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공동기획 = 전남 희망 아이콘 ‘섬·바다’이야기
<17> 섬과 섬사람에 대한 인식
“섬 알려면 섬 사람 입장에 서 봐야” 공감대 우선
‘오지·가난’이라는 편향된 기존 인식 전환 필요

‘사람사는 공간’으로 생각못하는 오류도 고쳐야
영화 ‘자산어보’가 던진 진한 메시지 ‘의미심장’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남긴 ‘자산어보’의 주 무대인 흑산도 일대 섬들의 모습. 최근 영화로 개봉돼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전남의 대표적인 섬이다. /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정책 당국과 관련 기관, 그리고 협조하는 시민 덕분에 팬데믹의 파고를 잘 넘어가고 있는 건 다행이다 싶다. 거리두기 지침 때문에 방역을 최우선으로 하는 새로운 일상(New Normal)이 여전하지만 말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다는 소식이 지친 마음을 달래준다. 지난 3월 31일 개봉한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유배지 흑산도에서 쓴 저서에서 제목을 따왔다. 이 영화는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감했던 학자와 섬마을 사람들의 비범한 일상을 흑백으로 담았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정약전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잘 알려진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둘째 형이다. 정약용의 형제로는 약현(若鉉, 1751~1821), 약전과 약종(若鍾), 그리고 약황(若?)이 있는데, 둘째 형인 약전과 각별했다고 알려져 있다. 자신보다 늦게 과거를 보고 관직에 나아갔으며, 한때 좌천되어 함께 지방으로 쫓겨나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형은 흑산도, 아우는 강진으로 오랜 유배길을 함께 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약용은 형에게 애틋한 정을 담은 편지를 자주 써 보냈다.

“책을 저술하는 한 가지 일은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 반드시 십분 유의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해족도설(海族圖說)’은 무척 기이한 책이니, 하찮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도형(圖形)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글로 쓰는 것이 그림을 그려 색칠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학문의 종지(宗旨)에 대해 먼저 그 대강(大綱)을 정한 뒤 책을 저술하여야 유용할 것입니다.” 정약용은 정약전이 구상하고 있던 ‘해족도설’이라는 저서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저서가 ‘자산어보’인 것으로 짐작된다.

저자인 정약전은 ‘자산어보’의 저술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했다. “흑산도 바닷속에는 어족이 매우 많으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적어 박물자(博物者)가 마땅히 살펴야 할 바이다. 나는 섬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어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말을 해서 이를 좇을 수가 없었다. 섬 안에 장덕순(張德順, 일명 昌大)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말은 믿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맞아들여 연구하고 목차를 탐구하여 책을 완성하였는데, ‘자산어보’라고 불렀다.”

영화 ‘자산어보’의 개봉이 반가운 이유는 그 아우인 정약용의 인간관을 전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느 강연 때 겪었던 재미있는 일화 하나가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을 때의 일화를 이야기하던 중에 청중 가운데 한 분이 손을 들어, “함께 쫓겨난 그 형이 자산 정약전이 맞습니까?”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네, 그분이 손암(巽庵) 정약전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얼핏 생각해보니, 동생의 호가 다산(茶山)인 데다 저서가 ‘자산어보’이다보니 자산을 호(號)로 오해한 듯했다. 그래서 자산어보로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동생인 정약용은 장기현(長?縣)으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백서 사건 때문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취조받고 강진으로 이배되었습니다. 이때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었습니다. 경국대전의 유배지 등급에 따르면 정약용보다 정약전의 죄질이 더 나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흑산도는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배인들은 흑(黑)이라고 하는 글자 대신 현(玄)이나 현을 두 번 쓴 자(玆)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자산어보는 흑산도의 해양생물을 정리한 책입니다.”

흑산도를 자산도나 현산도로 바꾸어 부르고 썼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섬이 많은 나라에 사는 우리는 사실 이렇게 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작은 나라에서 대명률의 유배지 등급을 적용하려고 하다 보니 결국은 바다 밖 경계인 섬에 유배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조선시대 한양 사는 양반들에게 섬이란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유배지” 또는 “신선이 노닌다는 바닷속 낙원”이란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대의 섬인 제주마저도 유배의 섬과 영주십경이라는 상반되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냉전시대가 막을 내릴 무렵인 1989년 남북작가회담 참석차 평양을 방문한 작가 황석영은 북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실은 방북기를 펴냈다. 1993년에 출간된 책 제목은 ‘사람이 살고 있었네’이다. 냉전시대 투철한 반공교육을 받았던 이들에게 “아,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 우리와 다를 게 없구나!”라는 방북기의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지금은 종합편성채널의 북한이탈주민 증언 예능프로그램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북한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는 지독히도 우리 중심적인 시각과 태도에 대한 반성이다. 이러한 반성은 섬과 섬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사람이 사는 일상 공간으로 섬을 생각하지 못하고, 섬사람을 섬의 풍경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대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홍어 댕기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댕기는 길은 가오리가 안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이 창대에게서 첫 번째 배웠다는 이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섬이 맞닥뜨린 새로운 일상, 섬의 정체성은 섬과 그곳에 사는 사람 입장에 서지 않으면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글/김치완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정리/박지훈 기자 jhp9900@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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