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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45)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645)
6부 7장 병자호란 전야

정충신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괄을 제압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가 들고 일어난 것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오. 우리 조정이 문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미흡했소. 누군가 밀고를 하면 덮어놓고 잡아다가 뎅강뎅강 목부터 잘라버리니 이괄의 명령에 따라 얼결에 가담한 군사들이 두려워서 도망가거나 후금에 투항해버린 것이오. 그래서 역도가 되고, 간자가 되고, 적군이 되어서 모국을 치는 군사가 되었소. 군사만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나 제일 큰 적은 아군이 몸을 돌려서 아군을 공격하는 것이오. 아군을 적에게 하나 잃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지만, 아군이 적도로 돌변하면 아군 둘을 잃게 되는 셈이오.”

정충신은 이괄과도 한때 벗이었음을 되새기며, 사후 처리가 미흡했다는 아쉬움을 가졌다. 군인인 그로서는 나라에 반기를 든 자는 친구건 누구건 제압하는 것이 마땅한 길이지만, 그렇게 제압을 하면, 중신들은 나라의 장래를 고려하여 정치적으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런데 얼토당토 않는 밀고 하나에 애먼 사람을 잡아들여 물고를 틀고 목숨을 날려버린다. 공포감과 겁박을 줄 수는 있어도, 민심 수습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이 결국 국력을 쇠퇴시킨다.

“요즘과 같은 명청교체기가 조선이 주체적으로 설 수 있는 기회인데, 기회를 놓치고 있소. 명청교체기의 모든 시점은 바로 기회요. 성현 말씀에, 놓치기 쉬운 것이 기회이고, 얻기 어려운 것이 시간인데, 지금 이 순간 이것들을 살리지 못하고 있소. 근원은 인조반정이오.”

“인조반정이라니요?”

최명길이 놀라서 물었다. 최명길은 정사공신(靖社功臣)의 일원이다.

“첫째는 상당수의 공신이 부정했소. 광해군을 폐하고 반정에 공을 세운 자가 53명이나 되고, 논공 또한 정의롭지 못했소. 불공정, 불공평하니 반란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오. 중종반정의 정국공신(靖國功臣) 못지 않게 질적으로 나빴소.”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은 1506년 연산군을 폐하고 반정에 공을 세운 1백 17명의 공신들에게 내린 훈호(勳號)다. 그러나 개혁파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등용되면서 부정 공훈자라고 하여 41명을 제외하고 76명을 삭훈(削勳)시켜버렸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훈구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몰려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개혁은 끝내 좌절되고, 따르던 사림 세력이 숙청되었다.

물론 그의 실패는 대사헌 등용 1년만에 급진적으로 개혁을 이루려는 조급성과, 명분이 우세하면 모든 것이 통용된다는 과신에 있었으나, 신료와 군부 등 후견세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 수구세력 청산을 도울 대안세력 등 후견인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으니 반격의 기회를 주고 만 것이다.

실패의 결과는 너무도 심각했다. “붕당을 맺고 자신들에게 붙는 자를 천거하고, 자신들과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고, 명성과 위세로 서로 의지해 권력있는 자리를 꿰차고, 위를 속이고 거리낌없이 오만하게 군림하고 행동했다(중종실록 14년 11월)”고 수구세력을 치기 위해 들고 나온 개혁세력의 혁명공약이 그대로 그들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마는 역사의 역설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로인해 역사가 얼마나 후퇴했는가. 그 반동의 역사는 또 수백 년을 흘러갔다. 명분만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이 혁명이다. 후견세력이 있어야 하고, 세를 관리할 자금이 있어야 하고, 노회한 구세력을 제압할 지모가 있어야 하고, 운도 따라야 한다. 혁명을 뒷받침할 힘이 없으면 단순히 패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역사의 반동을 가져온다.

“그럼 둘째는 무엇이오.” 장유가 물었다.

“둘째는 나쁜 임금을 제거했어도 그가 가진 좋은 정책은 살려야 했다는 것이오. 아무리 나쁜 군주도 좋은 것은 있게 마련이오. 광해는 누르하치의 야망을 알고 있었소. 누르하치는 북방 만족(蠻族)이라는 열등감이 컸고, 그것을 조선국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는 것으로 보상받으려 했소. 그런데 명에 대한 사대에만 의존한 조선 중신들이 누르하치를 왈패 두목으로나 알고 업신여겼소. 광해 임금은 재임 중(1618년 5월) 변방에 있는 나의 보고를 받고 신료들에게 ’누루하치는 천하의 강적이다. 그 위세는 중국 대륙을 삼킬만하다. 그런데 조선의 군세는 약하다. 그런 상황을 살피지 않고 명군을 위해 적진 깊숙히 파병한다면 후금의 반발을 사 낭패를 볼 것이다. 그러므로 국경과 가까운 압록강과 의주 부근에 우리 군사를 대기시켜 상황을 살피는 것이 좋다. 우리는 사대국을 위해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엄을 위해 존재하는 나라다. 그것이 균형외교의 바탕이다’라고 했소.”

그런데 눈치 빠른 사대부 몇 사람이 다투어 명나라에 비밀문서를 보냈다. 밀서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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