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BOOKS-진환평전
▶진환 평전-되찾은 한국 근대미술사의 고리
진환기념사업회 지음/살림출판사

‘망각의 화가’ 진환, 세상으로 나오다
서양화가 ‘진환’생애· 예술 다뤄
작품도록·스케치·동시화 등 수록
해방전후 향토적서정성 작품 남겨

이쾌대·이중섭과 동인 활동 전개
‘소’ 그림 많아…이중섭에 영향
한국 근대미술사 ‘잃어버린 고리’

1·4후퇴때 고향 무장 향하다가
아군 오인 사격으로 38세때 숨져

1945년 8월 22일, 아직 해방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화가 이쾌대(1913~1965)는 서울에서 전북 고창 무장에 사는 동갑내기 화가 앞으로 이런 편지를 쓴다.

“하도 오랫동안 소식이 없기에 진형하처재(陳兄何處在)오! 야단들이었습니다. 예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형의 그동안 심경 변화를 동무들께 전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때가 어느 때입니까? 기어코 고대하던 우렁찬 북소리와 함께 감격의 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이곳(서울) 화인들도 ‘뭉치자, 엉키자, 다투지 말자’ ‘내 나라 새 역사에 조약돌이 되어도’ 이와 같은 고귀한 표언 밑에 단결되어 나라 일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형이여! 하루바삐 상경하셔 큰 힘 합쳐 주소서.” (267쪽)

‘망각의 화가’로 알려진 진환의 생전 모습./살림출판사 제공

5년 뒤 1950년, 이쾌대는 창립 2년차를 맞은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 강사로 나가다 6·25를 맞는다. 교수진에는 학부장 배운성(1901~1978) 외에, 5년 전 편지에서 ‘형’ ‘진형’이라 깍듯이 부른 그 사람도 있다. 9·28 서울 수복 후 배운성은 북으로 가고, 월북하던 이쾌대는 체포되어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휴전 후 북을 택한다. 서울에 남은 ‘진형’은 웬일인지 함께 망각의 심연으로 사라졌다.

함께 활동한 동료들이 대거 월북한 탓도 컸다. 실제로 남에서 오랫동안 금단의 이름이었던 배운성·이쾌대가 1990년를 전후로 ‘한국 서양화의 선구자’(배운성) ‘조선 향토색의 거장’(이쾌대)으로 화려하게 부활하자 비로소 공개되는 이들의 1940년대 사진에 ‘진형’도 감초처럼 함께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 한국 근대미술사를 조명하는 기획전시에도 그의 작품 한둘이 어김없이 포함되고 있다.

서울에 남은 ‘진형’은 1951년 1·4후퇴 때 고향 무장을 향하다가, 고향 마을을 코앞에 둔 야산에서 아군 측의 오인사격으로 숨을 거둔다. 그것도 몇 년 전 고향 학교에서 가르친 제자의 총에! 전쟁통인 데다 동료들도 대부분 월북한 터라 오랜 세월 잊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38세 젊은 화가의 이름은 진환(본명 진기용·1913~1951)이다. 진환 평전은 ‘비운의 화가’ 진환 사후 70년 만에 처음 나오는 도록과 자료집을 겸한 평전이다.

진환 작 ‘우기(牛記)’(1943년)./살림출판사 제공
이중섭 작 ‘황소’(1953년)./살림출판사 제공

책은 ‘향토성’과 ‘소와 어린이’의 화가 진환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한국 근대미술사의 ‘잃었던 고리’ 하나를 찾아 잇는다. 그가 남긴 서양화, 스케치, 동시화, 수필, 편지와 함께 전문가들의 평론을 수록해 그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다.

진환은 이쾌대가 사랑한 화가, 이중섭이 본받으려한 화가다. 세 사람은 함께 40년대 같은 동인으로 활동했다. 홍익대 미대를 창설해 후학들을 가르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쾌대, 이중섭과 달리 진환은 미술 전문가들에게도 상당히 낯선 이름이다. 비운의 죽음으로 잊혀진 존재가 되면서 미술사에서조차 누락된 화가다.

그는 일제말기의 암흑기에 신미술가협회 등에 참가하며 민족미술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많지 않은 작가 가운데 한명이다. 다만 활동 기간이 고작 10년 정도인데다, 상당한 기간을 일본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가 남긴 작품 또한 몇 십 점에 불과하다. 작품 대부분이 유실돼 유작은 유화 8점과 수채화 및 드로잉 등 30여점이 전부이다.

진환 작 ‘날개 달린 소와 소년’(1935년)./살림출판사 제공

진환은 고요한 심연의 세계를 가진 명상의 작가다. 그는 많은 생각과 자기성찰, 사물에 대한 연속된 관찰을 통해 작업에 몰두했다. 황토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의 작품은 자연주의적이고 향토적 서정성을 짙게 담아냈으며 대부분의 작품들이 소를 소재로한 것으로 민족의 현실을 반영하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진환의 동시 ‘쌍방울’./살림출판사 제공

또한 아동을 위한 그림 동요집을 제작하는 일에도 몰두하며, 다양한 작품을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사후 32년만인 1983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첫 유작전이 열리면서 세상에 첫 공개됐다. 유족들이 소중히 보관해온 일부 작품들과 자료들로 개최됐다. 광주에서는 2013년 은암미술관이 진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신미술학회 제3회전(1943) 기념촬영. 뒷줄 왼쪽부터 이성화, 김학준, 손웅성, 진환, 이쾌대, 윤지선, 홍일표. 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배운성, 이여성, 김종찬 등./살림출판사 제공

한국의 소 그림은 이중섭의 작품이 가장 잘 알려졌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소를 그린 화가가 진환이다. 남아 있는 진환의 작품 중 태반이 소를 그린 것이고, ‘소의 일기’에서는 소의 ‘힘차고도 온순한 맵시’를 예찬하기도 했다. 그에게 소는 민족현실을 상징하는 동시에 강인한 민족성을 구현하는 핵심적인 이미지였다.

책은 특히 동시대 교우한 이중섭이 진환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점을 전면적으로 다룬다. 그동안 미술계에서는 이중섭이 진환이 그린 소를 보고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얘기가 있었다. 1940년경 그린 ‘천도의 아이들’도 이중섭의 그림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우리 근대미술사 연구가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요소다.

2021년 진환의 사후 70년을 앞두고 진환기념사업회가 발간한 평전은 재조명의 본격화적인 시작을 의미한다. 진환을 통해 한국 근대미술사의 ‘잃었던 고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진환은 이제라도 더 밝은 빛을 받아야 한다. 더 이상 ‘망각의 인물’이 아니다.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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