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우 작가의 광주의 의인들
(9)들불야학 창설한 박기순
소탈하고…정의심 많고…따뜻한 삶을 살다
‘의로운 정신’ 윤상원·박관현에게 이어져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당 운영
야학 운영 자금 마련위해 시장서 리어커 행상
짧고 굵었던 생애 마치고 윤상원과 영혼결혼
“누구라도 살면서 그런 사람 만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기해(己亥)년이 저물어 간다. 나는 한 해 내내 ‘의향 광주’를 탐구하였다. ‘광주가 왜 의향이지?’ 한말 호남 의병장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왜 광주가 의향인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아, 이래서 광주가 의로운 고을이었구나.’
 

광천동 성당에서 야학을 운영하다 숨진 후 윤상원 열사와 영혼 결혼식으로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이 된 박기순 열사 사진 - (사)들불열사기념사업회 제공

가난하여 정규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들과 함께 공부를 배워주는 곳을 야학이라 하였다. 1978년 가을, 광천동엔 들불야학이 있었다. 들불야학을 창립한 젊은이 박기순은 1978년 6월 야학 창설 모임을 시작하여 그해 12월 타계하였다. 삶은 짧았고, 굵었다. 그녀의 의로운 정신은 윤상원에게 이어졌고, 박관현에게 이어졌다.

수 명의 청년들이 야학을 열 장소를 확보한 것이 1979년 6월이었다. 광천동 천주교 성당에서 교리실의 한켠을 사용하라고 내 준 것이다. 각목과 널빤지를 사서 서툰 톱질로 책상과 걸상을 만들었다. 모두들 처음 해보는 톱질이었다. 가리방과 철필을 구입하여 교재를 만들었다. 교재를 만들고 교구를 만든 것 하나 하나가 돈이었다. 학당 운영 자금이 없었다. 이때 기순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과일 행상에 나섰다. 아는 선배에게 리어카를 빌렸다. 서방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떼다 팔았다. 수건을 목에 걸고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리어카를 끌고 다녔다.

이 시절의 기순에 대해 소설가 홍희윤은 회고한다. “기순은 학교를 졸업하면 선생님이 되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요. 그 좋은 조건을 포기하고 기순은 운동에 투신하는 것이었어요. 정말 놀라웠어요.”

작고한 이소라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1978년 9월 나는 아들을 출산했는데, 기순이가 와서 산모 뒷바라지를 해주었어요. 여대생이 산모의 피 냄새 나는 빨래를 거리낌 없이 빨아 주었지요. 미역국도 정성껏 끓여 주었구요.”

이 땅별에서 살다간 생애가 너무 짧아, 그녀에 대한 기억도 조촐하다. 1978년 11월 기순은 공장에 취업하였다. ‘동신강건사’이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학당을 운영하였다. 헐렁한 핫바지, 그녀가 착용한 의상의 모든 것이었다.

1978년 12월 25일, 그해에도 젊은이들은 크리스마스 잔치를 벌였다. 광천동 성당 교리실은 무척 추웠다. 난로를 지필 나무가 필요했다. 개발되기 이전의 화정동은 일대가 야산이었다. 기순은 화정동의 야산에 올라 종일 솔방울을 주웠다.

기순은 12시가 다 되어 집에 들어왔다. 오빠가 신혼사림을 차린 주월동 국민주택이었다. 기순은 몹시 피곤하였다. 며칠을 굶었을까. 며칠이나 잠을 못 잤을까. 밤늦게 저녁을 먹으면서 꾸벅 졸았다고 한다. 씻지도 않고 양말도 벗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다음 날 아침 방문을 두드렸다. 아무 기척이 없었다. 기순을 들쳐 업고 병원에 갔을 때엔, 이미 연탄가스가 그녀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데려간 이후였다.

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동 5·18묘지에는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결혼식장에는 축의금을 받는 사람까지 앉아 있어, 살아있는 사람의 결혼식과 다르지 않았다. 신랑 윤상원과 신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었다.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목청껏 불렀다.

윤석동 어르신은 윤상원의 부친이시다. 따라서 윤상원과 혼례를 올린 박기순은 윤석동의 자부(子婦)이다. 윤석동은 20여 년 동안 일기를 작성했는데, 해마다 12월이 오면 자부에 관한 일기를 남겼다.

1988년 12월 25일 일 맑음

자부(子婦) 기순의 기일이다. 그 제자들이 묘소에서 기도를 하고 우리집에 20여명이 와서 점심 식사 접대를 하느라고 수고를 하였다.

1989년12월 25일 월 맑음

박기순 11주기를 맞아 광주 망월동 공원 묘지에서 여러 동지들이 모여서 추모제를 가졌다. 나는 이번이 처음 참석하는 것이다. 유족과 동지들이 모였다. 그리고 나서 상원 묘소도 참배를 하였다. 그곳에는 박용준 박관현 등의 동지가 나란히 누워 있다.

윤석동 어르신은 올 해 6월 16일 마침내 아들 곁으로 갔다./(사) 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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