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자(동화작가)

 

강원도에 사는 서 작가가 간장과 식초에 절인 고추장아찌를 보내주었다. 큼직큼직한 고추에 마늘까지 곁들인 고추장아찌 맛은 오래전 시어머님이 담가주셨던 그 맛과 같아 매끼 즐겨 먹는다. 입맛이 없던 차에 정말 고맙게 먹고 있다고 전화했더니, 며칠 뒤 넉넉하게 두 봉지나 또 보내왔다. 분명 안 매운 고추로 만들었다는데, 가끔씩 매운 고추가 걸려들어 딸꾹질을 하고 눈물콧물 흘려내곤 했다. 어떤 게 매운 고추인지 가려낼 수 없어 고민 끝에 고추장아찌를 가위로 잘게 자른 다음 믹서에 넣고 갈았다. 연녹색의 걸쭉한 게 약간 매큼하면서도 특별한 맛이 나는 일품의 요리가 되었다. 밥에 넣어 비비고, 김 쌀 때 반 숟갈 떠 넣기도 하고, 날마다 즐겨 먹고 있다.

가끔 회식자리에서 매운 청량고추를 눈도 깜박 않고 먹는 친구가 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맛있다며 앉은 자리에서 두세 개를 더 먹어치우는 모습을 놀랍게 바라보곤 했다. 어디 그것뿐이던가. 그 친구 앞에서는 내가 한없이 나약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믹서 도움으로 매운 고추, 안 매운 고추 섞어 중간 맛으로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자랑할 겸 서 작가에게 전화해서 고추장아찌의 새로운 변신을 알려주었다. 서 작가 역시 완전 별미였다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요즈음 고추장아찌 변신을 여기저기 자랑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낸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은 온도와 압력에 반응하는 우리 몸의 센서를 발견하는데 공로가 큰 미국의 데이비드 줄리어스 교수와 아뎀 파타푸티언 교수가 받게 되었다. 특히 데이빗 줄리어드 박사는 매운 고추를 대상으로 연구를 했는데, 우리가 고추 먹을 때 매운 맛 때문에 땀이 나는 이유는 혀가 매운 맞을 감지하는 미각 세포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감정이 따르는 통각세포라는 것을 최초로 발견한 것이다. 그러니까 매운 고추 먹고 땀이 나고, 혀가 얼얼하면 혀가 곧바로 뜨거운 통증의 위기 상황을 뇌에 보낸다. 매운 것은 맛이 아니고 몸 안의 위기상황이라는 발견이다.

그동안 매운 것을 잘 먹는 사람, 매운 것을 못 먹는 사람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과 잘 먹는 사람은 몸에서 그 위기상황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반응 정도가 달라지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위의 발표 논문을 수많은 연구자들이 읽고 영감을 받아 후속 연구를 하리라 생각하니, 앞으로 여러 분야에 적용될 것 같다. 각종 질병은 물론 신경계열의 의학 분야, 더 나아가 과학 분야에도 엄청난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문득 어렸을 적 마당에 커다란 깔개를 펴고 붉은 고추를 말리던 일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새들이 날아와 고추를 먹지 못하게 종일 지키고 계셨다. 우리는 매워서 못 먹는 고추를 새들은 잘도 먹었다. 궁금해서 할머니에게 물은 적이 있었는데 “새들은 빨간색을 못 보고, 매운 맛도 못 느낀단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할머니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도 증조할머니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자라면서 알게 된 사실은 식물이 열매를 만드는 것은 그 안에 든 씨앗을 새들의 배설물과 함께 먼 곳에 퍼뜨려 달라는 뜻이라는 걸 알았고, 자연의 생존 질서와 신비로움에 놀라곤 했다.

고추는 비타민 C가 사과보다 18배나 더 많아서 시력보호는 물론 비만예방, 치매예방에 좋으며 스트레스 해소에도 특효란다. 엄청나게 매운 것을 먹으면서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들도 매운 고추 먹는 일이 맛이 아니라 자신의 통각 세포에 자극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매운 것이 들어오면 우리 몸의 뇌는 순간적으로 혈액순환을 촉진시켜 피부온도를 엄청 올리면서 콧물, 눈물 더러는 딸꾹질로 통증에 대처하느라 얼마나 정신없었을까 생각하니 그냥 미안하다.

쌓일 대로 쌓인 코로나19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면 고추보다 더 매운 것인들 어찌 못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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