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돌아보고 기억하는 여행
여순사건 다크 투어리즘 시티투어

 

여순사건 당시 인민대회가 열렸던 중앙동 로터리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된다. 스페인 출신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된다’고 했다. 역사적 고초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에 간직되어 온 아픈 흔적들조차 끌어내고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사회적 참사나 역사적 비극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나 재난·재해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인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 주목받고 있다.

전남 여수시가 지역의 상흔이 남겨진 역사의 현장을 관광 자원화하려는 시도에 나섰다.

여수는 낭만이 가득한 밤바다와 섬 등 멋진 풍광이 펼쳐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자랑하는 여수 구석구석에는 고통스럽고 슬픈 역사의 현장도 함께 한다. 여수는 제주 4·3사건과 밀접한 여순사건의 발원지이다.

여수시는 우리나라 광복 직후 민간인 1만여명이 희생당한 여순사건을 주제로 한 탐방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마련했다. 여순사건의 역사 현장을 돌아보는 시티투어 운행을 지난 8일부터 시작했다.

여순사건의 대상지를 해설사와 함께 둘러볼 수 있는 ‘여순사건 다크투어리즘’은 사건의 발원지인 여수시에서 직접 개발한 상품으로 관광객들과 여순사건 당시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도록 마련했다

△모진 고통의 역사를 품고 있는 여수

만성리 형제묘
만성리 학살지 앞 레일바이크/장봉현 기자

12일 오전 전남 여수 만성리 해수욕장 주변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전라선 폐선 부지에 설치된 레이바이크를 타는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시원하게 펼쳐진 남해 바다가 감성을 자극한다.

여수세계박람회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만성리 해수욕장에서 자동차를 이용해 해안가로 2~3분 지나자 여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역사적 비극, 여순 사건의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한 관광객들이다.

해방 이후 1948년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반란군을 진압한다. 군인은 물론 민간인들까지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만성리 학살지는 부역혐의자로 잡혀있던 당시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 수용자 중 수백여 명의 민간인들은 이곳으로 끌고 와 집단학살 한 곳이다. 1948년 11월 초부터 협곡과 같은 이 골짜기 속으로 던져 넣은 후 흙, 모래와 돌로 암매장했다. 당시 이곳은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만성리 학살지 안내판은 “여수 시내를 가고자 했던 만성, 오천 주민들은 공포의 땅이 된 이 지름길을 두고 일부러 먼 거리를 돌아다니기까지 했다”고 적혀있다.

학살지 옆 형제묘는 학살 후 유족들이 시신들을 모아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만든 큰 묘다. 1949년 1월 부역혐의자 중 125명을 이 자리에서 총살하고 장작더미에 기름을 부어 불태웠다고 한다. 시신은 3일간이나 불에 탔고, 이후 처형된 가족들이 수습해 이곳에 묻었다. 많은 시신이 묻혔지만 정작 무덤은 봉분만 약간 클 뿐 초라하기만 하다. 누군가가 세워놓은 노란 바람개비만이 외롭게 돌고 있었다.

이곳에서 참배를 하던 조은희(54.경기도 부천시)씨는 이날 친구들과 3일 코스로 여수여행에 나섰다고 했다.

조씨는 “특별법이 제정되고 여순사건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면서 여수에 온 김에 시티투어프로그램을 이용하게 됐다”며 “미디어 등에서 보고 들었던 여순사건의 상흔은 생각보다 심각했고, 수많은 민간인이 끌려와 학살당했던 현장에 오니까 가슴이 먹먹하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고 느낀다는 점에서 우리 미래 세대들이 꼭 봐야할 교육현장이다”고 강조했다.

‘국제해양도시’. ‘낭만의 도시’ 여수가 다크 투어리즘 현장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다크 투어리즘은 단순히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느끼고 배우고 깨치려 찾는 어두운 역사의 현장답사다.

홀로코스트의 현장인 폴란드 아우슈비츠수용소,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수십만명의 중국인이 일본군에 학살당한 중국 난징대학살 기념관, 중국 하얼빈에 있는 일제의 731부대 생체 실험실 등이 대표적인 다크 투어리즘 현장이다. 이들 지역은 과거의 참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교훈을 얻는 장소로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여수시 역시 해방정국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생긴 여순사건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아픔이 남아 있다. 시민단체 주도로 사건 현장을 둘러보는 탐방 행사가 가끔 열리고 있었지만 체계와 규모 등의 면에서 약간 미흡했었다.

이에 여수시는 여순사건의 왜곡된 진실과 아픔을 알리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역사를 바로 보자는 인식 확산을 위해 지난 8일부터 ‘여순사건 다크 투어리즘 시티투어’ 운행을 시작했다.

여순사건의 대상지를 해설사와 함께 둘러볼 수 있는 여순사건 다크 투어리즘은 여순사건의 발원지인 여수시에서 직접 개발한 시티투어 상품으로 관광객들과 여순사건 당시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도록 마련했다.
 

여수 오동도에 마련된 여순사건 기념관

여수 엑스포역에서 출발해 가장 먼저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기념하기 위해 소규모로 조성된 오동도 여순사건 기념관 도착해 영상, 포토존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여순사건을 대략적으로 이해한 뒤 본격적인 투어를 시작한다.

이후 반군과 지방좌익이 1948년 10월 20일 중앙동 로터리 광장에서 1천여명의 시민이 참여해 인민대회를 열었던 이순신광장, 진압군이 부역자를 색출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지목하는 손가락 총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서초등학교, 여순사건을 일으켰던 신월동 14연대 주둔지, 손양원 목사 순교지, 만성리 형제묘·위령비를 찾는다.

시티투어 버스를 타면 개인적으로 접근이 어려운 14연대 무기고 동굴을 방문해 해설사의 지도 아래 체험할 수 있다.

여순사건 다크 투어리즘은 격주 수요일과 일요일, 월 4회 오전 10시30분부터 약 6시간 동안 운영한다. 탑승예약은 여수시 홈페이지 OK통합예약포털에서 가능하다. 요금은 성인 1만원, 여수시민·경로·장애인·군인·학생은 5천원이다.

시티투어 탑승 소감을 개인 SNS와 블로그 등에 올린 후 주소(URL)를 여수관광문화 홈페이지에 올리면 매달 추첨을 통해 선물이 주어진다.

여수시 관계자는 “내년 1월 여순사건 특별법 시행을 앞두고 사건의 배경과 전개, 현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며 “많은 관광객들이 새로운 역사관광상품인 여순사건 다크 투어리즘을 통해 여수의 아픈 역사를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사건을 잘 모르는 국민에게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왜 필요한지 보여주려 한다”고 덧붙였다.

여순사건 다크 투어리즘은 꼭 여행 목적지로 삼기보다는 휴가든 출장이든 여수를 찾는 길에 잠시 짬을 내어 들러볼 만한 곳이다. 화려한 여행지도 좋지만 한국 현대사의 상흔으로 남아있는 비극의 현장을 찾아 과거를 되돌아보고 기억하는 것, 그 고통을 나누고 어루만지는 것도 여행자의 몫이다. 동부취재본부/장봉현 기자 coolman@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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