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국 두 정치 거목의 ‘너무나 닮은’ 인생
굴곡진 독일·한반도 현대사
분단 극복 첫번째 단추 끼운
두 사람의 운명적인 평행궤적

변방의 아웃사이더로 성장
온갖 역경·정치적 시련에도
민족·국가의 통일 이루고자
동방정책·햇볕정책 추진

후임정권 정책 지속 유무로
통일국과 분단국 현실 지적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
아웃사이더에서 휴머니스트로
최영태 저/성균관대학교출판부/3만5천원

빌리 브란트. 독일사회민주당 출신 정치인인 그는1969년 10월부터 1974년 5월까지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총리를 지냈다. 김대중. 민주개혁진영 출신 정치인으로, 1998년 2월부터 2003년 2월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두 사람은 정치적 배경과 환경은 물론 삶의 조건과 현실까지 유사점을 지녔다. 흡사 데칼코마니를 연상케 한다.

저자인 최영태 전 전남대 교수는 30년 넘게 독일 현대사와 독일통일 연구에 매진해왔다. 지난 2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출간한 이 책에서 그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고 세계적인 지도자로 성장한 두 거인의 드라마틱한 생애 유사성에 먼저 주목한다.

빌리 브란트 사회주의인터네셔널 의장 방한기념 리셉션에서 김대중과 브란트./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두 인물의 파란만장했던 수난의 극복사와 그 과정에서 제각기 빛나던 인간적인 삶의 자취들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내고, 이들이 이뤄낸 업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점에 놓여 있는 동방정책과 햇볕정책의 내용과 실천을 비교·경주시키면서, 박진감 넘치는 서사를 펼친다. 변방의 아웃사이더에서 민주주의·인권·복지·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휴머니스트로 변모해간 두 인간의 전 생애는 독일과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뜨겁게 관통한다.

국회의원 시절 김대중의 기도하는 모습./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사실 두 사람은 각 사생아와 서자로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이 속한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다. 브란트는 서베를린이라는 당시 통일 전 서독의 섬 같은 변방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김대중 역시 한국의 정치적 변방지대인 호남에서 정치인의 꿈을 키웠다. 두 사람 모두 선거에서 숱한 패배를 경험해야 했으며, 오랫동안 야당의 대표를 역임했다.

두 사람의 정치성향은 이념적으로 개혁적ㆍ진보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주 색깔공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브란트는 청년기에 14년 동안 망명생활을 거쳤고, 김대중은 정치적 성숙

폴란드 바르샤바 무명용사 묘지를 방문 무릎꿇고 사과하는 빌리 브란트./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제공

기에 투옥과 연금, 사형선고, 두 차례의 망명 등으로 그 시련을 감내해야 했다. 이혼과 사별 등을 겪으며 가정사적으로도 순탄치 못했다.

경쟁자들은 이렇게 불우한 환경을 이겨낸 두 변방인을 사생아, 공산주의자, 민족의 배신자라 불렀다. 숱한 비난과 박해도 가해졌다. 그러나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브란트는 세 번, 김대중은 네 번의 도전 끝에 각각의 나라에서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내면서 총리와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대중과 김정일의 6.15공동선언 합의./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저자는 역사학자 토인비의 “척박한 자연환경 등의 적절한 도전은 문명의 발달을 촉진시키지만, 그 도전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강할 때 문명은 아예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채 유산되어버리거나 도중에 소멸해버린다”는 전언을 인용하면서, 브란트와 김대중에게 가해졌던 가혹한 도전은 보통사람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한 수준이었지만, 두 사람은 이를 꿋꿋하게 극복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바로 그 시련이 자신을 더욱 강하게 단련시키는 자양분이 되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 브란트와 김대중이 국가와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하고 실천했던 동방정책과 햇볕정책에 주목한다. 국내에서 동방정책과 햇볕정책을 비교한 연구서들이 종종 발견되긴 하지만, 동방정책이 햇볕정책의 어느 과정과 방식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두 정책은 또 어떤 차원에서 서로 같거나 다른지 등을 포괄하는 보다 면밀한 연구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문제의식으로 두 정책을 되짚어나간다.

동방정책이나 햇볕정책은 좁게는 동ㆍ서독과 남북한의 긴장완화와 공존을, 더 넓게는 외교적 지평을 주변국가로 확장시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브란트와 김대중은 먼저 절반의 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분단으로 갈라진 민족이 연대감과 동질성을 유지, 회복시켜나가는 ‘문화민족’을 통해 영토와 정치적 통일, 즉 ‘국가민족’을 이뤄낼 수

독일 통일의 상징적인 장면인 베를린 브란데르크 문에 올라선 독일 국민들./출처 wikimedia commons

있다는 의미에서였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이나 김대중의 햇볕정책 모두 동서냉전체제에 대한 해체였다. 이 공적을 인정받아 브란트와 김대중은 공히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두 사람의 도전 앞에는 장애물도 많았다.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반대하는 야당에 의해 불신임 직전까지 몰렸고, 동독 스파이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해야 했다. 김대중도 햇볕정책으로 갖은 어려움을 겪었다. 국회는 김대중의 최측근이었던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고, 남북정상회담에 앞장섰던 측근들도 감옥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저자는 동방정책과 햇볕정책을 대하는 독일(서독)과 한국의 정치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적 차이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사실이 그랬다. 민주개혁진영에서 탄생한 노무현정부조차 햇볕정책의 기조를 계승하면서도 대북 불법송금 혐의로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관여한 핵심인사들을 감옥에 보냈다.

보수정당과 보수언론은 햇볕정책과 대북지원이 국민의 동의를 받지 못한 채 비밀리에, 그리고 일방적 퍼주기로 진행되었다고 비난하면서 햇볕정책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뒤를 이은 두 보수정부의 대통령은 금강산 관광을 비롯한 민간교류를 거의 중단시켰으며, 개성공단까지 폐쇄시켜버렸다.

물론 서독에서도 동방정책에 대한 반대는 거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란트의 후임자인 사민당 출신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물론이요, 1982년 정권을 인수한 기민당 출신 헬무트 콜 총리까지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성실하게 계승했다. 이처럼 동ㆍ서독 간의 교류와 동질성 회복정책은 정권과 상관없이 이어졌다. 1990년 독일통일은 1969년부터 1989년까지 20년 동안 일관되게 지속된 동서화해 정책, 즉 통일을 위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후임 정권들이 ‘햇볕정책’을 이어가지 못했고 남북관계는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오랜기간 두 나라의 통일문제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가 책을 마감하면서 많은 아쉬움을 남겨두는 대목이기도 하다.

■저자 최영태는
 

저자 최영태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사학과에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부터 전남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독일 현대사 연구에 매진해왔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에서 출발한 그의 주제는 최근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독일통일의 성과로 이어졌다. 2020년 2월 정년을 맞지만, 그 문제의식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전남대 5·18연구소장과 인문대 학장, 한국독일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시민운동과 사회민주화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광주흥사단 및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공동의장, 제3기 국무총리 산하 시민사회발전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무엇보다 1989년부터 1990년까지 독일 보훔대학에 머물면서 독일통일의 현장을 몸소 지켜보았던 그에게 독일과 한반도의 분단극복정책과 통일과정에 대한 비교연구는 커다란 화두이자 시대정신이었다. 이를 통해 얻어진 결과를 시민ㆍ교육운동의 영역에서 실천해 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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