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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20)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20)

6부 5장 귀향



구전 설화에 의하면, 정충신이 광주 목사관 하급 관원 시절, 스님이 정충신을 데리고 명당을 찾기 위해 종중 산을 누빈 뒤 한 곳을 지목하며 물었다.

“후대에 3정승이 나올 자리를 원하는가, 아니면 당대의 정승이 나올 자리를 원하는가.”

두 말할 것없이 정충신이 답했다.

“당대의 정승 자리가 현실적이지 않습니까?”

후대는 너무 멀고, 죽은 뒤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여기다 쓰게.”

스님이 경렬공 정지 장군 묘 바로 맡을 지목했다. 경렬공 묘 저만치 아래에는 직손 묘들이 차례로 누워있었다. 정충신으로 하면 8대조, 7대조, 6대조, 5대조들의 묘가 누워있는데 그 묘들을 무시하고 경렬공 묘 바로 밑에 쑤셔박듯이 아버지 묘를 쓴다는 것이 온당치 않아보였다. 예법상 윗대를 발밑에 두고 그 위에 눕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맞지 않았다.

“스님, 여기다 아버님 묘를 쓰면 욕먹지 않겠습니까. 예장법일수록 위계질서가 분명해야 하는데...”

“명당 자리가 여기 뿐인데 어쩌겠나. 묘를 쓰고 안쓰고는 자네들 마음에 달렸으니 나는 개입하지 않겠네.”

이 말을 남기고 스님은 떠났다. 정충신도 의주로 올라가 무과 급제한 뒤 일선 최전방에 투입되었다. 부친이 작고하자 정충신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군무중이라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집안 사람들이 호남의 장례 풍습에 따라 선영에 묻히기 전 아버지 유해를 일단 다른 곳에 가매장했다가 탈골이 된 얼마쯤 뒤 선영 묘역으로 이장하는데, 기왕 명당이라고 은밀히 알려진 경렬공 묘의 바로 밑에다 이장했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평장을 해버렸다.

명당의 묘짓발이었을까, 정충신이 무장의 길을 걸으며 계속 승승장구했다. 선사포첨사(1594)를 시작으로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체찰사 장만 장군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고(1602), 조산보 만호(1608), 보을하진 첨사(1609), 포이 만호(1615), 영의정 오윤겸을 수행해 일본통신사 파견 (1617), 도원수 장만 장군과 함께 명나라 재차 파견(1620), 만포진 첨사 및 당상관, 평안도병마좌우후(1621-2), 안주목사 겸 방어사(1623), 전부대장으로 이괄의 난 평정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 진무공신 일등 정헌대부 금남군(錦南君) 책훈((1624), 팔도부원수(1627), 정묘호란 시 외교 교섭으로 후금군 철군 달성(1627-8), 오위도총부 도총관(1629), 주사원수(舟師元帥)로 유흥치난 평정(1630), 외교력으로 후금국 조선침략 저지(1633) 등등... 꽃길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지만, 넘어지면 일어서곤 하면서 군의 최고통수권 자리에 오른 것은 조상의 음덕이거나 명달발이라고 생각되었다. 그가 무인의 길을 걸었기에 그렇지, 만약에 문인의 길을 걸었다면 스님이 예언한대로 정승 자리에 오를만한 지체였다.

정충신의 아버지 정윤이 평장에서 봉분을 하게 된 것은 정충신의 위세를 이용한 측면이 강했다. 정충신이 지체 높은 사람이 되니 그 위세로 집안 사람 몇이 봉분을 올린 것이다. 물론 정충신의 암묵적 지지도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 시제를 지내기 위해 선영을 찾은 후손들이 이 봉분을 보고 볼썽사납다고 분란이 잦았다.

“정 장수는 일선에 있었기 따물로(때문에) 잘 몰랐을 것이네만, 언젠가 집안 어른들이 자네 아버지 묘비를 도끼로 쪼개버린 일도 있었단 마시. 대를 무시하고 8대손이 경렬공 밑에 떡하니 누웠으니 누가 봐도 경우는 아니제.”

이렇게 말하고 김대남이 정충신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함께 온 김이중이 나섰다.

“그러제만 한두 해도 아니고 자그만치 40년 세월이 흘러부렀는디, 어떻게 할 것이여? 지금은 집안 사람들도 잠잠항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성 불러. 대신 정 장수가 걸판지게 산제를 올리소. 정지 장군 묘에서부터 8대조, 7대조, 6대조, 5대조, 이렇게 딱부러지게 제사를 올리고, 아버지 제를 올리면 저승에 계시는 이나 이승에 있는 대소간도 받아들일 것잉만.”

“내일 산소에 함께 가세. 집안 대소간도 모두 부르고...”

정충신이 고개를 끄덕이고, 제물(祭物)을 크게 준비하도록 장남 반에게 일렀다.

준비한 제물과 함께 이틀 후 묘역에 오르니 감회가 새로웠다. 광주 목사관 하급 관원 시절, 스님과 함께 명당을 찾았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동안 위급한 군무 중이라도 틈을 내어 찾았어야 했는데 찾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무엇보다 정지 장군의 묘가 퇴락해 있었다. 묘의 규모가 어마어마한데 석축들이 허물어져 있었다. 언덕에 석축을 쌓아 두른 사각형의 묘는 독특할 뿐만 아니라 대장군(해군제독)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정지 장군 묘는 둘레 19.3m, 높이 1m이고 그 앞에 묘비와 석인(石人)들이 돌꽃을 피운 채 임립해 있다. 1391년(고려 공양왕 3) 왜적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운 정지 장군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크게 예를 갖춰 예장한 국가장(國家葬)의 상징물이었다. 고려 후기의 묘제로서 전라도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인데, 고려말 이성계와 어깨를 나란히 한 무장으로서 왕에 비견되는 예우로 조성된 묘였다(1975년 12월 30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2호로 지정).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송민섭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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