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의 땅’…조국의 등불이 된 연변 ‘명동촌’

항일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따라서
<8>중국 길림성 명동촌
‘선구자의 땅’…조국의 등불이 된 연변 ‘명동촌’
명동학교, 1천여명 졸업생 배출…독립운동 펼칠 인재 양성
윤동주 시인이 그토록 그리워 하던 고향 집…‘윤동주 생가’

일제시대 총과 칼이 아닌 펜으로 일본에 맞선 항일독립운동가들. 이들은 일제의 지배가 한층 더 악랄해진 이후에도 민족의 미래를 위해 머나먼 타국땅에서 교육에 힘썼다. 이곳은 바로 중국 길림성에 위치한 명동촌이다. 당시 허허벌판인 명동촌에서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면서 민족운동과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반일 애국교육이 이뤄졌다.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 등이 배출됐으며 이들은 이후 독립운동뿐 아니라 해방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현재 명동촌은 여전히 당시 치열했던 민족교육의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간도 대통령’ 김약연 선생이 세워

‘동쪽, 즉 조선을 밝힌다’는 그 이름대로 조국의 내일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던 땅, 그곳이 바로 명동촌이다. ‘간도 대통령’이라 불리는 규암 김약연(1865~1942)이 한민족기독교공동체인 명동촌을 세워 민족의 앞날을 밝혔다. 김약연은 함북 회령의 유가적 가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약연이 고향 사람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은 것은 1899년 2월이었다.
 

명동학교에 전시돼 있는 김약연 목사의 생애.

김약연은 문치정, 문병규, 김하규의 가솔 등 142명과 함께 북간도 화룡현 부굴라재로 이주를 감행한다. 본래 우리 조상인 고구려인들의 땅이므로 개간해 우리 땅을 만들어보자는 웅지를 품은 김약연은 땅 수백정보를 사들여 개간해 한인 집단 거주지를 조성했다. 명동촌은 1905년까지 마을이 거의 완성됐다. 명동촌은 문익환, 윤동주와 나운규, 송몽규 뿐 아니라 ‘서전서숙’을 개설한 이상설 등이 이곳에서 활동했고 안중근 의사와 같은 독립 의사들의 은거지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민족교육기관 ‘명동학교’

명동학교는 1908년 명동촌에 설립된 민족교육기관이다. 1906년에 설립됐다가 1년만에 폐교된 서전서숙의 민족교육정신을 계승해 애국지사들이 화룡현 명동촌에 설립했다고 한다. 교육이념을 ‘독립정신’에 두고 신교육 체제를 세워 숙장에 박무림, 숙감에 김약연, 재정에 문치정 등이 취임했다.
 

중국 길림성 연변 명동촌에 자리잡은 민족교육기관 명동학교. 이곳에는 일제시대 당시 명동촌에 대한 역사자료와 교육현장 등 과거의 흔적들이 전시돼 있다.

여기에서는 일제가 나라를 강탈한 것에 대한 저항과 분노가 폭발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반일 애국교육이 이뤄졌다. 명동학교가 1925년 폐교되기까지 1천여명의 애국청년들이 졸업했다. 이 중에는 익히 알려진 윤동주와 송몽규 등이 있다.

당시 명동학교의 교육목표는 항일독립운동정신으로 입학시험이나 작문시험에는 반드시 애국과 독립의 내용을 포함시키도록 했다고 한다. 또 매주 토요일에는 토론회를 열어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했다.
 

명동학교에 있는 윤동주생평전시관.

현재 명동학교 안에는 명동촌에 대한 역사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또 당시 학생들이 입었던 교복과 책상을 재현해 놓았다. 교복은 계량한복으로 남학생은 검은색, 여학생은 흰색이다. 교실 안에는 윤동주 시인을 형상화한 마네킹이 있으며 당시의 교육현장을 말해주고 있다.

학교 앞에는 운동장이 있는데, 이곳은 당시 학생들이 자유롭게 뛰어놀았다고 한다. 지금은 놀이터로 된 곳도 있지만, 과거에는 놀이터가 전혀 없었고 허허벌판이었다고 한다.

명동학교의 한 교실에는 윤동주 시인을 형상화한 마네킹이 있다.

명동학교 뒷산에는 김약연 목사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있던 비석은 현재 명동교회 앞으로 옮겨져 있다. 1911년에는 이동휘가 명동에 와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해 명동학교에 여학교도 병설했다고 한다. 간도에서는 최초의 여학교로 이동휘의 딸 이의순이 가르쳤다. 기미년 3·13만세시위 때 중학생들이 충렬대를 조직해 시위의 맨 앞장에 섰던 학교로, 이로 인해 간도참변 때에 일본군대에 의해 완전히 불타버린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일본의 만행을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다.
 

현재 명동학교에는 당시 졸업생들의 사진이 남겨져 있다.

명동촌은 또 김약연과 이동휘, 안중근 등이 모여 독립운동을 꾀했고, 명동촌 입구를 상징하는 선바위는 안중근 의사가 사격훈련을 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명동촌에 위치한 윤동주 생가.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

윤동주(1917~1945)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윤동주가 태어난 어린 시절을 보낸 북간도 명동촌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구자의 마을이었다.

윤동주 생각은 대지 990㎡(약 300여평)에 외양간 등이 실내에 있는 함경도 전통 가옥의 본채와 별채가 그대로 복원돼있다. 사각 모양의 나무로 된 우물도 옛 모습으로 복원됐으며 윤동주 생가의 앞마당에 세원에 ‘윤동주 생가 옛 터비’에 잘 나타나 있다.

터비에는 ‘시인 윤동주 생가는 1900년쯤에 그의 조부 윤하현 선생이 지은 집으로서 기와를 얹은 10간과 곳간이 달린 조선족 전통 구조로 된 집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이 집에서 태어났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되어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1993년 4월 명동촌은 그 역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해 용정시 정부에서 관광지점으로 정했다. 이제 지신향 정부와 룡정시 문력은 연변대학 조선연구 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력사적 유물로서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였다’라고 써져 있다.
 

윤동주 생가 마당 앞에는 윤동주 시인이 쓴 ‘참새’라는 시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생가 마당 앞에는 수십개의 비석이 윤동주 시인이 쓴 시가 기록돼 있었다. 큰 비석에는 참새, 서시, 별헤는 밤 등 수많의 시들이 기록돼있어 그 시를 읽다보면 잠시나마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수 있다. 또 앞마당에서 윤동주 시인은 어린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같이 뛰어놀았다고 한다.

윤동주는 14세에 명동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이 때부터 해환이라는 어린 시절의 이름을 윤동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후 광명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24세(1941년)에는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연희전문에서 4년간은 윤동주 나름의 신세계가 영글어간 시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참담한 민족의 현실에 눈뜨는 과정이었고, 여기에 맞서 자신의 시 세계를 만들어가는 처절한 몸부림의 과정이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했다. 1943년 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죄목은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교토지방재판소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됐다. 1년 뒤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28세의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 생가 마당에는 ‘서시’와 함께 윤동주 시인의 얼굴을 그려낸 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송몽규는(1917~1945)는 1917년 길림성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이다. 1935년 3월 말에 은진중학교 3학년을 수료한 뒤 중국 낙양군관 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해 동기생들과 함께 ‘신민’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1935년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했으며 1936년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됐다가 석방됐다. 이후 1943년 ‘재교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사건’혐의로 검거됐다. 윤동주와 함께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45년 3월 7일에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제시대 치열했던 민족교육역사 현장을 뒤로 한 채 항일독립운동의 메카라 불리는 용정으로 향했다.
/김영창 기자 seo@namdonews.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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