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99. 조선에서 약탈한 도자기 기술, 일본의 칼이 되다

조선서 넘어간 은 제련·도자기 기술로 日 부국강병

조선개발 제련술 도입 양질 銀 생산 조총제작
도요토미, 이와미 광산 은으로 철포·전선 마련
임진년 조선 침략해 학문과 기술, 노동력 약탈

전라도 학살주역 시마즈 도공들 대거 끌고 가
조선도공 후손 제작한 도자기 유럽에서 대인기
조선 가마기술은 日 용광로 제작기술 끌어올려

‘도자기전쟁’ 전과물로 일본은 급속한 산업화
한일병탄 이끈 사쓰마·조슈, 메이지유신 주역
요시마사·노부스케 등 아베조상 조선침탈 원흉
 

일본 교토 코무덤앞에 세워져 있는 비석. 일본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의 조선식민지화를 꼭 이루자는 다짐이 새겨져 있다. 1850년대 정한론자들은 조선정벌의 상징인 코무덤 앞에 모여 히데요시가 완성하지 못한 위업을 달성하자는 결의를 다진 뒤 이 같은 뜻을 담은 비석을 세웠다. 교토 코무덤에는 임진·정유재란 당시 조선·명의 군사와 백성들의 얼굴에서 잘라온 코 12만여 개(학자에 따라서 차이가 있음)가 묻혀 있다.

■ 2019년, 한일 경제전쟁이 벌어지다

한국과 일본이 2019년 8월 2일부터 본격적인 ‘경제전쟁’에 돌입했다. 일본은 7월 4일 대(對)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한 데 이어 8월 2일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국(백색 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 아베내각은 이날 각료회의에서 수출무역관리령을 개정하고 한국을 백색 국가 대상에서 배제했다.

한국민들은 일본 아베내각이 7월부터 수출규제를 시작하자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벌이는 한편 일본여행을 가지 않는 ‘NO BUY NO GO’ 운동을 벌였다. 한국정부도 일본정부가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시킬 경우 양국 모두 경제적 피해를 입을 것이며 한일 관계가 수렁에 빠질 것임을 경고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한국을 백색 국가 대상에서 배제하는 조치를 강행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단호한 대응을 예고했다.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2일 긴급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하고 “적반하장인 상황을 좌시하지 않겠다”며 날 선 발언을 쏟아냈다. 그리고 “도전에 굴복하면 역사는 또다시 반복된다”며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고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여기서 문 대통령이 언급한 ‘또다시 반복’은 역사적으로 ‘임진·정유재란’과 ‘구한말 일제의 조선침략과 강제병탄’을 의미한 것임이 분명하다. 임진왜란과 일제의 조선강점은 일본의 침략에 의해 조선의 산하가 유린된 사건으로 우리가 ‘진’(敗北) 사건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다시 일본에 지지 않고 승리하려면 과거 어떤 이유로 일본에 졌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 우리의 방심과 허약함이 일본을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조선으로 출병하는 일본군 모습. 1894년 7-8월 제작된 일청전쟁 기록 판화첩에 수록된 장면 중 하나. 좌측에 ‘일본조선지나도’라는 글이 보인다. 조선이 일본의 한 변방이라는 표현에서 일본 군부의 조선침략 야욕을 느낄 수 있다. 우측에는 조선국출군지도라는 글이 있다. 조선으로 일본군을 파병하는 것을 기리는 판화이다.

과거의 패인을 아는 것은 미래의 승리를 기약하는 열쇠와 같은 것이다. 과거의 패인은 한 두 가지의 사실만으로 명확하게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여러 가지 상황이 중첩되면서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과거 일본은 어떤 원인들이 합해져 강성했고, 조선은 왜 그리 유약하고 허약한 나라가 됐는지를 살펴봐야만 한다.

그런데 참으로 모순되게도 ‘일본이 강성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땅은 한반도였다. 백제(혹은 마한)사람 왕인은 천자문으로 대변되는 학문을 일본에 전해 그들의 지적능력을 크게 성장시켰다. 1526년 이즈모에서 은광이 발견됐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했다. 모리 가문은 은광을 히데요시에게 헌납했다.

그때 이와미 은광 생산량은 세계 1위였다. 그런데 제련술이 뒤떨어졌던 관계로 원광석의 질은 좋고 함유된 은도 많으나 품질과 생산량은 형편없었다. 조선은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이라는 사내가 은광석과 납석을 섞어서 녹이며 은만 분리되는 ‘회취법(灰吹法)’을 개발한 상태였다.

그러나 조선조정은 은 생산을 금지했다. 은 생산량이 많으면 명에서 은을 바치라는 성화가 들이닥칠 것을 우려해서다. 일본인들은 조선이 외면한 ‘회취법(灰吹法:은 제련법)을 은밀히 입수해 세계 제1의 은(銀) 생산국이 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와미 광산 은으로 ‘문록석주정은(文祿石州丁銀)’이라는 은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은화로 철포와 군선(軍船)을 구입했다. 은을 가지고 조총을 사들이고 또 제작해 병사들을 무장시켜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조선의 학자들과 도공을 끌고 갔다. 강항과 같은 성리학자들은 일본 성리학에 영향을 끼쳐 일본 성리학이 실용적인 학문이 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 그리고 실용적 학문을 중시한 일본은 난학(蘭學:서양학문)을 받아들여 마침내 일본을 근대산업국가로 만든 메이지유신에 성공했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의 도자기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우게 했다. 일본의 도자기들은 유럽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리고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만들게 했다. 도공들은 도자기만 잘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가마를 만들어 불을 다루는 기술은 차츰 일본의 용광로 제조기술수준을 높여 제철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서양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본은 조선도공들이 지닌 야철(冶鐵)기술과 가마축조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대포와 군함을 만들었다. 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사용했다. 결과는 모두 일본의 승리였다. 일본은 조선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게 됐고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일본이 강제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1876년부터 광복을 맞은 1945년까지 일본은 조선을 철저히 유린했다.

일본은 조선식민지 착취를 통해 나라의 부를 키워갔다. 그리고 조선을 병참기지 삼아 만주와 중국대륙을 공략했다. 조선인 청년들은 일제의 총알받이가 돼 전선으로 내몰렸고, 징용에 끌려가 탄광 막장에서 숨져갔다. 조선 아가씨들은 일본군의 성노리개가 돼 만주와 남태평양 일대 섬에서 참혹한 삶을 살았다.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비롯한 동양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다. 일본은 동양의 패권을 쥐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에 패하면서 제국주의 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50여 년 동안 계속해 벌인 전쟁으로 일본 경제는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일본을 군수기지로 사용했다. 수많은 전쟁물자가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건너갔다. 한국에서 벌어진 남북한 간의 전쟁은 일본경제를 살려주는 불씨가 됐다. 패전국 일본은 6·25전쟁 특수를 이용해 다시 경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1850년대부터 세계 정상급 수준을 보이던 산업기술은 미국과의 산업협력관계를 통해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

■ 일본을 이기느냐, 다시 먹히느냐

일제가 패망했지만 조선은 광복 후에도 일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은 정권을 지탱해줄 세력으로 친일세력(군·경찰·행정·경제·법조 등 전반)을 선택했고 이는 광복 후에도 한국이 일본에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나친 대일의존도는 자체기술 개발과 보유를 취약하게 했다.

일본의존도가 높은 산업기술은 결국 한일 간의 역사 갈등이 심각해짐에 따라 경제전쟁을 야기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일본은 한국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1천100여 품목을 면밀히 선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 200여개 품목은 한국경제의 숨통을 조이는 핵심품목이다.

이번 한일 간의 경제전쟁은 표면상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일본 정부가 반발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그렇지만 일부에서는 한일경제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한국의 경제국력이 크게 성장하고 있는 것을 우려한 일본 측의 ‘한국꺾기’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즉, 일본에 종속돼 왔던 한국경제가 반도체 등 일부 분야에서 일본을 제치고 세계최강으로 올라섰으며 이런 추세로 라면 몇 십 년 뒤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한국 때리기’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앞으로 국력을 좌우할 분야는 인공지능분야인데 여기에 들어갈 반도체를 누가 얼마나 어떤 품질로 공급하느냐가 국가의 순위를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한일 간의 경제전쟁은 1500년대부터 고착되기 시작한 ‘강일약한’(强日弱韓)의 구조를 깨트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이다. 반면에 자칫하면 한국경제가 나락으로 추락할 수 있는 위기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느냐, 위기가 결국은 비극으로 귀결되고 마느냐는 우리의 자세와 정신력에 달려 있다.

이번 한일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과거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서 역사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교재로 삼아야 한다. 이번 회에서는 어떻게 해서 조선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는지, 또 조선도공들이 일본 이 부국으로 성장하고 근대화를 이루는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본다.

■ 조선도공들 일본으로 끌려가다

시마즈 요시히로(쇼코슈세이칸 소장위키피디아)

1598년 11월 말 사쓰마(薩摩:지금의 가고시마)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부대는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철수했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지휘하는 수군의 전선에는 남원일대에서 붙잡아온 도공 80여명이 타고 있었다.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1597년 8월 16일의 남원성공격에 참여했던 부대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남원성을 함락시킨 뒤 이 일대를 돌아다니며 도공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정벌에 나서면서 왜장들에게 도공 등 기술을 가진 조선인들을 생포할 것을 지시한데 따른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만든 다도기(茶陶器)의 가치를 익히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주군(主君)이었던 오다 노부나가는 다완(多碗)정치를 펼쳤었다. 다완은 다도(茶道)에 사용되는 다구(茶具)중 찻잔을 말한다. 조선에서 만들어진 다구, 특히 찻잔들은 오다 노부나가가 통치하던 일본에서는 최고의 명품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조선초기부터 중기에 걸쳐 제작된 정호다완(井戶多碗:이도다완)중 최상품은 일본 성 한 채의 값에 해당될 정도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조선의 고급 다완을 수집해 부를 쌓는 한편 자신의 재력을 과시했다. 그는 오사카성과 히젠나고야성에 황금다실(黃金茶室)을 차려 놓고 다이묘들을 불러 다회(茶會)를 열었다. 그리고 다이묘들에게 다완을 하사했다. 다완은 최고실력자와 긴밀한 관계임을 증명하는 증표가 됐다.

당시 최상품으로 평가되던 조선의 다완은 찻잔 아래쪽에 매화피(梅花皮)가 있던 찻잔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왜장들은 조선에서 이 매화피 찻잔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매화피 찻잔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그런 찻잔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도공들을 끌고가 일본에서 매화피 찻잔을 비롯한 조선 다완을 생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육군과 수군을 동시에 전라도로 진격시켰다. 지금의 경남 고성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구례 석주관을 돌파한 뒤 남원성 공략에 나섰다.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가 휩쓸고 간 곳은 남원-장성-영광-함평-무안-나주-강진-해남-완도-진도 일대다. 시마즈 부대는 수많은 인명을 살상해 코를 베어가는 한편 각종 문화재와 값진 물건들을 노략질 했다.

임진·정유재란 기간 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투부대 외에 특수임무를 띤 6개 부대를 운영했다. 이는 도서·공예·포로·금속·보물·축부의 6개 약탈 전담부가 그것이다. 도서부는 조선의 서적과 책자(典籍)를, 공예부는 조선의 전통 공예품과 공장(工匠)을, 포로부는 조선의 젊은 남녀를, 금속부는 병기 및 금속예술품을, 보물부는 금은보화와 진귀품을, 축부는 가축 포획을 전담했다.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순천왜성에 고립돼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해 부산포로 이동한 뒤 곧바로 일본으로 귀국했다. 귀국선에는 남원은 물론이고 지금의 경북 고령군 성산 등지에서 끌고 온 조선인 도공 80여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김해’, ‘박평의’, ‘심당길(심찬)’ 등을 비롯 김(金),신(申),이(李) 등의 도공으로 모두 22개 성(姓)씨의 사람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국민학교(초등학교)역사교과서에 실려있던 코 수량확인 모습. 도요토미히테요시가 조선에서 보내온 코를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이 배에는 또한 도공 외에도 3만8천717개의 코(鼻)가 실려 있었다. 이들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을 학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끌고 간 도공들을 나에시로가와(苗代川)로 집단 이주시켰다. 현재의 가고시마 미야마(美山)다. 이들 중에는 전북 남원에서 끌려온 심당길(沈當吉:)沈壽官 家의 시조) 과 박평의(朴平意)등 조선 사기장이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사쓰마 야키(薩摩燒:사쓰마 도자기)라는 도자기 유파를 열었다. 사쓰마는 현재 일본 큐슈(九州) 서남쪽 가고시마 현의 옛 지명이다. 박평의는 사쓰마에서 백토를 발견해 흰 백자를 생산할 수 있게 한 사람이다. 그 이전에는 사쓰마에서 백토가 나지 않았던 관계로 검은 도자기만 생산됐다. 심당길은 박평의와 함께 ‘불만 일본 것이고 나머지는 조선의 솜씨’라는 뜻의 ‘히바카리(火計り) 다완’을 만들어냈다. 사쓰마 도자기(薩摩燒)는 이곳 사쓰마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를 일컫는 말이다.

조슈 번 번주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또한 조선에서 도공들을 끌고 갔다. 조선도공들은 우여곡절 끝에 현재의 야마구치현 하기(萩)에 정착했다. 조선인 도공 이작광은 히로시마에서 활동했고 이경은 하기에 정착해 ‘하기야키’(萩燒)의 원조가 됐다. 이경은 사카모토 고라이자에몬(坂本高麗左衛門)이라는 이름과 무사 신분을 받았다. 이들 외에도 다섯 명의 유능한 조선인 사기장이가 하기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무라번(大村藩)의 지배자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도 전남 순천에서 도공 이우경을 끌고 왔다. 오무라 번은 규슈(九州) 북서부 나가사키 현(長崎縣)이다. 나가사키 현 하사미(波佐見)에서는 해마다 봄이 되면 ‘도조제’(陶祖祭)‘가 열리고 있다. 하사미에는 도자기 관련 업체가 500여개가 된다. 도자기업에 종사하는 주민도 3천여 명에 달한다.

도조제는 하사미가 도자기의 마을이 될 수 있도록 도자기기술을 전해준 이우경을 기리는 행사다. 이우경은 이곳에서 이름난 도자기 ‘하사미야키’(波佐見燒)를 구워냈다. 오무라시 혼쿄지(本經寺)라는 절에는 오무라 요시아키의 묘가 있다. 그 묘 앞에 ‘조선인 秀山’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秀山’(슈잔)이 이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도공 이삼평이 양질의 백토를 발견한 이즈미야마에 세워진 기념탑.

나가사키 이웃에 위치한 사가 번(佐賀藩)의 아리타(有田)에서는 조선 사기장 이삼평(李參平)이 일본 최초로 백자를 구워냈다. 이삼평은 임진왜란 때 끌려와 1616년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자기 원료인 백자토를 발견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이삼평은 도자기마을인 사가 현 아리타에서 일본 백자의 도조(陶祖)로 인정받고 있다.

이삼평이라는 이름은 그의 일본 이름 ‘가나가에 산베이’(金江三兵衛)에서 유추해 낸 이름이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이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그의 정확한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다. 아리타에는 이삼평을 기리는 ‘도잔신사’(陶山神社)가 있으며 신사 위쪽 산 정상에도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는 사가 번 출신으로 와세다대학을 설립한 오쿠마 시게노부가 후원해 세워진 것이다. 이삼평 기념비 뒷면에는 ‘大恩人’(대은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가 번은 아리타에서 생산된 도자기로 돈을 벌어들여 대포와 군함을 만들었다. 그리고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됐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은 동양 최강국이 됐다. 결국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도공들의 기술과 일본인들의 노력이 일본을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마침내 조선정벌에 성공했다.

■ 일본, 도자기 산업으로 부강해지다

조선에서 건너간 회취법은 일본의 은 생산을 대폭 늘려 일본을 부강케 했다. 일본은 막대한 은으로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조총을 구입하고 마침내 자체 생산하는 시설을 갖췄다. 그리고 병사들을 무장시켜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군은 조선에서 장인들을 끌고 가 또 한 번의 국가부흥계기를 맞게 된다. 바로 일본도자기산업의 부흥과 도자기 수출에 따른 막대한 국부축적이다.

일본은 조선에서 끌고 온 도공들을 보호하면서 찬란한 도자기 문화를 꽃피우게 했다. 임진왜란 전에 일본인들은 주로 목기를 썼다. 기껏해야 토기였다. 그런데 납치해온 조선도공들이 멋진 자기들을 만들어내니 일본의 자기문화가 급속히 발전했다. 여기다 1644년 히가시지마토쿠에몬(東島德右衛門)이라는 아리타 상인이 붉은 염료법 ‘아카에’(赤繪)‘를 배우면서 도자기 제작에 대혁명이 일어났다.

이삼평 등 조선도공들은 백자에 울긋불긋한 문양과 각종 화려한 꽃그림, 풍경들을 집어넣었다. 크면서 매우 화려한 아리타자기는 유럽 상인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마침 당시 명과 청은 해금(海禁)정책을 시행하면서 외국과의 무역을 제한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대량으로 사들여 유럽 각지에 팔아넘기던 무역상들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이때 중국도자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아키다자기가 등장한 것이다. 당시 일본의 대외무역권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보유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유럽으로 가져간 아리타 자기는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12대 심수관이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높이 77㎝의 사쓰마 도자기.

아리타자기의 명성은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사가 번(지금의 후쿠오카 부근)과 사쓰마 번이 자기를 출품했는데 아리타 자기가 박람회 대상을 탄 것이다. 아리타 자기는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서도 대상을 수상했다.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아리타자기는 유럽에 일본바람을 일으켰다.

유럽 화단은 일본미술의 영향을 받아 화려함을 추구했다. 일본의 화풍이나 문화를 선호하는 ‘자포니즘’(Japonisme)이 유럽을 휩쓸었다. 자포니즘이 확산됨에 따라 아키타 자기는 더욱 많이 팔려나갔다. 일본은 유럽시장에서 돈(銀貨)을 쓸어 모았다. 큐슈의 가고시마((薩摩:사쓰마)와 야마구치(長州:조슈)는 도자기를 팔아 비축한 군비로 막강한 군사를 길렀다. 그리고 이 군사들은 메이지유신을 성공으로 이끈 막강한 힘이 됐다.

■ 정한론의 중심지 사쓰번과 조슈번

사쓰마 번과 조슈 번 지도(그래픽 류기영)

1830년 사가번(佐賀藩) 10대 번주에 17살의 나베시마 나오마사(鍋島直正)가 올랐다. 그는 난가쿠(서양학문)에 몰두하는 한편 각종 개혁조치를 취했다. 1840년 아편전쟁이 터졌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청나라는 허망하게 졌다. 청나라가 ‘종이호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서양각국들은 중국에 경쟁적으로 진출해 이권을 챙겼다. 나오사마 등 일본 번주들은 유럽 각국들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중국을 보면서 강병(强兵)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844년 네덜란드 군함 팔렘방호가 나가사키에 기항하자 나오마사는 이 전함에 올라 내부구조와 장착된 함포 등을 유심히 살폈다. 이후 그는 무기연구소인 화술방(火術方)을 설치해 무기 개발과 훈련에 착수했다. 나오사마는 1852년 근대 용광로인 반사로(反射爐) 제작에 성공했다. 아리타의 전통기술을 이용해 1천300도가 넘는 고열 가마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용광로에서 생산된 좋은 품질의 철로 나오사마는 철제 대포를 비롯 각종 무기를 양산했다. 일본 막부는 사가번에 대포 50문을 주문하기도 했다. 사가 번 이웃이었던 사쓰마 번은 자극을 받았다. 사쓰마 번의 11대 번주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는 옷감과 사진, 유리, 대포, 전선을 만드는 집성관(集成館)을 설치했다. 집성관은 지금의 근대 공업단지 성격의 단지였다.

1852년 사가번이 반사로 제작에 성공하자 나리아키라는 사가 번의 기술을 배우는데 힘썼다. 나리아키라는 1854년 대포 16문이 장착된 370t 군함을 건조해 막부에 헌납하기도 했다. 마침내 사쓰마 집성관에서도 반사로 제작에 성공했다. 이곳에서도 사쓰마 도자기 가마의 내열 기술이 응용됐다.

사쓰마 번은 서구의 군사기술과 군비제도를 채택하는 한편 자체 생산한 대포와 각종 무기로 중무장했다. 사쓰마 번은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봉건영주)으로 급부상했다. 사쓰마 번은 1866년 3월 7일 적대관계에 있었던 조슈 번(지금의 야마구치현)과 극적으로 정치·군사적 동맹을 맺고 에도 막부 타도에 나섰다. 이 동맹이 바로 삿초 동맹(薩長同盟:삿초도메이)이다.

당초 조슈번은 존왕양이운동(尊王攘夷運動)의 본거지였다. ‘존왕양이’는 ‘왕을 받들고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뜻이다. 조슈번은 서구열강의 압력에 막부(바쿠후)가 국교를 연 것에 대해 반발해 서양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 조슈‘번을 정벌하는데 앞장섰던 세력이 바로 사쓰마 번이었다. 그러나 일본 개혁을 위해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이 손을 잡은 것이다.

■ 조선침략에 앞장 선 삿초동맹 권력자들

삿초동맹 세력은 이후 메이지유신 시대를 열었다. 삿초동맹 세력과 권력승계자들은 대부분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년 8월 4일~1859년 10월 27일)의 제자였거나 영향을 크게 받은 이들이었다. 숙부가 설립한 교육기관 송하촌숙(松下村塾)에서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천황 아래에서 만인이 평등하다)과 정한론(征韓論: 조선 정벌론)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후에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던 이토 히로부미,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이노우에 분타(후에 이노우에 가오루로 개명), 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 송하촌숙 출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수시로 했다.

“무장을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홋카이도로 진격해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아야 한다. 오키나와를 제후로 만들고 조선을 책봉해 조공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들을 노획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아야 한다.”

일본군의 경복궁 무단점령을 묘사한 판화사진. 日淸戰爭錦繪(일청전쟁니시키에)는 일청전쟁 주요 장면을 판화로 제작한 것이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이 발발했던 1894년부터 1895년까지의 일본군 전투모습이나 위용을 새긴 전쟁판화를 제작해 남겼다. 小林淸親(고바야시 기요치카)가 제작한 작품이다.

삿쵸동맹 지도자들은 요시다 쇼인의 영향에 따라 대동아공영이라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과 만주를 침략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조슈번 군벌 가문출신인 아베신조 총리의 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는 육군대장으로 1894년 경복궁 습격을 벌였던 인물이다.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2차대전 A급 전범이다. 아베총리는 평소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꼽았다.

○사쓰마번 출신 주요인물

사이고 다카모리 - 정한론자

오쿠보 도시미치 - 총리

오야마 이와오 - 육군원수, 청일전 러일전 참전

도고 헤이하치로 - 해군원수 청일전 러일전 참전

야마모토 곤노효에 - 해군대장, 청일전 러일전 참전, 해군대신, 총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 - 육군중장, 강화도조약, 총리대신

마쓰카타 마사요시 - 총리대신

○조슈번 출신 주요인물

가쓰라 다로 - 육군중장, 청일전쟁 참전, 대만총독, 총리대신, 가쓰라-태프트 밀약

데라우치 마사타케 - 육군대장, 청일전 러일전 참전, 한국통감, 조선총독

야마가타 아리토모 - 육군원수 청일전 러일전 참전,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 총리대신. 조선초대총독

이노우에 가오루 - 외무대신, 명성왕후시해(을미왜변) 주모자

미우라 고로 - 육군중장, 조선공사, 을미왜변

노기 마레스케 - 육군대장, 청일전, 러일전 참전

소네 아라스케 - 한국통감, 기유각서

하세가와 요시미치 - 육군원수, 청일전 러일전 참전, 조선주차군사령관, 조선총독

고다마 겐타로 - 육군대장, 대만총독, 내무대신, 육군대신, 육군참모총장

오시마 요시마사 - 육군대장, 1894년 경복궁침공, 관동주총독, 아베신조총리의 고조부

일본군 경복궁 난입을 지휘한 오시마요시마사. 일본 아베외상의 고조부다.

도움말/박종인, 김성은, 김세곤, 안영배

그래픽/류기영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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