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가 광산동에 건립한 청년 인재양성 공간

광주 독립운동 산실 ‘흥학관’을 아시나요
최부자가 광산동에 건립한 청년 인재양성 공간
200여평 부지와 건물…1910년대 초부터 운영
학생들 공연·강연·운동 통해 ‘민족혼’ 고취
광주시청 계림동 이전 후 철거…흔적 사라져
 

1929년 9월 10일 조선청년총동맹전남연맹이 정기회의를 개최하고 흥학관을 배경으로 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광주전남독립운동사적지 제공

 

 

일제 강점기때 광주지역 청년학생들의 독립운동 산실이었던 흥학관(興學館)이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주목받고 있다.<관련기사 9면>

1912년, 현재는‘구시청 사거리’라 불리는 광주광역 동구 광산동 일대에는 흥학관이라는 건물이 자리했다. 광주의 갑부로 ‘최부자’로 불리는 최명구(1860~1924)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최종수가 이끌던 단체를 위해 내준 공간이었다. 당시 최종수는 광주공립보통학교(현 광주서석초등학교)의 동창회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동창회는 사회단체가 전무하던 시기, 민족 정신을 부흥시키며 신문·잡지 발행, 강습회, 토론회, 강연회, 정구·축구·야구 등 체육 활동 등을 통한 청년·학생 인재 양성공간으로 흥학관을 사용했다.

1921년에는 최명구가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잔치대신 그 비용으로 200여평 부지에 새롭게 건물을 지었다. 일본식 단층 목조건물로 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과 여러 개의 온돌방 등으로 구성됐다. 강당에서는 연극과 음악 공연, 강연, 토론회 등이 진행됐으며 온돌방은 기숙사 역할을 했다. 또 건물 앞에는 학교 운동장에 해당되는 넓은 공터가 있어 청년학생들이 축구와 야구, 정구 경기 등을 했다.

이후 30년대까지 흥학관은 광주지역 사회단체의 독립운동 본거지로도 활용됐다. 3·1운동의 3대 주축 세력인 신간회 광주지부가 이곳에서 조직됐고, 광주학생운동을 이끈 광주청년회(현 YMCA)와 성진회를 비롯 노동공제회, 전남노동연맹, 광주청년학원 등이 흥학관을 주요 활동무대로 삼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처럼 뜻깊은 건물과 부지를 최명구의 장남인 최상현(1881~1945)은 일제 말 광주시에 기부했다. 그런데 이 건물은 1960년대 광주시청이 광산동에서 계림동으로 이전하면서 철거됐다. 또 2개 필지로 돼 있던 흥학관 건물터와 주변 토지는 10여개로 쪼개져 개인에게 매각됐다.

현재는 주택과 상업 건물들이 들어서며 정확한 흥학관 건물터가 어디인지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다. 광주 동구 광산동 100번지가 국내 항일운동사적지로 지정돼 이곳이 흥학관이 있었던 곳임을 짐작케 할 뿐이다. 흥학관 터는 물론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을 도왔던 최 부자에 대해서도 일부 고령자를 제외하곤 아는 사람이 드문 실정이다.

이에 최근 최 부자 후손과 뜻 있는 인사들이 흥학관 자리 찾기 및 복원 움직임을 보이면서 흥학관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최상현의 손자 최기정씨는 “일제강점기 청년·학생들의 인재양성과 광주지역 독립운동의 산실 역할을 한 흥학관 터를 찾아 최소한 항일사적지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선열들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해야 하지 않겠느냐 ”며 “뜻있는분들과 흥학관 복원 운동도 전개해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조상들의 사상과 의식을 지역민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다”고 밝혔다. /한아리 기자 har@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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