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공동기획 = 전남 희망 아이콘 ‘섬·바다’이야기
<22> 소금과 섬
태양광·염전 공존 주민 문화공동체 ‘상징’
일제 강점기 천일염 관영화로 전남소금 ‘위기’ 대두
해방 이후 천일염전 부족 … 민간차원 개발 허락 계기
신안 비금도 중심 전남 연안지역 소금 생산 급부상
광물에서 2008년 공식 식품으로 인정 ‘인식 변화’
건강·기능성 상품 개발 열풍 속 친환경 문제 대두

염전은 섬의 역사이자 주민들의 공동체 문화가 담겨있는 상징공간이다. 지금은 하나의 중요 관광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사진은 신안 대규모 염전단지 전경. /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전라도는 맛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맛의 비결 중 하나로 주목되는 것은 ‘소금’이다. 이규경(李圭景)이 1800년대 초에 저술한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소금은 백 가지 맛의 어른”이라 표현되어 있다. 음식 맛을 좌우하는 것이 소금이라는 의미이다.

예부터 전라도는 소금의 생산지였다. 그중에서도 ‘나주염(羅州鹽)’을 가장 으뜸으로 평가했다. ‘나주염’이라고 불렸던 이유는 지금의 신안군에 해당하는 여러 섬들이 당시 나주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전남의 섬은 오래전부터 소금생산지였다. 전통적인 소금생산법은 바닷물을 갯벌 위 염전에 올려서 짠물을 더 진하게 한 후 가마에 넣고 끓여서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을 ‘화염(火鹽)’ 혹은 ‘자염(煮鹽)’이라 불렀다. 전남 지역은 염전 조성에 필요한 갯벌과 해안 습지가 발달했으며, 기후가 더 따뜻하여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제염의 시기가 길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어업이 성행하여 소금의 수요가 많다는 점도 염전 발달의 배경이다. 자연스럽게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은 섬사람들의 중요한 생활 기반이 되었다.

조선 시대 섬 지역 소금생산의 내력은 다양한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조선 초기인 ‘태종실록’ 1408년 2월 3일 기사에 “암태도 염간(鹽干) 김나진과 갈금이 침입해 온 왜적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염간’은 염전에서 소금 만드는 일은 전담하는 사람을 칭한다. 조선 초기는 섬에 주민들이 살지 못하게 했던 공도(空島) 정책의 시기였다. 그러한 시기에도 일부 섬 지역에서는 소금을 생산하고 있었고, 그들이 우리 국토인 섬을 지키고 있었다. 소금을 만드는 사람들이 섬사람들의 중요한 뿌리였음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1637년 국란을 피해 지도(智島)에서 피난 생활을 했던 나주 출신 김선(金璇)의 기록인 ‘타래염촌(他來鹽村)’·‘논풍속(論風俗)’ 등에 소금생산과 밀접한 섬사람들의 생활상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1901년부터 1907년까지 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한 김윤식의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에는 “섬사람들이 소금을 구운 후 돈으로 바꿔 세금을 낸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마을 인근에 소금가마가 많다는 등의 내용이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염업은 국가정책과 사회환경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근현대기 사회환경 흐름에 따라 살펴보면, 크게 4차례 큰 변화의 시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천일염 관영화 정책 시기이다. 1907년 인천 주안 지역에 태양열을 이용하는 방식의 천일염전이 최초로 조성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대규모의 천일염전이 경기 및 현 북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고, 총독부는 천일염을 관영화하였다. 이를 통해 세입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식민지 조선을 원료 생산기지로 활용했다.

천일염전은 식민지 경영에 유리한 대도시 및 교통 인프라가 갖춰진 곳에 집중되었다. 화염을 천일염으로 모두 교체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이 투자되어야 했고, 소금 생산자들의 반발도 컸을 것이다. 때문에, 기존 전남의 화염을 천일염전으로 개선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지역에 천일염전이 개발되면서 섬 주민들의 소금생산은 위기를 맞았다. 소금생산의 전통적인 중심지가 옮겨졌고, 조선총독부의 천일염 관영화로 인해 화염은 소금 시장에서 쇠퇴하였다.

섬사람들은 생활고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고, 소금생산을 업으로 하던 섬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야 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생계를 위해 이북 지역의 천일염전으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두 번째는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섬 지역에도 천일염전이 개발되기 시작하는 상황이다. 대규모의 천일염전이 주로 북쪽에 있다 보니 남쪽은 소금 부족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는 섬사람들에게 다시 소금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새로운 기회였다. 정부는 부족한 소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차원에서 천일염전을 개발하는 것을 허락했고, 현 신안군 비금도를 시작으로 섬 지역에 천일염전이 개발되어 전남 각 연안 지역으로 급속도로 퍼져갔다.

옛부터 소금은 섬 사람들에게는 부를 축척할 수 있는 생활 수단이자 삶의 전부였다해고 과언이 아니었다. 최근들어 염전의 미래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사진은 신안 염전에서 소금 생산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이러한 흐름 속에 전남의 섬, 특히 현 신안군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소금생산지로 다시 부상하였다. 또한, 섬 지역의 천일염전 개발은 6·25전쟁기 피난민을 정착하는 구호사업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피난민들이 천일염전 개발사업에 투입되고, 이후 염전에서 소금생산업을 하면서 현지에 정착하여 살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처럼 천일염전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그 흐름을 같이 해왔다. 이후 천일염전은 전남의 섬을 상징하는 대표경관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세 번째는 2008년 소금이 공식 식품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전까지 염전에서 개발되는 소금은 광물로 분류되었다. 소금이 식품으로 인정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드디어 염업 종사자들의 숙원이 해결된 것이었다. 식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염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

섬을 떠났던 청년들이 돌아와 부모의 가업을 잇는 현상도 생겼고, ‘염부’의 이미지도 식품을 생산하는 ‘소금장인’이라는 인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소금 상품도 이를 계기로 훨씬 다양해졌다. 소금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건강 소금과 기능성 소금을 생산하는 노력이 활발해졌다.

반면, 식품화 이후에는 그에 걸맞게 기존 염전 주변의 비환경적인 요소들이 친환경 소재로 개편되어야 했다. 염전에 깔려있던 부직포나 소금창고의 슬레트 지붕 등이 개선되었다. 그로 인해 많은 예산이 들어가다 보니, 현장에서 염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고충이 따르기도 했다.

네 번째는 염전의 미래와 지속가능성을 고민해야 하는 현시점이다. 섬에 염전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소금 가격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섬에서 염업에 종사할 인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이 주요 원인이 되어왔다. 최근 신재생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한 거점으로 섬이 활용되기 시작한 것도 중요한 변화요소이다.

넓은 평지 형태인 염전은 태양광 시설을 설치하기에 유리하여 많은 염전들이 태양광시설로 변경되고 있다. 힘들게 염전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염전을 판매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어가고 있다. 이는 사회환경 변화에 순응해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염전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최근에는 태양광과 염전이 공존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설이 보급되고 있기도 하다. 염전은 섬의 역사이자 주민들의 공동체 문화가 담겨 있는 상징공간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염전의 미래는 염업 종사자에게만 맡겨 놓을 일이 아니라,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분야이다. 변화의 시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섬의 염전이 지속 가능할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글/최성환(목포대 사학과·도서문화연구원 교수)

정리/박지훈 기자 jhp9900@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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