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현 (피아니스트 겸 작가)

 

낮에는 여전히 무덥지만 9월이 되면서 저녁에는 꽤 부드럽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고독의 계절이라 불리기도 하고 싱글들에게는 옆구리가 더욱 시리는 계절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필자에게 가을은 아련하고 쓸쓸한 비련의 주인공 같다. 그래서인지 가을이 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악이 브람스 음악이다.

30대 중후인 필자가 매년 가을이 되면 브람스 음악에 빠져 살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의 음악에 호감을 느낀 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처음 접한 그의 음악은 마치 고등학교 때나 배울 법한 미적분 같았다. 어렵고 심오 했으며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부감이 가득했다. (내가 호기심을 갖기엔 부담스러운 음악이라며 그의 음악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 다시 듣게 된 그의 음악은 사실 여전히 어려웠지만 과거와는 좀 달랐다. 알 수 없는 묵직함과 듣는 이를 압도하는 아우라가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가 만든 다양한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그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브람스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여자만 가슴에 품었다. 그 여자와 결혼을 할 수도 없었고, 연애를 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드러낼 수 조차 없었다.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뺏어간 그녀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봐주고 자신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그의 음악적 은인인 슈만의 부인 ‘클라라’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클라라가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그의 마음 속엔 오직 그녀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죽고 나서 몇 달 뒤 자살했다.)

스승님의 여자로서 좋아해서는 안 될 그녀를 마음에 품은 그는 그녀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녀가 힘들 때 말없이 그녀를 도왔고 지켜주었으며 그녀의 가족을 마치 자기 가족처럼 돌봐주었다. 슈만이 죽고 나서 그녀와의 사랑을 꿈꾸기도 했지만 반듯한 그녀는 절대 선을 넘지 않았고, 그녀의 곧은 마음에 그 조차 선뜻 나서지 못했다. 사실 브람스와 클라라는 서로를 원했지만 드러내지 않았고, 서로를 외면했지만 가슴은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표현하지 못하고 드러내지 못한 짝사랑의 마음을 음악에 쏟아 부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담은 음악을 만들어냈고 그 어떤 작곡가보다도 음악에 더욱 매진했다.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며 살아야만 했던 그에게 음악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음악 안에서 그는 사랑을 표현했고, 열정과 고독, 그리고 그리움을 마음껏 분출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은 다른 작곡가의 음악과는 달리 절제미를 가지고 있었고 드러나지 않는 묵직함과 과묵함이 가득했다.

이런 그의 일편단심의 신념이 녹아 있어서인지 인생의 희노애락을 경험하면 할수록 필자는 자연스레 그의 음악을 찾게 되었다. 비록 삶 속에 작으면 작고 크다면 크다고 느낀 사랑이라는 감정이지만 브람스에게 사랑은 삶의 전부였기에 일편단심은 그의 삶의 철학이자 그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었다. (그의 이런 모습을 통해 필자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그의 삶을 좋아한다.)

각박하고 예의와 도덕이 진정 무엇인지 헷갈리는 세상 속을 헤매는 필자에게 그는 단비 같았고 희망 같았다. 묵묵히 자신의 신념을 지킨 채 살아간 그의 모습이 가끔 길을 잃고 흔들리는 나를 다시금 잡아주었다. 코로나로 인해 더욱 예민해지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짜증이 늘어난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데 회의감과 무기력함이 나를 지배한다면 브람스 음악과 함께 당신이 진정 추구하는게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필자가 추천하는 곡은 ‘브람스 인터메죠 118번 중에 2번’ 이다. 이 곡은 클라라가 죽기 전 브람스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클라라가 브람스를 위해 연주한 곡이며 클라라에게 헌정되었다. 아름답지만 마음 한 구석을 애잔하게 만드는 가슴 시린 선율과 함께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가을 저녁에 딱 어울리는 곡이다.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힐링을 느꼈으면 하는 필자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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