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작가의 야설천하(野說天下)- <제4화>기생 소백주 (34)술동이

<제4화>기생 소백주 (34)술동이

그림/김리라(성균관대 미술학부 졸업)

그림/김리라(성균관대 미술학부 졸업)
그러나 아무도 아직까지 저 사내처럼 내다주는 간장 종지 같은 술잔을 타박하며 시비를 거는 사내는 없었다. 그저 주면 주는 대로 받아 마시고는 마치 천하의 달필이라도 되는 양 시 한편을 제 멋에 휘갈겨 쓰고는 소백주의 처사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필경 저 사내는 시문(詩文)에도 내 처사에도 안중에 없구나!’

문지방 너머로 대청에 앉아있는 사내의 꼴을 살펴본 소백주는 술을 동이 째 가져오라고 소리친다는 집안에서 일하는 아낙의 말을 듣고는 그가 원하는 대로 동이 째 술을 내다주라고 했다. 아낙이 술동이를 가져다주자 그 사내가 술동이를 받아들더니 그것을 안아 들고는 단숨에 벌컥벌컥 그 술을 다 마셔버리는 것이었다.

소백주는 제 눈을 의심하며 등불 아래 앉아 있는 사내를 흠칫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과연 저 사내가 어떤 글을 써 올릴 것인가?

소백주가 짐짓 의아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사내는 바로 다름 아닌 김선비였던 것이다. 하루 종일 쫄쫄 굶고 수원에 당도한 김선비는 한 끼 끼니를 때울 요량도 하룻밤 잠잘 곳도 없었는데, 소백주의 방을 보고는 한달음에 달려오다 자괴감으로 길 가운데 우뚝 멈춰 서서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허기나 면하고 가자고 마음을 정하고는 달려와서 많이 좀 먹어 보자고 마구 소리쳤던 것이다.

김선비의 마음 속에는 시를 써서 소백주의 마음에 들거나 말거나 그러한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내로라는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지위를 가진 문장가들도 다 제 마음 내키는 대로 낙방을 놓는다는데 어찌 김선비의 시가 소백주의 마음에 들 것인가! 김선비는 오직 배고픔이나 면하고 잠시 쉬어가자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쫄쫄 굶은 빈 뱃속으로 동이 째로 벌컥벌컥 술이 들어가고 맛난 편육 한 접시를 안주로 후다닥 쓸어먹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글을 배워 천하의 바른 도를 세우기는커녕 가정도 건사하지 못하고, 한 몸 바로 세우지도 못했으니 이는 사내로서 글을 배웠다고 할 것이 없었다.

뭇 사내들은 글을 배워 과거에 급제해 임금 앞에 나아가 지위와 권력을 하사받고 가정을 일으키고, 문중을 일으키고, 나라의 동량이 되어 한 몸 반듯하게 세워 빛나는 이름을 창공에 높이 띄워 화려한 금의를 두르고 출세하여 호의호식 온갖 영화를 누리며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김선비 자신은 있는 재산마저 다 뇌물로 바쳐 탕진하고 말았으니 어디다 고개를 둘 곳이 없었다.

하루 종일 걸어 노곤한 몸에 술기가 올라와 잠시 생각에 젖어있던 김선비는 하얀 종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붓 끝에 새까만 먹물을 잔뜩 묻혀 겨누었다.

“급기야는 내 한 끼 허기를 채우기 위하여 한갓 기생 따위의 마음에나 드는 글을 써야 하다니!........추하도다! 추하도다!”

김선비는 내키지 않은지 순간 쩝 입맛을 다시며 붓을 쥔 손가락을 가늘게 떨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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