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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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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4장 광야에서<373>


당초에 강홍립 등이 압록강을 건너게 된 것은 상(광해)이 명나라 조정의 징병 독촉을 어기기 어려워 출사시킨 것이지, 우리나라는 애초부터 그들(후금)을 원수로 적대하지 않아 실로 상대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 그래서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후금 진영)과 몰래 통하게 했기 때문에 심하(사르흐) 싸움에서 오랑캐 진중에서 먼저 통사(通使)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광해군일기 11년 4월8일>

강홍립 군대는 명나라 경략 양호의 지휘 아래 있었다. 양호의 요청에 따라 강홍립이 포수 수백을 보내달라고 함경도에 주둔한 장만 체찰사에게 포수 증병을 요청했다. 강홍립 부대에 포수가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돌아가는 상판을 보니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장만으로부터 곧 밀명이 왔다.

“중국 장수의 말을 따르지 말고 조선군의 지휘권은 도원수가 행사해 군사의 보존을 최우선적 병법으로 강구하라. 포수는 계속 구하는 중이다.”

계속 구한다는 것은 쉽게 보낼 의향이 없다는 뜻이다. 강홍립이 몰살당한 좌영의 군졸들을 수습하고 있는데, 적 척후병(후금군)이 좌영에 와서 역관을 찾았다, 역관 황연해가 달려오자 적의 척후 부관이 말했다.

“우리가 명나라와는 원한이 있으나 너희 나라와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우리를 치려 하느냐‘.”

강홍립이 응답하고 황연해가 통변했다.

“맞다. 두 사라 사이에는 원한이 없다. 이번 출병은 부득이한 것이다.“

“부득이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00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君臣 관계요, 은혜에 있어서는 父子 사이와 같다. 임진년에 명나라가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선왕(선조)께서는 40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동안 한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다.”

“그것이 이유인가?”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임금은 다르다. 명의 은덕을 은혜로 알지만 재평가하고 있으며,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때로는 거역하는 마음을 품고 너희와도 화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뼈에 묻고 상부에 전하라.”

“사실인가. 그렇다면 조선군의 내심을 진중 장수에게 전하겠다.”

그후 황연해가 부름을 받고 한두 차례 왕복한 뒤에 적이 다시 사람을 보내와 화약을 맺자고 청했다(위민환의 책중일록). 그러나 친명 사대주의에 물든 신하들 때문에 광해는 고민이 많았다. 군사를 명군에 합류시키면 백전백패가 분명하고, 후금이 그 보복으로 조선을 칠 것이다. 후금은 조선과 적이 된 적이 없으니 조선군과 싸울 의향이 없다고 화약을 맺자고 한다. 대신군사를 철수하라고 요구한다. 철수하면 명나라로부터 신의를 저버렸다고 배신자 말을 듣게 된다. 어찌해야 하나. 전투 현자에 와서 보니 외교전이 이렇게 중요한 줄 몰랐다.강홍립은 진중일록을 정리했다.

-임진왜란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병부시랑 양호(楊鎬)가 요동 경략에 임명되었고, 사로(四路) 총지휘로 심양에 주둔하였다. 명군은 네 가지 길을 이용해 누르하치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는데, 사로의 사령관으로 동원된 총병이 6명이다(지금의 기준으로 사단장급). 이중 산해관 총병 두송과 보정총병 왕선, 개원총병 마림,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요양총병 유정이 있고, 이성량의 아들이자 이여송의 동생인 이여백이 퇴역했다가 복귀했다. 조선의 지원군은 유격 교일기가 지원하고 있다. 후금이 망하기를 바라고 있는 예허 부족 1만 5천을 포함해 명군은 47만의 군사를 확보했다. 그러나 장부상일 뿐, 실제로는 10-15만 명 정도이다.

강홍립은 후금군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여진족은 유목보다 호랑이, 표범, 늑대 따위 맹수 사냥을 해서 그 가죽을 벗겨 교역하는 것으로 먹고 살아온 부족이다. 사냥은 일종의 군사훈련이나 다를 바 없다. 사냥을 하려면 열 명씩 조를 짜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데, 이들을 군사조직으로 전환하면 용맹한 군대가 된다.

여진어 중에 니루(niru)라는 것이 있고, 수렵 집단인 만큼 수렵에 참가하려면 10명 정도의 인원 수가 있고, 이 10명의 집단을 지휘하는 사람을 니루이 어전이라고 부른다. 누르하치는 수렵 단위인 이 조직을 전투 단위로 바꾸었다. 300명을 1니루로 하였고, 다시 5개의 니루를 1잘란, 5개의 잘란을 1구사로 삼았다. 1잘란에 1500명, 1구사에 7500명이다. 니루는 총 400개였고, 숫자는 대략 12만 정도다. 이중 3-4만이 사르후 전투에 투입되었다. 명나라 군대는 전멸했다. 쓸데없이 병력을 분산했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조선 원병 역시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강홍립은 이렇게 정리하고 비장의 병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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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에 강홍립 등이 압록강을 건너게 된 것은 상(광해)이 명나라 조정의 징병 독촉을 어기기 어려워 출사시킨 것이지, 우리나라는 애초부터 그들(후금)을 원수로 적대하지 않아 실로 상대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 그래서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후금 진영)과 몰래 통하게 했기 때문에 심하(사르흐) 싸움에서 오랑캐 진중에서 먼저 통사(通使)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광해군일기 11년 4월8일>

강홍립 군대는 명나라 경략 양호의 지휘 아래 있었다. 양호의 요청에 따라 강홍립이 포수 수백을 보내달라고 함경도에 주둔한 장만 체찰사에게 포수 증병을 요청했다. 강홍립 부대에 포수가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돌아가는 상판을 보니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장만으로부터 곧 밀명이 왔다.

“중국 장수의 말을 따르지 말고 조선군의 지휘권은 도원수가 행사해 군사의 보존을 최우선적 병법으로 강구하라. 포수는 계속 구하는 중이다.”

계속 구한다는 것은 쉽게 보낼 의향이 없다는 뜻이다. 강홍립이 몰살당한 좌영의 군졸들을 수습하고 있는데, 적 척후병(후금군)이 좌영에 와서 역관을 찾았다, 역관 황연해가 달려오자 적의 척후 부관이 말했다.

“우리가 명나라와는 원한이 있으나 너희 나라와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우리를 치려 하느냐‘.”

강홍립이 응답하고 황연해가 통변했다.

“맞다. 두 사라 사이에는 원한이 없다. 이번 출병은 부득이한 것이다.“

“부득이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00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君臣 관계요, 은혜에 있어서는 父子 사이와 같다. 임진년에 명나라가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선왕(선조)께서는 40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동안 한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다.”

“그것이 이유인가?”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임금은 다르다. 명의 은덕을 은혜로 알지만 재평가하고 있으며,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때로는 거역하는 마음을 품고 너희와도 화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뼈에 묻고 상부에 전하라.”

“사실인가. 그렇다면 조선군의 내심을 진중 장수에게 전하겠다.”

그후 황연해가 부름을 받고 한두 차례 왕복한 뒤에 적이 다시 사람을 보내와 화약을 맺자고 청했다(위민환의 책중일록). 그러나 친명 사대주의에 물든 신하들 때문에 광해는 고민이 많았다. 군사를 명군에 합류시키면 백전백패가 분명하고, 후금이 그 보복으로 조선을 칠 것이다. 후금은 조선과 적이 된 적이 없으니 조선군과 싸울 의향이 없다고 화약을 맺자고 한다. 대신군사를 철수하라고 요구한다. 철수하면 명나라로부터 신의를 저버렸다고 배신자 말을 듣게 된다. 어찌해야 하나. 전투 현자에 와서 보니 외교전이 이렇게 중요한 줄 몰랐다.강홍립은 진중일록을 정리했다.

-임진왜란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병부시랑 양호(楊鎬)가 요동 경략에 임명되었고, 사로(四路) 총지휘로 심양에 주둔하였다. 명군은 네 가지 길을 이용해 누르하치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는데, 사로의 사령관으로 동원된 총병이 6명이다(지금의 기준으로 사단장급). 이중 산해관 총병 두송과 보정총병 왕선, 개원총병 마림,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요양총병 유정이 있고, 이성량의 아들이자 이여송의 동생인 이여백이 퇴역했다가 복귀했다. 조선의 지원군은 유격 교일기가 지원하고 있다. 후금이 망하기를 바라고 있는 예허 부족 1만 5천을 포함해 명군은 47만의 군사를 확보했다. 그러나 장부상일 뿐, 실제로는 10-15만 명 정도이다.

강홍립은 후금군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여진족은 유목보다 호랑이, 표범, 늑대 따위 맹수 사냥을 해서 그 가죽을 벗겨 교역하는 것으로 먹고 살아온 부족이다. 사냥은 일종의 군사훈련이나 다를 바 없다. 사냥을 하려면 열 명씩 조를 짜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데, 이들을 군사조직으로 전환하면 용맹한 군대가 된다.

여진어 중에 니루(niru)라는 것이 있고, 수렵 집단인 만큼 수렵에 참가하려면 10명 정도의 인원 수가 있고, 이 10명의 집단을 지휘하는 사람을 니루이 어전이라고 부른다. 누르하치는 수렵 단위인 이 조직을 전투 단위로 바꾸었다. 300명을 1니루로 하였고, 다시 5개의 니루를 1잘란, 5개의 잘란을 1구사로 삼았다. 1잘란에 1500명, 1구사에 7500명이다. 니루는 총 400개였고, 숫자는 대략 12만 정도다. 이중 3-4만이 사르후 전투에 투입되었다. 명나라 군대는 전멸했다. 쓸데없이 병력을 분산했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조선 원병 역시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강홍립은 이렇게 정리하고 비장의 병략을 세웠다.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3부 4장 광야에서<373>

당초에 강홍립 등이 압록강을 건너게 된 것은 상(광해)이 명나라 조정의 징병 독촉을 어기기 어려워 출사시킨 것이지, 우리나라는 애초부터 그들(후금)을 원수로 적대하지 않아 실로 상대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 그래서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후금 진영)과 몰래 통하게 했기 때문에 심하(사르흐) 싸움에서 오랑캐 진중에서 먼저 통사(通使)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광해군일기 11년 4월8일>

강홍립 군대는 명나라 경략 양호의 지휘 아래 있었다. 양호의 요청에 따라 강홍립이 포수 수백을 보내달라고 함경도에 주둔한 장만 체찰사에게 포수 증병을 요청했다. 강홍립 부대에 포수가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돌아가는 상판을 보니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장만으로부터 곧 밀명이 왔다.

“중국 장수의 말을 따르지 말고 조선군의 지휘권은 도원수가 행사해 군사의 보존을 최우선적 병법으로 강구하라. 포수는 계속 구하는 중이다.”

계속 구한다는 것은 쉽게 보낼 의향이 없다는 뜻이다. 강홍립이 몰살당한 좌영의 군졸들을 수습하고 있는데, 적 척후병(후금군)이 좌영에 와서 역관을 찾았다, 역관 황연해가 달려오자 적의 척후 부관이 말했다.

“우리가 명나라와는 원한이 있으나 너희 나라와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우리를 치려 하느냐‘.”

강홍립이 응답하고 황연해가 통변했다.

“맞다. 두 사라 사이에는 원한이 없다. 이번 출병은 부득이한 것이다.“

“부득이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00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君臣 관계요, 은혜에 있어서는 父子 사이와 같다. 임진년에 명나라가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선왕(선조)께서는 40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동안 한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다.”

“그것이 이유인가?”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임금은 다르다. 명의 은덕을 은혜로 알지만 재평가하고 있으며,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때로는 거역하는 마음을 품고 너희와도 화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뼈에 묻고 상부에 전하라.”

“사실인가. 그렇다면 조선군의 내심을 진중 장수에게 전하겠다.”

그후 황연해가 부름을 받고 한두 차례 왕복한 뒤에 적이 다시 사람을 보내와 화약을 맺자고 청했다(위민환의 책중일록). 그러나 친명 사대주의에 물든 신하들 때문에 광해는 고민이 많았다. 군사를 명군에 합류시키면 백전백패가 분명하고, 후금이 그 보복으로 조선을 칠 것이다. 후금은 조선과 적이 된 적이 없으니 조선군과 싸울 의향이 없다고 화약을 맺자고 한다. 대신군사를 철수하라고 요구한다. 철수하면 명나라로부터 신의를 저버렸다고 배신자 말을 듣게 된다. 어찌해야 하나. 전투 현자에 와서 보니 외교전이 이렇게 중요한 줄 몰랐다.강홍립은 진중일록을 정리했다.

-임진왜란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병부시랑 양호(楊鎬)가 요동 경략에 임명되었고, 사로(四路) 총지휘로 심양에 주둔하였다. 명군은 네 가지 길을 이용해 누르하치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는데, 사로의 사령관으로 동원된 총병이 6명이다(지금의 기준으로 사단장급). 이중 산해관 총병 두송과 보정총병 왕선, 개원총병 마림,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요양총병 유정이 있고, 이성량의 아들이자 이여송의 동생인 이여백이 퇴역했다가 복귀했다. 조선의 지원군은 유격 교일기가 지원하고 있다. 후금이 망하기를 바라고 있는 예허 부족 1만 5천을 포함해 명군은 47만의 군사를 확보했다. 그러나 장부상일 뿐, 실제로는 10-15만 명 정도이다.

강홍립은 후금군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여진족은 유목보다 호랑이, 표범, 늑대 따위 맹수 사냥을 해서 그 가죽을 벗겨 교역하는 것으로 먹고 살아온 부족이다. 사냥은 일종의 군사훈련이나 다를 바 없다. 사냥을 하려면 열 명씩 조를 짜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데, 이들을 군사조직으로 전환하면 용맹한 군대가 된다.

여진어 중에 니루(niru)라는 것이 있고, 수렵 집단인 만큼 수렵에 참가하려면 10명 정도의 인원 수가 있고, 이 10명의 집단을 지휘하는 사람을 니루이 어전이라고 부른다. 누르하치는 수렵 단위인 이 조직을 전투 단위로 바꾸었다. 300명을 1니루로 하였고, 다시 5개의 니루를 1잘란, 5개의 잘란을 1구사로 삼았다. 1잘란에 1500명, 1구사에 7500명이다. 니루는 총 400개였고, 숫자는 대략 12만 정도다. 이중 3-4만이 사르후 전투에 투입되었다. 명나라 군대는 전멸했다. 쓸데없이 병력을 분산했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조선 원병 역시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강홍립은 이렇게 정리하고 비장의 병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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