성은 그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였던 만큼 안규홍 의병부대의 중심활동지였다.

지금의 보성은 안규홍 의병부대가 활동할 당시 상당지역이 낙안군에 해당됐다. 일제는 벌교를 중심으로 한 낙안이 항일투쟁의 중심지가 되자 1908년 10월 15일 칙령 제72호를 발효시켜 낙안군을 없애버렸다. 벌교·조성은 보성군에 예속시키고 나머지는 순천군으로 보내버렸다. 19세기 말까지 낙안 군수는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했었다. 큰 고을이었던 낙안군은 일제의 민족혼 말살정책에 따라 순천군 낙안면이 돼버린 것이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병탄한 후 조선총독부령 제1호를 통해 조선정부를 상징하는 관아와 왜구 방어로 사용됐던 성곽들을 헐어버리는데 주력했다. 낙안객사 역시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식민백성을 육성하는 국민학교(國民學校:지금의 초등학교)건물로 사용됐다. 비록 훼손은 됐지만 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됐기 때문에 헐려지는 최악의 상태는 변할 수 있었다. 1986년 낙안초등학교를 이전하고 내부를 보수, 복원했다.

낙안군을 갈기갈기 찢어 없애버린 것은, 일제가 능주목을 군세(郡勢)가 더 작은 화순군에 포함시켜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1913년 능주와 화순, 동복을 통폐합하면서 화순군으로 개명했다. 목사고을 능주가 면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당시 능주는 인구나 면적, 위치에 있어서 화순보다 월등했다. 가장 큰 고을이었지만 의로움과 항일정신이 컸기에 일제가 능주를 의도적으로 축소, 배격해버린 것이었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에도 역사적으로 낙안이었던 곳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4월 9일 순천군 낙안면 신기리 전평규 등이 벌교 장좌리 아래 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다수의 장꾼들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행렬을 이뤘다. 13일에는 낙안면 신기리의 유흥주 등에 의해 낙안읍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14일 벌교장에서 안규삼, 안규진,안운수, 안상규 등이 두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를 펼쳤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한 후 조선총독부령 제1호를 통해 조선 역사의 상징인 관아와 성곽들을 헐어버리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하게 했다. 낙안객사는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해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다행히 헐리는 것은 면했다. 그러므로 1986년 학교를 이전하고 내부를 보수해 원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근현대사에 있어서의 낙안

낙안읍성 관아출입문이었던 낙민루.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은 보성 벌교를 무대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벌교는 역사적으로 낙안군에 속했던 지역인 만큼 ‘낙안댁’이나 ‘외서댁’과 같은 옛 낙안의 지명과 관련된 이름들이 많이 등장한다. 광복 이후 전까지 벌어진 치열한 이념투쟁 과정에 있어서 낙안 역시 몸살을 겪었다.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 와중에 낙안의 많은 사람들이 민주·공산 양진영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6·25전쟁 기간 동안 낙안읍성 관아 출입문이었던 낙민루(樂民樓)등 많은 건물들이 불에 타버렸다. 낙민루는 순천의 연자루, 남원의 광한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名樓)로 손꼽히던 누각이었다. 누각에 오르는 돌층계와 누각 위에 있는 큰북, 누각 앞의 노거수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1983년 6월 14일 낙안읍성과 3개 마을(동내·남내·서내리)은 사적지(사적 제302호)로 지정돼 1984년부터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낙민루는 1986년 복원공사가 마무리됐다.

지금의 낙안읍성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 고려·조선시대 성안의 풍경과 백성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재현돼 있는 것들은 관아풍경과 백성들의 일상생활이다. 그렇지만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해 낙안읍성이 본격적으로 쌓아지기 시작했으며 또 수많은 왜구와의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홍보나 안내가 부족하다. 낙안읍성은 무능한 정치인들이 탐욕에 빠져 나라 지키기를 소홀히 하면 어떻게 나라가 망하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최적의 역사교육장소다.

낙안읍성은 이 나라를 외세에 지키기 위해 일어선 동학농민군들의 처절한 항쟁이 스며있는 곳이다. 일제의 조선 혼 말살 현장임에도 어떻게 낙안읍성이 파괴되고, 낙안군(樂安郡)이라는 충의의 고장이 없어져 버렸는지에 대한 설명도 생략돼 있다. 단순히 먹고 즐길 수 있는 관광지로서만 낙안읍성을 소개할 일이 아니다. 참담했던 과거의 역사를 알리고 그 안에서 교훈을 느끼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도움말/김만호, 정만진, 정종민, 홍영기, 박맹수

사진제공/위직량, 순천시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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