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530)

6부 2장 용골산성 전투(530)

“저 사람들 모두 도망갔다 해.”

이송망이 소나무 숲속으로 사라지는 백성들의 뒷모습을 보며 방방 떴다.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이다. 총검으로 위협해서 끌려갔을 뿐, 내가 지켜주니 본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대는 당장 이 땅에서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나의 칼이 너의 목을 겨눌 것이다.”

그는 뭉기적거리다가 군마의 안장을 추스르더니 부하들을 이끌고 북으로 떠났다. 그는 떠나면서 또 다른 마을의 사람들을 털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후 저지른 행패는 더 이상 보고되지 않았다.

1627년 4월 강화도로 들어가있던 각도의 근왕병이 해당 지역으로 돌려보내지고, 뒤이어 임금의 행차가 강화도를 출발해 통진에 도착했다. 김포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장릉(오늘의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서 천우신조께 제사를 지낸 다음 어가 행렬은 무사히 한양으로 돌아왔다.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왕이 돌아왔지만 국내 상황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정충신 부원수가 지키는 자리는 안전했지만 다른 지역은 후금군의 분탕질이 계속되고 있었다.

백성들도 굶주린 나머지 움직임이 없거나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정충신은 후금군을 몰아내는 것보다 백성들의 구휼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가 의주 해안 마을에 이르렀을 때였다. 지방 방어 군관이 백성을 직사하게 패고 있었다. 정충신이 이를 제지하며 물었다.

“왜 이렇게 무작스럽게 패는가.”

“이 새끼가 오랑캐 놈들에게 쌀됫박을 내놓고는 우리한테는 코를 싹 씻는단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고, 우리를 밀고해서 아군 병사 다섯이 목이 달아났단 말입니다.”

정충신은 필히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얼굴이며 어깨며 다리며가 늑신하게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사내를 일으켜 세웠다.

“군관의 말이 정녕 사실이렸다?”

사내가 신음소리를 토해내며 짚단에 간신히 상체를 기대고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나리님, 억울합니다요. 소인이 어렵게 익은 보릿단을 수확해 홀태에서 알곡을 훑고 있는데, 오랑캐 장정 둘이 와서 밥을 달라고 하더니 밥을 주니까 말없이 소인의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보리타작을 다 하고, 곤자리가 득시글거리는 개울도 깨끗이 치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군사용으로는 쓸모가 없으나 농사짓는 데는 아직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폐마도 한 필 주고 갔습니다. 그래서 쌀 한 말을 주었지요.”

“그래서?”

“한데 관군들은 들이닥쳐서 광에 있는 벼 종자까지 자루에 퍼담아가고, 빈 항아리는 모조리 깨뜨렸습니다. 원한이 생기드마요. 그래서 도외준 후금군에게 인근에 관군과 의병군이 좌악 깔렸으니 기왕에 도주하려면 순한 의승병들이 있는 곳을 골라서 북으로 가라고 알려주었지요.”

“그랬더니?”

“그런데 그자들이 가는 도중 의승병한테 걸려서 문초를 당했는데, 의승장이 묻기를 ‘어떻게 이 깊고 험악한 곳까지 들어왔느냐”고 하자 소인의 안내로 그리됐다고 하였사온바, 의승군 기지에서 관군 기지에 이 사실을 알려서 소인이 지금 관군에게 붙들려 맞고 있나이다.”

“그 말 사실인가?”

정충신이 지방 관군에게 묻자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조진 것이지요. 이런 새끼들은 죽여버려야 합니다.”

“후퇴하는 후금군 중 나쁜 놈도 있고, 선량한 놈도 있다. 구분하기는 어렵겠지만 화의를 맺고 약정에 따라 이동하는 것이니 우리는 도와줄 의무가 있다. 그중 선한 자에겐 선하게 대하는 것이 도리다. 이런 미담이 후금 조정에 알려지만 우리와의 우호와 친선이 강화될 것이다. 역사란 사소한 인연으로도 나쁘게도 되고 좋게도 되는 법이다. 후퇴하는 자들이 나쁘면 모를까, 착한 뜻을 갖고 있는 자에겐 인심 좋게 대하는 것이 외교의 한 방편이다. 특정한 누구라야만이 외교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가 외교관이 되고 군인이 되는 것이다.”

그때 사내가 푹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잠잠해졌다. 장독을 못이기고 끝내 숨을 거둔 것이다.

“너는 임무에 충실했으나 너무 잔인하게 충실했다. 백성의 고통도 있을 것이니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진정한 군인이다. 돌아가라.”

지방 군관이 두말없이 내달리더니 투덜대었다.

“씨발, 후금군이야? 조선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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