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491)

5부 정묘호란 1장 다시 백척간두에서 (491)

남이흥은 주요 장수들이 전사한 고을을 물려받았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비변사는 남이흥에게 황해도의 순변사를 겸임시키자고 건의했고, 임금은 이를 허락했다. 이렇게 하여 평안도와 황해도, 즉 후금군의 침투로인 관서와 해서 양 도의 입방군(入防軍)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주둔지를 두고 쟁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관서와 해서지방의 총 지휘관인 남이흥이 일선인 요충지 구성(龜城)에서 적의 진격로를 막아야 한다고 좌찬성 이귀가 제안하자, 도체찰사 장만이 성이 구비되지 않은 구성에 깊숙이 들어가면 적에게 포위되거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남이흥은 성을 갖춘 안주성을 회복해 지켜야 할 것이오.”

영의정 윤방도 이에 찬동했다.

“도체찰사 말씀이 옳소이다. 성을 갖춘 안주성에 총지휘관이 주둔하여 싸움을 진두지휘해야 할 걸이오.”

임금은 남이흥이 내지인 안주성에 주둔할 경우 일선의 의주와 창성이 고립되어 그곳 군사들의 사가 저하를 우려했다. 이런 우려에 이귀가 힘을 얻어 말했다.

“안주성에 주둔하는 계책은 남이흥의 신변보호를 위해 꾸며낸 것 아니오?”

엉뚱한 공격이었다. 장만이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성에서 적의 침공을 방어하는 전략은 전년도 3월에 정충신 평안병사가 상감마마께 올린 진언이오이다. 정 공은 ‘신은 오랑캐의 소굴에 출입하였으므로 적의 군사력을 잘 알고 있는데, 우리는 군사의 숫자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뿐더러, 철기(鐵騎:철갑을 두른 기병)가 맹렬하게 충돌해오면 야전으로 맞서 싸울 수 없고, 오직 바위와 성이라는 엄폐물을 이용해 막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소이다. 그것이 우리 지형에 맞는 전술 아니겠습니까?”

장만은 전투경험이 많은 일선 장수로서 우리 군사력과 지형지물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군은 숫자도 적은 데다 무기 체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니 적을 막아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좌찬성 이귀가 이의를 달았다. 그는 적군과 아군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서 성에서 적을 방어해야 한다는 전법을 장만이 그의 부하 남이흥의 신변보호 때문에 선택하는 전법으로 몰아간 것이다.

남이흥은 본래 북인이었다. 광해군 시절 의주판관으로 있을 때, 나중 실권을 장악한 이이첨은 의주부윤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북인 정권이 주도했던 광해군 시절에는 이지완, 이이첨과 함께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때 남이흥은 남이공, 남이웅, 남이신 등 사촌 및 육촌 동생들과 함께 떵떵거리는 위세를 부렸다. 광해군을 뒤엎고 정권을 잡은 서인 이귀 등이 집권하면서 당색으로 보아 그는 배척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험지로 뺑뺑이 돌리고 있었다.

다음날 임금이 조정대신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오늘 남이흥 병사의 주둔지를 구성과 안주 둘 중에서 하나로 결정하렸다.”

그러자 장만이 다시 정충신의 말을 그대로 옭겼다.

“작년 정충신 병사에 따르면, ‘창성 의주 안주의 제 진이 오랑캐를 막는 요충지인데, 이들 본진에 민병을 거느려 굳게 지킬 계획을 세우고, 입방하는 군사에 있어서는 그 수의 다소에 따라 수어하도록 하고, 강 이서 방향은 가을 이후에 대비하도록 경계하면 적의 후속부대를 막을 수 있고, 또한 그들의 병참선을 차단하면 저들은 독안의 쥐가 됩니다. 그러므로 서관지방의 지형이나 제 사정으로 보아서 성이 없는 구성에 진을 치는 것보다 안주가 내지에 위치해있다 하더라도 성에 의지하여 안주를 지키는 것이 유효한 전술이옵니다’라고 했소이다.“

이귀가 큰소리로 반박했다.

“남이흥이 안주에 물러나 지키다가 적이 맹산의 길을 경유하여 곧바로 해서로 향하여 그대로 한양으로 진격할적시면 이는 작년에 이괄이 멋대로 침공을 범한 때와 다름이 없는 일 아니오?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시오?”

그러자 장만이 크게 노해서 말했다.

“나라에서 나에게 체찰사의 임무를 맡겼으면 서변(西邊)의 일은 체찰사에게 맡기는 것이 온당한 일 아니오? 웬 트집이오?”

“국가 존망이 걸린 일을 어찌 체찰사 한 사람에게 맡길 일이오?”

아집과 독선은 나라의 위기에서도 변함없이 궁궐을 부유했다. 주둔지는 장수가 유리한 지형을 골라 정해서 전략을 짜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대사헌 김상헌조차 남이흥이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운데다 겁이 많고 무재(武才)가 부족하여 심복하는 군관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이희건으로 교체할 것을 왕에게 건의했다. 일선 지휘관을 신임하면서 사기를 북돋아주어도 부족할 판에 조정 대신들은 빌미만 있으면 위세를 부리며 죄를 물으려 했으니 군사는 내부의 적에게 먼저 무너지는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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