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살 청년은 왜 시민군 지휘관이 되어야 했나
■오월 그날
-시민군 상황실장 광주상황보고서-
박남선 지음/샘물
골재채취사업하던 평범한 청년
우연히 계엄군 만행보고 충격

중화기무장 공수부대 대항위해
돌·각목 이어 총기까지 들어
항쟁과정서 시민군 리더 부상

5월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광주시민들의 항쟁과 진실 기록

“나에게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짊어지고 죽을테니 아무런 죄가 없는 동지들을 지금 당장 석방시키시오. 그리고 나의 사형집행은 당신들의 총으로 죽어간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총살형으로 집행해주시오. 오늘 당신들이 나를 심판하지만 역사는 필연코 당신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리라고 분명히 믿고 있소. 이상이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으로 활동한 박남선이 고등군법회의에서 한 최후진술이다.

박남선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옛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지켰다. 시민군 총지휘관인 상황실장을 맡아 시민군의 무장투쟁을 지휘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나 의식화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상적으로도 어떠한 좌우논리도 없었다. 그는 군대를 다녀온 뒤 광산군 본량면 황룡강에서 모래 자갈을 파내 공사현장에 조달하는 골재채취사업을 하던 청년 기업인었다. 그는 27살 나이에 덤프트럭 3대와 자가용을 굴릴만큼 나름 기반을 잡아가고 있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5·18 40주년…찬란한 부활의 빛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내 시민군을 형상화한 무장항쟁군상과 추모탑 너머로 별과 달이 흐르고 있다. /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저자인 박남선은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의 5·18광주민주화운동 10여 일에 이르는 자신의 활동상황과 목격담 등을 풀어낸다. 항쟁과는 무관하게 살아온 20대 청년이 어떻게 시민군 대장으로 나서게 됐는지, 사람들은 왜 그를 인정하고 따랐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박남선은 1980년 5월 18일 오전 후배와 함께 자신의 차를 타고 전남대 후문 도로를 가던 중 계엄군이 머리가 희끗한 교수를 폭행한 장면을 목격한다. 이 교수는 학교로 들어가려는 학생들에게 계엄군이 폭행을 가하자, 이를 말리려고 나섰다가 자신도 폭행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계엄군이 쫓아오자 계엄군을 피해 달아나는 경험을 한다.

그날 오후 집에 돌아온 박남선은 어머니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는다. 동생이 군인(계엄군)들에게 맞아 전남대병원에 있다는 것이다. 동생의 부상 소식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전남대에서 아침에 보고 겪었던 일들과 여러 생각이 겹쳐진다.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 일들이 현실로 닥친 것이다. 그가 광주에서 살아오면서 겪어보지 못한 최악의 사건이었다. 광주시내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하고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공연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일인 18일 오전 광주광역시 동구 옛 전남도청 앞 5·18 민주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기념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있는 이놈(계엄군)들을 가만히 놔두었다간 큰 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고한 시민들과 동생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는 공수부대원들에게 응징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거리로 나선다. 맨 몸으로 총칼을 든 계엄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공사장에서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었다. 시위대에 합류해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히 물러가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친다.

공수부대에 응징하려 나섰던 그는 광주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을 다시 직접보게 된다. 청년들을 쫓아가 곤봉으로 무차별 때리고, 군화발로 가슴과 배를 내질렀다. 또 반항하는 기색이 보이면 가차없이 대검으로 신체부위를 가리지 않고 찌르고, 옷을 벗기고... 박남선은 이 상황을 악마들의 광란의 축제로 표현한다.

공수부대원들을 잡아 보복을 하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거리로 나선 그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만행을 보고 겁에 질려 도망만 다닐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공수부대에 차이고, 맞고, 찌름을 당하면서도 또 골목 골목으로 피해 달아나면서도 다시 모이고, 또 모였다. 박남선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이런 시민들을 향해 공수부대의 축제는 더 거칠어졌다. 급기야는 공수부대 폭행에 의한 사망자가 나오고, 발포까지 이어졌다. 이에 시민들은 중화기로 무장한 계엄군들로부터 자신과 형제자매, 그리고 광주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든다. 항쟁 과정에서 박남선은 시민군 상황실장 직위를 맡아 시민군의 무장투쟁을 지휘한다.

‘오월 그날’은 1988년 초판이 발행됐다. 2014년 개정판이 나오고 올해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해 개정 3판이 출간됐다. 그렇다면 박남선이 6년만에 다시 ‘오월 그날’을 발표한 배경은 무엇일까. 그는 사명감으로 설명한다. 아직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전국민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부 세력들이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등의 명예훼손과 폄훼가 작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광주를 올바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다. 5·18정신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역사이자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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