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41)

6부 7장 병자호란 전야

정치적 거물을 잡아들였으나 용골대와 마부대를 상대할 적임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외교에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어야 했다. 그것을 지렛대 삼아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최명길은 유연하게 사절단을 대하자는 온건파였다. 그렇더라도 용골대와 마부대를 오랑캐라고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가 시원찮더라도 치제와 조상(弔喪)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예법의 나라의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궁중에 들이지 말고 궁궐 밖 금천교 쪽에 군막을 쳐놓고 조상을 받는 것이 옳다는 타협안은 백번 생각해도 바른 대책이었다. 상소문을 접한 상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명했다.

“최명길의 뜻을 받들라.”

이리하여 금천교 위에 군막을 치고 황토와 백토를 깔았다. 뒤이어 북평관의 청나라 사절단이 제물 봉과(보자기로 싼 상자)와 물목단자(부조나 선물 따위 품목과 수량을 적은 부적)를 가자에 담아 실어오기 시작했다.

봉과는 노르끼한 천련자(참죽나무과 식물인 멀구슬나무의 익은 열매를 말린 것. 고련실, 금령자, 고련자, 연실이라고도 한다)에 금박으로 판박이 친 홍딱지를 보기 좋게 붙여서 쌌다. 품목을 보니 감, 배, 밀감, 포도 따위 따뜻한 지역의 과일은 없고, 대신 용안(龍眼:상록 교목 중 하나), 례지(여주의 옛이름), 당대추, 아가위(장미과에 속하는 낙엽성 소교목 열매), 청매, 인향, 낙화생, 홍사, 문동, 귤병 등 견과류 위주의 북방 특산물과 돼지기름에 구워낸 중추월병, 지당가위, 호산자, 대원당, 팔보당까지 이름도 생소한 제물을 곁들이고, 육종(肉腫)으로는 부패하지 않도록 통째로 쪄낸 통돼지가 세 마리였으며, 증과(蒸果:수증기로 쪄낸 물품), 거문고 줄같이 빳빳한 당면 등이었다. 고기만을 주로 뜯는 북방 지역에서 이렇게 온갖 진미를 준비한 것은 과히 성의를 다한 것이었다. 무식한 오랑캐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한 것인데, 이런 정성을 조선 사대부는 일거에 거부하는 것이다.

최명길의 간곡한 상소 끝에 이윽고 제사상 진설(陳設:제사나 잔치 때 상 위에 음식을 법식에 따라 차림)이 끝나자, 미시(오후 1시) 쯤 되어서 용골대와 마부대가 몽골 서달들을 앞잡이 세우고 200여 수행원들을 뒤에 따르게 한 뒤 예조에서 보낸 사린교를 타고 금천교로 향했다.

방금 개국한 청나라 사절단의 제사를 보려고 한양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사절단이 움직일 때마다 구경꾼들이 뒤따르며 와크르 웃었다. 홍모자에 꼬랑지머리, 그리고 사린교를 타고 오는 모습이 이색적인데다 행차들이 웬지 서툴고 어색해보였다. 하긴 말만 탄 민족인지라 네 사람이 받쳐든 가마에 몸을 싣고 털렁거리며 온다는 것이 거북했으리라. 빽빽이 늘어선 구경꾼들이 연신 킥킥거리며 웃고, 어느 쪽에서는 손가락질하며 야유하는 것도 같고, 놀리는 것도 같은 행동을 보이며 웅웅거리자, 이들은 혹시 못올 데를 온 것이 아닌가 순간순간 주춤해했다.

상황이 이랬으니 용골대와 마부대가 조선 백성들이 내놓고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용골대는 몇 번인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성이 났다 꺼졌다 했으나 입을 꾹 다물고 사린교에 몸을 의지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심히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조문사절단을 얕잡아보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예가 어느 천지에 있었던가. 온갖 제물을 준비해 문상 온 사절단을 동물 구경하듯 하는가...

“완전히 원숭이 취급이군. 이런 모멸감은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어찌하랴. 수많은 백성들을 상대하여 시비할 입장이 못되니, 다만 두고 보자는 오기와 복수심을 키우고 있었다. 접반사의 안내로 군막에 마련된 제상 앞에서 청나라 풍속대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을 머리를 조아릴 때(三拜九叩頭), 웃음소리는 절정에 달했다. 아홉 번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리는 모양이 조선의 조문 예법과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나라와 민족간에 조상 예법이 다른 것을 틀리다는 식으로, 무식한 놈들의 장난처럼 여기는 태도들이 그들의 자존심을 한없이 건드렸다. 마부대가 관음증의 관중들을 노려보았다.

-이 새끼들, 자기들 풍속과 다르다고 이렇게 야지를 놓아? 그것도 왕은 고사하고 왕궁이란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북풍 몰아치는 길바닥에 차일을 쳐놓고 조문하라고 하는 짓이 도리에 맞는 일이냐? 두고 보자. 니놈들 왕이 반드시 우리 황제 앞에서 삼배구고두를 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그때도 히히덕거리며 웃을래?

이런 마음은 용골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 사신으로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렇게 괄시를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숙소도 명나라 사신들과 차별하고, 조상(弔喪) 장소도 역마꾼이 들락거리는 말똥냄새, 쇠똥냄새 가득하고, 먼지가 풀풀 날리는 저자거리에서 하라고 하고, 대청을 완전히 손톱 밑의 때쯤 여긴다. 도대체 조문외교라는 것을 아는 놈들인가. 전에 다녀간 아민(阿敏:후금군의 장수)과 다른 수행원들은 왕궁으로 들어가 왕을 알현했는데, 조문사절은 알현은 고사하고 왕궁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했다. 용골대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염탐꾼이 전해준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조선의 신하들이 모두 후금 사절단을 보내지 말고 사신의 목을 따버리자고 상감께 간청했다 합니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