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힘든 유배생활 어떻게 이겨냈을까…
그들이 남긴 유산… 문화·관광자원으로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화순 조광조·나주 정도전·강진 정약용 역사숨결 숨쉬는 곳
코로나 19로 멈춰버린 사회 뒤로하고 선조지혜 배우러 떠나자

다산 정약용이 머물던 초당 오르는 산길.

코로나19 재확진으로 전국이 멈춰섰다. 사회적거리두기 2.5단계로 주요 관광지는 폐쇄되고 사람들의 모습도 구경하기 힘든 세상이 됐다.

정부와 각 지자체에서도 코로나19 예방수칙을 강화하고 있는데, 사뭇 예방수칙과 겹치는 관광자원이 있다. 바로 ‘유배지’다. 가까운 도시에서 비교적 멀리 자리잡고 있고, 사람이 모이기도 힘든 장소다.

유배는 중죄인을 처벌하기 위해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수도에 접근할 수 없도록 추방시켜 가족, 친구, 제자도 없이 홀로 유배지에서 생활해야 했다. 유배형은 지난 우리 선조들이 겪어왔던 서글픈 형벌이다.

전남은 과거 조선시대 유·무인도는 말할 것도 없이 내륙까지도 죄지은 사람을 멀리 내쫓는 중앙으로부터 가장 ‘먼 곳’ 중의 하나로, 유배 장소의 최적지였다.

이처럼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현재 전남에는 그들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지주민들과 교류를 통해 형성한 유·무형의 유배 관련 유산들이 산재돼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부산물들은 그 지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유배인들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고 추방을 당해 유배지로 오고, 부와 명예 없이 낯선 환경 속에서 환영받지 못한채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야만 했다. 한때는 학문과 식견이 넓고 총명 받았던 유배인들. 그들은 유배지에서 지내면서 적적함과 외로움을 달래며 시련의 삶속에서 지역민들과 점차 교류를 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담은 일기나 문집을 기록해 놓기도 했다.

이렇게 유배인들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담긴 유배문화자원들을 발굴하고. 그가 거주했던 유배흔적을 찾아 복원하는 유배문화 관광자원화 사업은 전남 지자체들의 관심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였던 나주 백동마을, 훈구파 나뭇잎에 ‘주초위왕’ 새겨 무고 꾸며 역모로 몰려 화순 능주로 유배된 정암 조광조, 민본 정책의 꿈을 새로운 나라에 담을 꿈을 키운 다산 정약용의 첫 번째 유배지 강진 등 그곳 유배지에는 초가를 짓고 비석을 세워 여행객들을 반기고 있다. 강진 등 일부 지자체에서는 특색 있게 ‘유배’ 콘텐츠에 초점을 맞춰 지역 경제활성화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조광조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적려유허비.

◇화순 정암 조광조

조광조가 유배된 후 사사된 능주는 한때 정3품 목사가 통치하던 ‘목사골’로 1920년대까지만 해도 화순보다 훨씬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 능주에 귀양을 왔던 정암 조광조(1482∼1519)선생이 귀양살이 하던 곳을 적려(謫廬)라 했는데 이를 추모하고자 세운 것이 적려유허비라 불린다.

이 적려유허비는 능성현 당시 북문이 있었던 곳 부근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는데 귀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를 갖추고 있다.

귀부는 자연석에 까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만 갖추었고 귀두도 형상만 다듬었다. 비신은 전면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라해 서체 종서 2행으로 썼다. 비신 뒷면은 상단에 ‘정암조선생추모비’라 전액(篆額)하고 그 밑으로는 정암선생의 유배 내력을 기록했다.

이수는 반원형인데 전면에는 쌍룡이 엉키어 있으며 배면에는 한 마리의 용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총 높이는 270㎝, 귀부의 비석높이는 160㎝, 폭은 82㎝, 길이는 200㎝ 이수의 높이는 71㎝, 폭은 109㎝, 두께는 46㎝이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우물천정을 했으며 방풍판을 달았다.

애우당에는 그의 절명시를 비롯 4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자신의 처지를 활에 맞은 새에 비유한 시 ‘능성적중시’도 그중 하나다. ‘능성적중시’에 나오는 능성은 능주의 옛 이름이다. 영정각에는 조광조의 영정이 걸려있고, 유배 중 거처했던 적중거가는 당시 모습처럼 초가다.

서원 입구에는 죽수서원이란 표지석이 홍살문과 함께 서 있다. 200여 미터의 돌계단을 가파르게 올라야 외삼문인 서원의 입구 ‘고경루(高景樓)’가 나오고, 고경루 입구에는 1991년 세워진 ‘죽수서원원지복원비’가 서 있다.

삼봉 정도전이 3년간 머문 초사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을 정립한 실천적 지식인 삼봉 정도전이 나주에서 3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머문 초사. /임문철 기자 35mm@namdonews.com

◇나주 삼봉 정도전

조선을 디자인한 혁명가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는 나주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나주시청을 지나 무안 가는 길로 10여 분 달리면 오른쪽에 ‘삼봉 정도전 선생 유배지’라는 간판이 보인다. 오른쪽 길로 꺾어 곧장 가면 댐이 나오는데, 그 댐 밑 마을이 백동마을이다.

백동마을 앞 정자 주변에 일렬로 늘어선 멋진 노송을 따라 왼쪽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 산비탈에 꽤 깔끔하게 서 있는 초가가 나온다. 정도전이 머문 초사를 복원한 초가다.

초가에 도착하기 전 농로에서 먼저 마주치는 글이 있다.

삼봉 정도전(1342∼1398) 아버지 정운경과 어머니 영주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학에 정진해 예악제도, 음양, 병력, 의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진다.

소재동은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 나주정씨 문산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산골이다. 뒷산은 백룡산(白龍)이요, 앞산은 칠두봉으로 칠봉산(七峯山)이다. 서쪽에는 문평으로 넘어가는 대오개라는 고개가 있다. 삼봉 선생이 거처한 집터 위에는 현재 나주정씨 정자신의 묘가 있으며 선생의 집터는 500년 전 정자신의 아들인 정식장군이 부친의 묘 옆에다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던 곳이다.

정식 장군은 조선 세조 때 궁궐에 불이 났을 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세조를 구해낸 인물로 병조참판에 오른 인물이다. 현재는 대나무밭으로 변하였으나 십여년 전만 해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회진현 거평부곡에 속한 이 소재동(消災洞)에서 유배를 살았던 정도전은 포은 정몽주와 쌍벽을 이루는 고려 말의 경세가로 중국대륙의 신흥강국 명나라를 가까이 하여 원나라의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친원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여 유배를 오게됐다.

지난 2001년 5월에는 소재동비라는 기념비를 세워 정도전의 후손인 봉화정씨 문중인들과 함께 제막식이 열리기도 했다.

강진군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선생이 18년간의 유배기간 중 10여년간 생활하며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강진군 제공

◇강진 다산 정약용

전남 강진은 다산 정약용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한 곳이다. 그중 가장 오랜기간(11년)을 머물며, 후진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이곳에 머물며 목민심서 등 600여권의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1801년 겨울 강진으로 내려온 다산은 주막 골방에서 술에 취해 허송세월을 보내다 어느 날 주모가 던진 한 마디에 마음을 다잡고 사의재라는 당호를 내건다. 생각·용모·언어·행동 네 가지를 올바르게 한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이었을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경세유표·상례사전 등을 집필했고 6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주모와 그의 딸은 다산이 머무는 동안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강진 읍내에 위치한 사의재는 2007년 복원됐다. 사의재는 방 두 칸짜리 작은 초가집으로, 주막의 안채로 쓰이던 공간이다. 아담한 크기의 마당에는 동천정(東泉亭)이라는 작은 정자와 연못이 조성됐고 그 옆으로 수국이 심어졌다. 사의재 바깥채인 주막에서는 아직도 관광객들에게 파전과 막걸리를 팔고 그 주변으로는 저잣거리가 조성돼 당시를 재현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삶과 업적, 학문을 기리고, 그 정신을 현대적인 가치로 계승 발전시키고자 강진군 다산박물관은 2014년 7월 26일 개관했다. 다산박물관은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에 위치해 다산 문화의 확산에 힘쓰고 있으며, 공직자를 위한 강진다산청렴연수원을 신축·개관해 다산의 목민(牧民)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강진군은 지난 10년간 다산 관련 유물을 군 차원에서 구입해 명실공히 다산 관련 전문 박물관으로서의 위상을 세워가고 있다.

상설전시실에는 다산 선생의 출생부터 수학과 관료생활, 유배생활과 다산학단, 해배이후 저술의 정리 등으로 구성돼 있다. 각 구성별로 해당시기의 미디어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유물로서는 다산의 대표저서인 1표2서를 비롯한 다산 선생의 친필 간찰, 강진 제자들의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중·서부취재본부
/박지훈 기자 jhp9900@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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