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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18)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18)

6부 5장 귀향

송여인(宋汝仁)이 다시 분개했다.

“명나라가 요동반도가 위태로워지자 조선 군사의 파병을 요청할 때 나가 종군한 사람이요. 명이 파병을 요청했다고 했지마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요. 안들어주면 뒤징개. 나라의 틀이 고로코롬 짜여져부렀지요. 이때 정 장수 나리가 거부해야 한다고 했지요. 양쪽에서 협공당할 빌미를 준다고요. 그란디 무능하기 짝이 없는 군주와 간신배들이 사태를 그르치고 말았단 말이요. 생각해보면 십수년 전 광해 임금이나 정 장수의 생각이 옳았소이다.”

광해군은 첩자를 통한 정보전을 바탕으로 기미책(견제는 하면서도 관계는 끊지 않는 외교)을 펴면서 자구책을 강구하자는 주의였다. 일선에서 물어다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등거리 외교로 균형을 잡아나가자는 것이었다. 정충신이 그 역할을 다했다.

그런데 인조가 등극한 이후 후금을 미워하더니 작은 핑계로 후금을 맹공격하는 서찰을 사신을 통해 보냈다. 이것을 받아본다면 성질 급하고 사납고 단순한 후금이 들이당창 공격해올 것이 뻔했다. 그래서 정충신이 변경에 온 사신을 붙잡아 중간에서 서찰을 가로채 변조했던 것이다.

“기울어져가는 명을 생각없이 따르며 후금을 매도하는 것은 맨 몸으로 불섶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조정 사대부는 정충신이 왕명을 거역했다며 삭탈관직하고 유배를 보냈다.

“소문에는 시방 명나라 장수들이 차례로 적(후금)에게 항복하고 있다고 하더만요. 심지어 요동사람들이 명나라 장수를 포박해서 후금군에 넘긴다고 합디다. 중국의 형세가 이렇게 기울어져 가는디 조정은 되도 않는 흰소리를 까면서 대비하지 않으니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환장해불지요.”

정충신도 명청교체기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야 한다고 믿었다. 고려가 강대국 거란(요)과 몽골(원)을 상대로 줄다리기 외교를 펼친 끝에 자주국가로 우뚝 선 것처럼 강대국끼리 충돌할 때 실리를 찾아 기반을 확실히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야인 송여인도 그런 말을 한다. 조정 대신들보다 야인의 시야가 더 트였다.

정충신은 생각같으면 당장 변경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북방 변경에 전운이 감돌 때, 자칫 나라의 운명이 거덜나는 수가 있다. 외교를 알고 전법을 아는 자라야만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고, 그 적임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괄의 난, 이몽학의 난, 정묘호란... 여기에 또 전쟁이 나면 나라는 영원히 망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 60을 바라보는 노년기에 다달았다. 시름 깊은 유배생활을 하다 보니 병고마저 깊어졌다. 해소병으로 기침을 하면 어떤 때는 밤을 새기 일쑤였다. 그런 우울한 심사였으나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고향을 찾는 설레임 때문이었다.

1633년 8월 8일 꿈에 그리던 고향에 도착했다. 큰아들 반과 집안 식구들이 반기는 가운데 고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골목을 가득 메웠다. 고을 사람들은 ‘신출귀몰 정충신 장수 귀향’이라는 현수막을 동구 밖 당산나무에 걸었다.

마을 사람들은 변함없이 그를 반겼지만 정충신은 면구스러웠다. 특히 가족들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식구들을 위해 단 한톨의 쌀을 보탠 적이 없었다. 갑자년(1924년) 이괄의 난을 평정한 후 부원수로서 지방 순시 중 잠시 고향을 찾은 적이 있으나 그때도 따뜻한 밥 한그룻 고향사람들에게 대접하지 못하고 출장지로 떠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9년만에 고향을 찾았다. 그새 삐약거리던 손자들이 컸으나 할아버지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낯설어 하는 그들보다 어려운 생활에 경제적 도움을 해주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가슴을 저몄다. 훌륭한 무장이란 말을 들었다고 해도 아비, 할아비로서는 역할을 다하지 못했으니 정작 부끄러웠다. 소식을 듣고 남원양씨 처족들이 찾아와 다투어 인사했다. 그들에게도 고기 한 점 사준 적이 없었다. 고급 벼슬이라고 했지만 그들이나 광주 사람들을 취직자리는 물론 영전시킨 적이 없었다. 그렇게 그는 엄격하게 군생활을 했다.

“내일은 손자들과 함께 선영을 찾아 참배해야겠구나.”

마음 속으로 흠모해오던 9대조 지(地) 할아버지 묘소는 물론 아버지 어머니 묘소를 찾아 예를 올리는 것으로 불효를 용서받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졌다. 광주목사가 찾아오자 식구들이 뒤로 물러나고, 구경 온 사람들도 포졸들에 의해 골목 밖으로 밀려났다. 목사가 내일부터 고향 순방을 수행하겠다며 돌아간 뒤 동네 노인 김대남과 김이중이 찾아왔다. 어렸을 적 친구들이었다.

“정 장수, 자네 산소 문제로 시끄러운 것 알고 있는가?”

김대남이 의외의 말을 했다.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명식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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