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4부 풍운의 길 1장 인조반정<403>

“누구에게 하는 말버릇인고?”

정작 화를 내는 사람은 이귀였다. 김류는 지은 죄가 있어서 수모를 꾹꾹 참고 있는데, 이귀는 자신이 당한 것처럼 버럭 화를 냈다. 젊은 놈이 싸가지없이 자기 용맹을 믿고 상관에게 대드는 것이 꼭 자신이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 하더라도 엄연히 장유유서가 있는데 어른을 똥막대기 취급하다니, 저런 놈을 내버려두었다가는 언제 경을 칠지 모른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왜, 내가 잘못 말했습니까? 김류 대장은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이유로 출동을 미적거렸다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대 선배고 어른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지요. 혁명을 눈치 봐가면서 합니까? 목숨 걸고 하는 것 아닙니까.”

이괄의 부대 정탐병이 김류 집안을 살피고 돌아와 보고한 것을 이괄이 알린 것이었다. 딴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다가 적전분열에 자중지란이 일어나면 죽쒀서 개 주는 꼴이다. 이귀는 일단 참기로 했다.

“이 장수, 지금 시시비비를 따지면 다 죽는다. 지금이 중대한 국면이란 말일세. 우선 병사부터 지휘하게. 이 공의 공이 어디 가겠는가? 어서 군사 진영을 짜서 창덕궁으로 가게.”

이귀 곁에 있던 이시백·이시방도 이괄을 달랬다. 두 장수는 이귀의 아들들이었다. 3부자가 목숨을 걸고 반란에 나선 것이니 한 치의 오차가 있어선 안되는 것이다.

“이괄! 아버지가 그대의 능력을 알고 잠시나마 진군대장으로 임명했던 것 아닌가. 김류 대장이 돌아왔다면 자중지란을 막기 위해서도 제 위치로 되돌려 놓은 것이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어서 아버지 뜻을 따르게. 자네 능력을 아는 분이 아버지만한 분이 어디 있는가.”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친구이자 동지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이괄은 군사를 조련하고 부리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이괄 군사였길래 삼엄한 창의문 공략도 손쉽게 일궈냈던 것이다. 춥고 거친 산악지대에서 조련된 용맹스런 함경도 부대가 도성 수비대를 섬멸해버린 것은 우수 정예병으로서의 힘도 컸지만, 이괄의 뛰어난 지휘력도 한 몫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괄은 다혈질에 자만심이 강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급한 성격을 갖고 있다. 군사 지휘는 뛰어났지만, 이 때문에 상급(上級)들이 위태위태하게 그를 바라보고, 더러는 그를 불신하고 있었다.

이수일이 창덕궁을 뚫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수일도 이괄 만큼이나 성격이 모난 사람이었다. 임진왜란이 나자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으나 예천·용강전투에서 연패했다. 그후 회령부사에 이어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후의 일이지만 정유재란 때 도체찰사 이원익의 요청으로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멋대로 행동하면서 명을 어겨 장형(杖刑)을 받은 괴팍한 성질의 인물이었다.

결국 두 성질이 창덕궁 점령의 경쟁자가 되었다. 이수일은 아버지 뻘이었으나 이괄은 안면몰수하고 이수일 부대를 제치고 창덕궁을 치기 시작했다. 그때 이서(李曙)는 황해도 장단에서, 이중로(李重老)는 경기도 이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창덕궁으로 들어왔다. 훈련도감의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도 반정군에 가세했다. 이수일이 이괄에게 소리쳤다.

“이렇게 되면 합동 작전일세. 앞서 나가지 말라!”

“합동작전이라뇨? 내 손으로 왕의 모가지를 딸 생각인데, 무슨 합동작전 같은 소릴 하시오?” 이괄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치라는 듯 퉁을 치고 진격했다. 부대원들을 세 조로 나누어 한 조는 정면으로 공격하고, 다른 조는 옆 담장을 사다리를 타고 넘도록 하고, 나머지 한 조는 그가 직접 지휘했다. 왕실의 근왕병들은 지리멸렬했다. 벌써 도망병이 생기고, 맞대거리해도 그냥 묵사발이 되었다.

그때 광해군은 병조좌랑을 지낸 김자점이 보낸 주찬으로 김상궁이 벌인 유연에서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이괄 부대가 쳐들어오고, 뒤이어 이수일, 이서·이중로 부대가 들이닥치자 그때서야 부랴부랴 의관(醫官) 안국신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사실은 연회를 주선한 김자점도 반광해군 파였다. 그는 인목대비 폐모론이 발생한 이후 벼슬을 단념하고, 이귀·최명길과 함께 반정을 기도한 사람이었다. 광해는 등잔밑이 어두운 줄 모르고 이렇게 심기가 늘어져 있었다.

광해는 반란의 기미가 있다는 것을 측근으로부터 몇차례 제보를 받았지만 지쳤던지 이상하게 이것들을 묵살했다. 임진왜란이 났을 때 분조를 이끌던 총명한 세자 광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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