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기고-진주를 지켜 호남을 구한 나주의병들

진주를 지켜 호남을 구한 나주의병들
김길수(진주문화원장·국립경상대학교 명예교수)

김길수 진주문화원장

진주와 나주는 고려 때부터 목사 고을로 남부 지역의 중심도시였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천년고도인 진주와 나주는 천년 역사문화 자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일찍이 피로 맺어진 형제 같은 도시다.

1953년 계사년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1537 ~1593) 의병장과 그의 아들 상건(象乾, 1557 ~ 1593)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나주 정렬사는 진주 사람들이 반드시 들러 향을 피우고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올려야 할 곳이며, 두 도시의 인연이 피로 맺어졌다는 역사적 숨결이 배인 사당이다.

1593년 6월 24일 진주성이 위태롭다는 보고를 듣고 나주 출신 김천일 의병장은 나주 의병 3백명을 거느리고 진주로 달려왔다. 선생은 수많은 왜적들을 물리치다 중과부적으로 촉석루까지 밀렸다. 이때 나주 의병 등 좌우 군사들이 장군을 부축해 일으켜서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선생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좌우를 돌아보며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하고, 마침내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더불어 서로 끌어안고서 남강으로 몸을 던져 장렬하게 순국했다.

우리 진주인들은 오늘도 도도히 흐르는 남강을 보며 그날의 비극과 선조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매년 제를 지내고 있다. 오래 전부터 나주와 의병정신을 기리는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또 매년 10월이면 진주유등축제를 개최한다. 남강에 띄우는 유등놀이는 우리 겨레의 최대 수난기였던 임진왜란의 진주성 전투에 기원하고 있다. 1592년 10월 충무공 김시민장군이 3천800여명에 지나지 않는 적은 병력으로 진주성을 침공한 2만 왜군을 크게 무찔러 민족의 자존을 드높인 ‘진주대첩’을 거둘 때 성 밖의 의병 등 지원군과의 군사신호로 풍등을 하늘에 올리고 횃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워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군사전술로 쓰였으며, 진주성 내에 있는 병사들과 사민(士民)들이 멀리 두고 온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 이용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렇게 남강은 지금도 우리 진주인들 곁에서 역사의 현장으로 살아있으며, 그날의 혼을 후세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진주성과 남강, 국립진주박물관은 국민들에게 임진왜란 항전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역사전승과 관광활성화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이는 진주시민의 자랑이자 구국정신을 민족정신문화로 이어가는 대한민국의 자긍심이다.

최근 전라남도가 호남의병들의 정신을 기리고 위상을 올바로 세우고자 남도의병역사공원을 조성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한편으로 때늦은 감이 있다. 또한 부지를 시군에 공모하여 많은 지역이 신청했다고 들었다. 도의 입장에서는 시군에 공평한 기회를 부여한다는 의미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의병정신을 전승하고자 하는 각 지역의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낸다.

오늘도 남강에 흐르고 있는 나주의병진의 정신을 되새기며 국난극복에 힘을 모았던 선조들의 모습을 통해 영남과 호남이 손잡고 미래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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