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감옥엔 독립운동가들의 ‘처절한 외침’ 메아리”

항일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서
<7>중국 대련 여순감옥
“여순감옥엔 독립운동가들의 ‘처절한 외침’ 메아리”
중국 대련에 위치한 형무소, 부지 2만7천500㎡·감방 257곳
안중근·신채호·이회영 선생 등 흉상·기록 전시돼 있어
일본의 조선침략 부당함 전 세계에 알린 관동도독부 법원도
 

중국 대련 여순감옥 한켠에 자리한 안중근 의사 전시관.

“내가 죽은 뒤에 내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우리나라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냄)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이 된 의무를 다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중국 다롄 여순감옥에 수감된 안중근 의사가 사형 집행 전에 남긴 유언이다. 여순감옥은 안중근 의사뿐 아니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못이겨 순직한 곳이다. 이곳은 과거와 현재에도 여전히 끔찍한 그날의 고통이 남아 있다.

◇여순감옥과 독립운동가들

중국 대련에 위치한 여순감옥(여순일아감옥구지)은 일제강점기 형무소였으며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됐던 곳이다. 또한 수많은 항일 열사들이 수용돼 잔인한 고문으로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여순과 대련 구역을 점령했고 두 번의 공사를 거쳐 여순감옥을 지었다.
 

여순감옥 밖에서 바라본 담장 모습.

감옥은 부지 2만7천500㎡에 감방 253곳과 지하감방 4곳, 15곳의 부설공장을 가진 규모로 2천명을 수감할 수 있으며 높이는 4m이며 길이 725m의 붉은 벽돌로 지은 담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이 모양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와 매우 흡사했다. 담장 안으로는 검색실, 고문실, 교수형실, 공장 등 15개의 혐오시설과 벽돌공장, 과수원, 채소밭 등 수감원들의 강제 노동현장이 보존돼 있다.
 

수용자들이 수감됐던 여순감옥 감방. 감방 안에는 수용자들이 이용했던 화장실로 쓰인 커다란 통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방에는 낡은 책상, 비좁은 화장실 만이 남아 있었다. 또한 쇠창살로 만들어진 창문 사이로 햇빛만 들어올 뿐 그곳은 말 그대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일본군은 겨우 2~3명이 들어갈 방에 수십명을 한꺼번에 넣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수용자들은 발을 뻗고 눕지도 못한 채 서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거나 앉아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감옥에는 암방이 있다. 이곳은 일본 관리에게 복종하지 않은 항일지사와 애국동포들을 잔혹하게 학대하던 감옥 안의 감옥이라 불린다. 암방은 모두 4칸이 있는데, 매 칸은 길이 1.7m, 너비 1.45m, 높이 2.39m 밖에 안 된다. 사면이 벽으로 완전히 막혀, 하루 종일 아무런 광도 없고 습기가 또한 가득해보였다. 벽에는 나팔 모양의 구멍이 있는데 간수는 이 구멍을 통해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고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불복하면 특수 제작한 무거운 수갑을 채우고 고무로 만든 옷을 입혔다. 암방에 갇히면 적어도 3~5일, 많게는 1주일 동안 갇혀 있었다고 한다. 수일 동안 암흑 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와 햇빛을 보고 실명한 죄수들도 있다고 하니 일본의 끔찍한 만행을 다시한번 되새겨 볼 수 있었다.

감옥의 고문실은 수감된 죄수들의 인권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던 곳이다. 물고문부터 대나무로 만든 곤장과 쇠몽둥이까지 다양한 고문실이 있는데 이곳에서 일부 항일투사들은 심문 중에 생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1908년 일본 고나동도독부는 ‘벌금 치 태형처벌령’을 반포하고 감옥 내에서 임의로 형벌을 가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고문실 뿐 아니라 사형장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참혹함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사형장은 1934년 신설한 교수형장이다. 이곳에서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수천명의 항일지사와 애국동포가 비밀리에 처형됐다고 한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700여명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1942년 12월에는 9명의 항일지사들이 처형됐으며 중공당원 유봉천과 하한청 등 6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감옥 한켠에 자리한 ‘안중근 의사 전시관’

여순감옥은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의 흉상과 기록들이 남겨져 있다. 안중근 의사의 흉상은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일본에 굴하지 않은 그의 꺾이지 않는 독립정신을 말해주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동양평화의 교란자요 일본 제국주의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일본은 당시 하얼빈을 관할하고 있던 러시아에 압력을 행사해 러시아 헌병으로부터 바로 안중근 의사를 넘겨받아 주하얼빈일본총영사관에서 기본취조를 마치고 11월 3일 여순감옥에 수감했다. 안중근 의사는 수감중에 200여편의 유묵을 남겼으며 현재 발견된 진본의 상당수가 국가보물로 지정됐다. 안중근의 수감 감방과 순국지, 유해매장지 등은 일본의 철저한 은폐로 아직도 정확한 위치를 찾기 어려운 상태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함께 만들어진 전시관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감옥 한켠에 마련된 전시관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띈다.

◇신채호·이회영 등 흉상·기록 남겨 있어

안중근 의사와 함께 감옥에는 신채호, 이회영 선생의 흉상과 관련 기록이 남겨져 있다.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어났다.
 

여순감옥에 있는 신채호 선생의 흉상.

19세인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한 신채호는 그곳에서 백안 박은식이 주도한 진보적 유학을 접하면서 유교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든 신채호는 의열단의 요청을 받고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하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이 선언은 국내외 동포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

신채호는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으며 1927년 9월에는 이필현과 함께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1928년 4월에는 스스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같은해 이 같은 혐의로 10년 형을 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6년 순국했다.
 

여순 감옥에 자리잡은 이회영 선생의 흉상.

우당 이회영(1867~1932) 선생은 1867년 서울 남산골 저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였다.

하지만 나라잃은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회영 선생은 상하이 북역 사건, 이모이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 텐진항 일본 군수 물자 수송선 폭파 사건, 텐진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 등 잔인안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는 밀정의 밀고에 의해 대련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65세의 나이에 체포된 그는 일본군의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관동도독부 법원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06년 랴오닝성 남부에 관동주(關東州)를 만들고 통치기구로 뤼순에 관동도독부를 설치했다.
 

중국 대련에 위치한 관동도독부 법원. 일제시절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

도독부 산하엔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을 뒀다. 원래 전체 면적 5천300㎡ 규모였던 법원은 현재 1천300㎡만 남은 상태다. 법원 건물은 1945년 해방 후 잠시 다롄시에서 이용하다가 1953년부터 병원으로 운영됐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모습을 재현한 재판장.

1910년 2월 안 의사에 대한 6차례의 공판이 열렸던 2층 고등법원 법정에는 당시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곳을 재현해 놨다. 재판장에 들어서면 안중근 의사의 당당함 외침이 들리는 듯한다. 고등법원 법정에서 열린 공판은 안 의사에 대한 재판이라기보다는 일본에 대한 안 의사의 재판이었다. 안 의사는 검찰관과의 치밀한 논리 싸움을 통해 대한독립의 정당성과 일본의 조선침략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렸다.

안중근·신채호·이회영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겪었던 모진 고문 현장을 뒤로한 채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나섰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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