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서
<1>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선생
길림성 화룡시 산기슭에 자리한 대종교 3종사 묘
김교헌 2대 교주 ·서일 독립군단 총재 활약상 담아
나철, 전남 보성 출신…오기호 등과 ‘유신회’ 조직
“단군정신 알려 민족 정기 바로잡자” 대종교 창시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해다. 아울러 대종교의 창시자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던 홍암 나철 선생이 일제의 탄압에 맞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103주기다. 전남 보성 출신인 나철 선생은 1910년 중국 만주에 진출해 활발한 포교활동과 독립운동 기지 역할을 했다. 특히 외세침략에 맞서 민족정신을 바로잡고자 대종교를 창시해 구국운동과 민족중흥에 앞장섰다. 독립운동에 한 평생 헌신한 나철 선생은 일제강점기 수많은 항일 애국열사를 배출하는 등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의 활동에 비해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조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본보는 나철 선생을 비롯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역,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현장, 윤동주 생가 등 중국 동북 3성(흑룡강성·요녕성·길림성)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찾아 현재의 모습 등을 총 9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대종교 초대 교주 홍암 나철 선생

취재팀은 먼저 중국 길림성 화룡시에 위치한 나철 선생을 비롯한 대종교 3종사 묘비를 찾아 나섰다.

중국 화룡에서 용정으로 가는 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인 청호주유소에서 옛 도로를 따라 다시 화룡쪽으로 조금 가자 왼쪽 산기슭에 대종교 3종사 묘역이 있었다. 도로에서 100여m 정도 떨어져 있어 차에서 내려 3분 정도 걸어가니 묘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묘역은 길가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비교적 잘 정비돼 있었지만 봉분은 작고 초라해 보였다. 맨 왼쪽은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가운데는 대종교 대종사인 나철, 오른쪽에는 2대 교주 김교헌 종사가 묻혀 있었다. 각각의 무덤 앞에는 높이 1m 정도의 묘비와 상석이 놓여 있고 세분의 봉분 전체를 돌이 둘러싸고 있었다. 묘의 우측에 조그마한 돌 비석이 서 있는데 앞 면은 ‘반일지사무덤’이라고 쓰여 있었다.

뒷면에는 ‘반일지사 라철, 서일, 김교헌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지구에서 한때 화룡시 청호를 기지로 반일 계몽운동과 반일 교육활동을 진행했다. 그들은 민중의 반일의식을 높이고 인민의 반일 사상 각오를 높이기 위해 많을 일들을 하였으며 반일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일이 령도한 북로군정서 소속의 반일 무장부대와 국민회 소속의 반일 무장 부대가 1920년 10월 화룡지구에서 협동작전을 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청산리전투는 일본 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반일 운동이 깊이 있게 전개되도록 힘있게 추동하였다’라고 쓰여있다.

묘비를 보고 나니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숨겨진 활약상을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역사현장이었으나 가슴아프게도 이들의 역사는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묘지 또한 여름철이어서인지 잡초가 무성해 살아있는 역사현장 보존에 많은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선생

홍암 나철(1863~1916) 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 본명은 나두영(羅斗永)이었으나 나인영(羅寅永)으로 개명했다가 대종교를 창시한 이후 철로 바꿨다. 호는 홍암(弘巖). 29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해 관직생활을 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침략야욕이 거세지자 1905년 5월 관직을 사임했다.
 

전남 보성군에 세워진 홍암 나철 선생 유적비

이후 선생은 강진 출신 오기호, 부안 출신 이기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유신회’를 조직해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당시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선에 의해 포츠머스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게 됐다. 나철 선생은 이 회의에서 우리나라 장래에 대한 문제가 다뤄지리라 믿고 우리의 입장을 미국에 호소하고자 미국으로 가고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본공사 임권조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같은 해 6월, 유람을 빙자해 일본 동경에 가서 다시 미국으로 가고자했지만 이것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중국 화룡에 위치한 대종교 삼종사 묘역. 왼쪽부터 서일 대한독립군단 총재, 나철 대종교 대종사, 김교헌 대종교 2대 교주이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민족 정신을 바로잡고자 대종교를 창시하다

나철 선생은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나라의 국권을 일제에게 완전히 빼앗기자 새로운 구국운동과 민족중흥의 방법을 모색했다. 선생은 나라를 빼앗긴 원인 중 하나가 사회에 기회주의가 만연해 개인이 국가를 수호하기보다는 힘센 외세에 붙어 자신의 출세만을 추구하게 됐고, 이로 인해 나라 전체가 부패하고 민족의 기상이 꺾였다고 판단했다.

선생은 흔들리는 민족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단군의 정신을 알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단군 정신으로 민족정기를 새롭해 해 보국안민과 제인구세를 기해 보자는 의도였다.
 

반일지사 나철, 서일, 김교헌 등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지구에서 반일 계몽운동과 반일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서일이 총사령관으로 있었던 북로군정서는 국민회 소속 반일 부대와 함께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승리하며 일본 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줬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나철 선생은 1909년 1월 15일 평소 뜻을 같이하던 오기호·이기 등 수십명과 함께 단군교를 공식 종교로 공표했다. 교주로 추대된 선생은 1910년 단군교를 대종교로 개명하고 대종교의 창시자가 됐다. 총 본사를 백두산 아래 중국 화룡현 청파호로 옮겨 대종교를 크게 번창시켰다.

대종교 3종사의 묘비를 뒤로한 채 서일 총사령관이 크게 활약한 청산리 전투 현장으로 향했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